1
예루살렘은 달이 밝다. 금빛 모스크들은 달빛으로 부연하게 빛나고 낮 동안의 열기는 금새 차게 식는다. 말릭은 본부 지붕에 앉아있었다. 바람이 부나 싶더니 빈소매가 펄럭거렸다. 죽여야할 사람들의 이름을 달빛 아래에 들여다 본다고 해도 일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나와있는 것은 갑자기 지붕 사이로 쏟아진 달빛에 반쯤 취했기 때문이다. 신이 굽어 살피는 도시지. 모스크 사이로 드물게 피어오르는 불빛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예루살렘을 발 아래 둔 채 말릭은 이 축복받은 도시에서 뼈를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도 생각했다. 마시아프에서의 삶은 나쁘진 않았지만 좋은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특히 기억할 좋은 것이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지만 잊고 싶은 것들이 마시아프에 더욱 많았다고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좋은 밤에, 불청객은 갑자기 나타났다. 알타이르는 독수리보다도 가볍게 말릭의 옆에 앉았다. 달에 취하기라도 했나, 말릭? 말릭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비난했다. 자넨 지금쯤 마시아프에 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알타이르는 개의치 않고 도시를 내려다 봤다. 저길봐, 유대교 지역을. 그들은 지금 자고 있어. 그들도 꿈에서 그들의 신을 만날까? 말릭은 장부를 접었다. 들어갈 시간이다. 들어가야할 이유는 백만개라도 만들 수 있다. 관심없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릭이 말을 맺었다. 그들도, 자네도. 알타이르는 말릭의 소매를 잡았다. 바람에 날려 펄럭이는 소매였다. 한때는 거기에 탄탄한 팔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말릭. 음절이 울적하게 꺾인다. 나는 결여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말릭은 일어서지 못했다. 소매가 붙잡혔으므로, 알타이르가 이미 없어진 팔을 붙잡고 있으므로. 나는, 결여에 대해 생각하는데, 내가 자네의 팔을 잘라내서 빈 공간이 생겼다면 그것은 누구의 결여인가에 대해 생각한다네. 이 공백은 자네 것일까, 아니면 내것일까 말릭. 우리의 서약으로 잃어버린 내 네번째 손가락처럼 말이야. 알타이르는 달빛 아래에서 자신감을 잃고 우물쭈물거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이마엔 땀이 났다. 어지러웠다. 여전히 앉은 채로 말릭의 목소리가 알타이르의 목소리를 따라 아래로 추락한다. 그냥 팔병신이라고 불러. 난 자네가 정말 싫거든. 다시금 바람에 소매가 펄럭인다.
2
R의 언어
나는 자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좋아. 갑자기 알타이르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뭐. 나는 지도를 그리고 있었고 더딘 작업에 싫증을 내던 차였다. 예루살렘은 조금씩 기울어져서 종국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것들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R을 발음할때 약간 말을 끄는 게 좋아. 주저하는 것처럼.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언어학자나셨네, 알타이르. 그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가 그렇게 가깝게 서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손이 내 입술에 닿았다. 다시 한 번만. 전에없이 묵직하고 또 은근한 목소리로 그는 내게 '부탁'했다. 한번 더 불러줘. 나는 절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의 거친 손 끝은 내 입술에서 여전히 멈춰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에서 말했다. 알-타-이-르. 그의 손이 입술을 넘어 들어온다. 앞니를 훑고 물컹한 혀에 닿기까지. 그의 손에서 짠 맛과 쇠맛이 동시에 났다. 나는 지지않고 다시 한번 말한다. 알타이르. 그가 귓가에서 낮게 웃었다. 나는 등이 바닥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알타이르의 손가락이 내 입안을 휘젓고 이젠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말릭. 말릭. 환청이 들린다. 알타이르가 크게 웃는 환청이다.
3
말릭. 마시아프로 향하는 길에 자네에게 편지를 띄우네. 성당 기사단에 대해 알아봤나? 지금쯤 자네라면 이미 그들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내 말이 모두 진실임을 알았을 거라 믿네. 자네는 전부터 우리 중 누구보다도 유달리 진실을 잘 밝혀내는 재주가 있었으니, 우리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자들의 음모를 이미 파악했겠지. 나도 자네같은 시선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 왜 이 편지가 자네의 손에 들려있는지 말이야. 불빛에 비쳐봤나? 물론 농담이야. 불빛에 비춰봐도 숨겨진 글자따윈 없네. 사실 나도 왜 이걸 쓰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이 편지를 써야한다는 것만 명확하게 알고 있지. 어제 나는 다른 이들의 더운 피로 몸을 적신 채 대지를 밟고 서 있었네. 팔은 한 없이 무겁고 손목은 비틀린 것처럼 아파왔지. 내가 지나온 길 위에는 시체가 쌓였네. 그럼에도 내 앞을 막아서는 자들은 봄날의 잡초처럼 밀려들어왔지. 그 많은 죽음들. 우리는 언제나 식탁 위에, 카펫 위에 죽음을 드리우고 살지만 어제는 나 자신이 죽음 그 자체가 된 기분이 들었네. 머릿 속에는 오직 로베르를 죽여야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갑자기 그 목표는 아주 첨예하고 좁은 바늘구멍같이 느껴지고 내 머릿속의 나머지 공간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더군. 어제 나는 진정으로 나를 잊어버렸네. 내가 가장 잘하던 일을 하기 위해 한 자루의 검이 되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이가 나간 칼이겠지. 내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혀가 잘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십자군들을 베어 전진하면서, 어느때보다도 많은 피를 묻히면서, 그리고 아직 자네가 알지 못하는 -이 편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배신을 깨닫는 순간 나는 진실로 분노도 기쁨도 잊고 그저 텅 빈 존재가 되었다네. 마치 파노라마처럼 내 아버지가 죽던 날과 아버지의 친구가 자살하던 밤, 스승님께 검을 배우던 날들이 스쳐지나가가고 나는 마치 관객이 된 것처럼 나의 일생을 펼쳐 볼 수 있었지. 동전 서푼의 오만함이여. 신조 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는 그 멍청한 얼굴을 나는 거울처럼 들여다봤네. 나는 나의 공허를 보며 동시에 누군가를 떠올렸다네. 나와는 다른 사람, 결코 오만한 적이 없는 겸손한 자, 신조를 믿고 따르며 진정한 그림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자네가 떠올랐다네.
피를 씻어내면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자네가 몹시 보고싶다는 것을 인정했다네. 내가 나의 바닥을 봄으로서 느낀 공허와 절망을 이해해 줄 사람은 자네 뿐일거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 용서하게, 말릭. 이걸 읽을 때 자네의 얼굴이 궁금해지는군. 그 표정을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나는 사선을 넘어 마시아프로 간다네. 이 긴 여정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다시 한번 사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예루살렘에서 기쁘게 자네와 햇빛을 쬐고 싶네.
안전과 평화를,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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