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듣고 쓰게 된 것.
1
그 의뢰를 받았을 때 알타이르는 입안 가득 쿠바식 샌드위치를 밀어넣고 있었다. 의뢰는 으레 그런식으로 접수됐다. 밥 먹는 테이블 위에서, 진흙이 붙은 휠에 호스로 물을 뿌리며,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하는 가든파티에서. 헤이 알타이르 어제 그 술집 가봤어? 내가 일을 하나 받아왔는데 말이야. 언젠가는 술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의뢰를 받은 적도 있다. 말릭은 그런 알타이르가 짐승이나 다를게 뭐냐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 동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말릭도 예전에는 맥도날드에서 의뢰를 받았으면서.
B대로있지. 거기 성당 가봤어? 알타이르는 말릭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말릭은 심혈을 기울여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차고 밖으로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고물 자동차를 수리하는 것이 말릭의 유일한 취미였다. 아니, 거긴 체지방률 50% 이하는 못 들어가는 곳 아니었나? 그게 말릭이 농담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재미는 별로 없었지만. 거기 호스 좀 줘봐. 여기 안에서 터진 것 같아. 기름이 번들거리는 손으로 말릭이 알타이르 옆 공구통을 가리켰다. 유일한 손이었다. 한 손으로 차를 어떻게 고쳐. 알타이르는 만날 때마다 그 말을 했지만 말릭은 무시했다. 거기 신부를 죽여달라던데. 알타이르는 말릭에게 호스를 건내주고 차 옆에 기대섰다. 너 기독교 천국에는 못가겠네. 말릭은 냉각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게 걱정돼? 알타이르는 그 거뭇한 뒷덜미가 얄미워서 한손으로 꾹 눌렀다. 내가 팔 하나만 더 있었으면 너부터 죽이고 돼지같은 신부를 구했을거다. 버둥거리면서 말릭이 말했다. 맞아, 그랬겠지. 알타이르는 말릭을 놔주고 둘은 맥주를 나눠마셨다.
2
어떻게 죽였으면 좋겠데? 말릭의 말에 알타이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칼. 피를 많이 흘리도록? 피거품속에서 죽도록. 말릭은 기름진 손을 냅킨으로 닦았다. 몇시간 전에는 엔진오일이 묻어 있었지만 지금은 감자튀김의 번들거리고 고소한 기름이 묻어있다. 그는 뭐든지 한손으로 한다. 알타이르가 하듯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닦아줄수는 없는 것이다. 왼손에 냅킨을 쥔 채 이리저리 구긴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가끔은 그가 아직 팔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신부님이 미움을 많이 받았나보군. 신한테 말을 잘 안해줬나보지. 알타이르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언제 갈거야? 몰라, 아직 생각 안해봤어. 아니 이 집에서 언제 나갈거냐고. 말릭은 쓰레기를 한번에 들고 부엌 옆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 알타이르는 그의 등 위로 조명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속도에 맞춰서 알타이르는 느리게 대답했다. 그것도 생각 안해봤어. 물흐르는 소리가 났다. 컵을 씻고 있을 것이다. 이 집은 컵이 하나 뿐인데 말릭만 컵을 쓰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곳이 말릭의 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나고 물소리가 그친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생각을 되게 많이 하고 사는 사람같다. 말릭은 한 손이 젖은 채 소파로 돌아와 알타이르 옆에 앉고 이 비좁은 소파만큼이나 비좁게 붙어앉는다. 티비에서는 옛날에 종영된 드라마를 다시 해주고 있었다. 알타이르는 티비를 보며 '네 팔이 자라면'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그만둔다. 별로 낭만적이지도 않은데 너무 소름끼치는 것 같은 말이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닫고 말릭의 팔 아래에 파고들기로 한다
말릭는 툴툴 거리지만 알타이르를 그냥 둘 것이고 그렇게 잠이 들 것이다.
3
알타이르는 사탕을 물었다. 상큼한 향과 함께 유자맛이 났다. 잘 보지 않고 편의점 매대에서 집어든 것이 문제다. 아무렴 어때. 신부를 죽일 때 상큼한 사탕을 먹으면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도 아닌데. 표적 근처에서 담배꽁초를 버려서 꼬리를 잡히는 것이 훨씬 심각한 일이다. 말릭한테 먹어야겠다. 사탕상자를 후드 주머니 안에 밀어넣으며 알타이르는 생각했다. 자고 있으면 그 입에 넣고 반응을 봐야지. 재미있을걸. 혼자 있으면 이런 잡다한 생각을 계속한다. 그런 생각들은 연속성이 없으며 별 의미도 없는 생각들이다. 문제는 알타이르의 일이라는 것이 대부분 혼자서 해결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알타이르는 계속해서 딴생각을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졌다. 알타이르는 난간에 올라선 채 건너편을 내려다 봤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마친 노파가 길을 나선 이후로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밤에 보는 성당은 다소 음울했다. 성당에 가본 적 있어? 말릭에게 물었을 때 그는 어릴 때 부활절에 가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땐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줬었거든. 세례를 받지 않아도 누구나 줬어. 그런데 몇년 지나니까 교구에 등록된 사람만 주더라고. 말릭은 면도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줬다. 알타이르가 성당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신부가 성당 2층 뒷편에 있는 사제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공을 많이 들이지, 그 사람들은. 말릭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렇게 정리했다. 가서 봐봐. 알타이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타이르가 사는 동네에 비하면 성당이 있는 거리는 깨끗하고 가로등 불도 잘 들어왔다. 후드를 눌러쓴 알타이르는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길을 건너 성당에 가까이 다가가자 잠든 성당의 모습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성당 입구에 세워진 성모마리아 동상은 오랜 세월 탓에 본래의 색을 잃었다. 알타이르는 충동적으로 성모마리아 상에 인사를 하려다 참았다. 부적절한 행동이야. 그는 굳게 닫힌 정문을 돌아 미리 봐둔 담벼락으로 돌아갔다.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 다시 성당의 벽으로 뛰어오른다. 튀어나온 돌 장식들은 훌륭한 지지대가 되었다. 알타이르는 달랑 검은 장갑 하나만 낀 채 성당의 벽을 기어올랐다. 2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부주의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신자들이 이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알타이르가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2층은 복도식이었고 한쪽으로는 1층의 본당이 내려다 보였다. 미리 안내받은대로 복도를 쭉 걸어 뒤에 연결된 사제관으로 향하던 알타이르는 본당에서 일렁거리는 촛불을 보았다. 신부복을 입은 남자가 제대에 촛불을 켜고 있었다. 알타이르는 기둥 뒤에 숨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표적임에는 틀림없었다. 남자는 10분이상 달리기엔 힘들어보이는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도 없는 성당에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 밤과 새벽의 경계에는 틀림없이 자고 있을테고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것이라는 의뢰인의 예상과는 달랐다. 제대 앞 벽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피곤한 얼굴로 신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뿌옇게 예수의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달빛 덕분에 신부는 불을 켜지 않고 있었고 알타이르가 숨을 수 있는 어둠이 도처에 있었다. 신부는 제단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알타이르는 2층의 난간 위에 매달렸다가 기둥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켜지 않은 등을 붙잡고 바닥에 착지했을 때에도 신부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요란해서 육중한 몸을 양옆으로 조금씩 흔들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매우 중요한 기도겠지. 알타이르는 어둠에 잠긴 회랑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한걸음씩 다가가자 그 목소리가 조금씩 명확해졌다. 악마와 거래한 저의 죄는 돌보지 마시옵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어린양들을 돌봐주소서. 길잃은 양들의 안식처를 지켜주시옵고 그늘이 되어줄 성소를 지켜주시옵소서. 이 죄 많은 몸은 죄를 안고 연옥의 뜨거운 불에 몸을 던지겠사오니. 늙고 살찐 신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알타이르는 그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단검은 이미 단단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 신부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예수가 알타이르와 신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타이르는 천천히 다가가 몸을 흔들고 있는 신부의 목을 그었다. 거대한 몸은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울컥 솟는 피에 잠겨 꺽꺽거렸다. 신부가 어찌나 열성적으로 기도했는지 그의 이마는 땀으로 축축했는데 그마저도 솟구치는 피때문에 가려졌다. 신부는 죽기 전에 황망한 눈으로 알타이르를 쳐다봤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고 왜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는지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입술만큼은 달싹거렸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알타이르는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검은 옷에 피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신부의 신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을까. 알타이르는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희뿌옇게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났다. 알타이르는 번지는 피를 피해 뒤로 물러서면서 예수를 돌려다보고 중얼거렸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말릭은 자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바닥에 소용돌이쳐 내려가는 핏물을 쳐다보다가 알타이르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나왔다. 말릭의 침대 옆에 주저 앉아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왼팔이 있었던 자리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불은 푹 꺼져버린다. 알타이르는 아주 오래 전에, 알타이르가 단서를 남기는 바람에 찾아온 갱단의 폭력배들에게 칼을 휘두르던 말릭의 왼팔을 떠올렸다. 알타이르는 반시체나 다름없이 병상에 누워있던 날이었다. 말릭에게서는 진한 피냄새가 났고 비몽사몽간에 알타이르는 그가 누굴 죽인건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말릭이 죽인 것은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의 모든 커리어를 왼팔과 함께 잘라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말릭은 깨지도 않았다. 알타이르는 사탕을 꺼내 말릭의 입안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옆자리를 파고들며 말릭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년 뒤에 말릭이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성당 없어지고 노숙자 보호센터 짓는다더라. 알타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릭의 차 바퀴를 새로 달아주었다.
4(+에지오 아우디토레)
에지오 아우디토레라는 놈이 있다. 말릭이 차고에 의자를 놓고 앉아 세븐업을 마시고 있을 때 지나가다 말고 불쑥 차고로 고개를 들이밀며 '저도 한캔만 주세요!'라고 말을 붙이는 사람이다. 알타이르가 돌아올때쯤이면 말릭은 집안으로 들어가버리고 혼자 차고를 차지하고 앉아 있기도 했다. 자주 보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잊어버리지 않을만큼은 마주친다. 사실 안 마주치는 것도 힘들다. 에지오 아우디토레라는 이 변죽좋은 이탈리아인은 손에 잡히는 일은 뭐든지 했다. 12번가 주택에 페인트 칠도 했고 세차장에서 차도 닦고 피자 배달도 했었다. 어느 날은 유리창도 닦고 있고 또 어느 날은 은행강도들의 도주용 차를 운전해 주고 돌아오기도 했다. 열심히 벌어야죠. 누가 왜그렇게 일하냐고 물으면 에지오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고 손을 내저었다.
대부분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이 동네에서 그는 제법 출신이 뚜렷한 의외의 인물이었는데, 꽤 유서깊은 가문에 부잣집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대부분은 그가 탈선으로 신세를 망쳐서 돌아다니는 망나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반만 맞았다. 그의 신세는 남이 망쳤다. 하루아침에 집안 식구들이 강도를 당해 죽었고 거기에 죽은 아버지에겐 횡령이라는 죄목까지 걸렸다. 근데 사실 망나니는 맞거든요, 그땐 그랬죠. 이런 이야기를 에지오는 알타이르와 말릭에게 너무 쉽게 털어 놓았다. 알타이르와 말릭은 손바닥 두개를 합친 것만큼 좁은 정원에서 벌어진 바베큐파티에 갔다가 에지오를 만났는데, 에지오는 만나자마자 그 둘을 붙잡고 그런 이야기를 줄줄 한 것이다. 말릭이 침착하게 물었다. 근데 왜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를? 에지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참이라 그걸 다 삼킬때까지 답을 못하니 답답해졌는지 손가락을 세우며 발을 굴렸다. 알타이르는 슬슬 다른 쪽으로 가고 싶다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에지오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사람 죽이는 걸 배워야하거든요. 그리고는 잠시 멍청한 얼굴을 했다. 혹시 수강료는 현금으로 받으세요?
미친놈이었지? 아무래도? 알타이르와 말릭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한 마디를 하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 이탈리아인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정말 수강료라도 모을 참인지 있는 힘껏 일하면서. 그렇게 지낸지가 4년이 넘어간다. 돈을 많이 모아서 작은 액수로 일수까지 시작한 에지오 아우디토레는 여전히 차를 닦는다. 형님 이거 차 고물이라 안 굴러가는데 왜 고쳐요? 말릭의 집 차고에 놀러와서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알타이르가 그를 걷어차는데 피할 재주도 없어서 얻어맞으면서 볼 멘 얼굴로 '틀린 말도 아닌데.' 중얼거리고 금방 또 히죽웃는다. 사람 죽이는 일 빼고는 다 하는 에지오에게 왜 사람은 안 죽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아버지께서 점지해주고 가셨어요, 내가 죽일 사람들은. 그리고는 Toxic을 흥얼거리며 멀어져 갔다.
5
알타이르는 말릭의 몸을 본다. 이상한 일이지만 눈을 감아도 그 몸이 보인다. 말릭은 알타이르에게 집착이 문제라고 늘 말해왔다. 그게 네 눈을 가리고 널 망칠거란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알타이르야. 하지만 무언가를 갈망하지 않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타이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알타이르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눈이 마주치는 순간, 행성들이 일렬로 늘어서는 그 위대한 순간처럼 찰나가 아닌 영원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붙잡으려는 것 뿐이다. 말릭은 반쯤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습관적으로 알타이르를 구박했다. 그냥 구박할 핑계가 필요한 거라고, 알타이르는 이해했으며 그래서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어둠속에서 말릭의 등이 둥글게 말려서 양말을 신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까무잡잡한 등에 손을 펼쳐 눌러본다. 척추뼈에는 굴곡이 지고 말릭은 가볍게 손을 털어내고 방을 나간다. 집착은 병이야, 알타이르. 알타이르는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었다. 아직은 깨고 싶지 않았다.
6
말릭의 집은 1층짜리 단독주택이다. 1층이지만 지붕과 천장 사이엔 다락방도 있다. 차고도 하나 딸려 있으니 이 동네에선 퍽 훌륭한 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말릭의 아버지가 살던 집에 이제는 말릭이 산다. 말릭의 아버지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위해 집을 갈고 닦았지만 말릭은 도무지 누굴 위해 집을 고쳐 쓸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대부분은 불청객인 알타이르가 스스로 집을 고쳤다. 포치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처마의 물받이통을 수리하고 있는 알타이르를 구경하면서, 말릭은 대체 저 놈이 언제쯤 집에서 나갈지 궁금해 한다. 말릭은 팔을 잃었고 대신 군식구가 생겼다. 비가 더럽게 많이 오고 폭풍이 몰려온다고 기상캐스터가 호들갑을 떠는 날이었다. 퇴원하면서 잔뜩 받은 진통제를 한움큼 삼키고 몽롱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데 벨이 울렸다. 아마 환청일걸. 진통제를 얼만큼 먹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번째는 좀더 뚜렷했고 집요했다. 말릭은 휘적휘적 마치 팔 두개를 흔드는 것처럼 걸어갔다. 현관문 밖에는 후드를 쓴 남자가 저승사차처럼 서 있었다. 나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는데. 말릭은 아직 방충망을 열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그늘에도 숨고 방충망의 잘게 쪼갠 그물 사이로도 숨어서 도무지 알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남자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겨우 말릭은, 말랑해진 머릿속에서 그가 알타이르라는 것, 불과 며칠전에 몸에서 총알을 빼내고 봉합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긴 병원도 아닌데 환자가 둘이나 되는군. 말릭이 방충망을 열었다. 남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초대받지 않은 뱀파이어는 문턱을 못 넘지. 그게 생각나서 말릭은 크게 '들어와'라고 말했다. 그래도 남자는 서 있었고 말릭은 몽롱한 머릿속에 설마 지금 울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잊어버렸다. 남자는 결국 밤새 밖에 서 있었고 아침에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말릭은 쓰러진 남자를 한팔로 끌고 들어오는데 1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알타이르가 말릭의 집으로 들어갔다.
7
에지오는 술병 사이로 엎드렸다. 난 이제 집에 갈거야. 알타이르가 그 검은 뒷통수를 보며 말했더니 테이블에서 정체불명의 짐승소리가 났다. 징도우어으어서. 알타이르는 용케 덧붙였다. 말릭의 집으로 갈거야. 에지오는 내내 처박고 있던 고갤 들었다. 아니 나 진짜 잘못이 없다니까요.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 잘못 아니냐고요. 나는 그저 그 아름다운에 눈이 먼 것 뿐인데. 왼쪽 눈두덩이에 시퍼렇게 멍이든 에지오가 우물거리면서 턱을 괴었다. 알타이르는 팔짱을 낀 채 에지오를 쳐다보았다. 대충 묶어서 흐트러진 검은 머리가 쏟아지는데 그렇게 보면 멍도 일부러 그린 것같이 잘 어울렸다. 발정이 났다고 밖에는. 알타이르가 억양도 없이 그렇게 읊조렸을 때 에지오는 굉장한 모욕이라는 듯 테이블을 쾅 치며 일어났으나 곧 바닥에 떨어진 포크를 주우며 도로 앉았다. 발정은 아니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사근하게 대답한다. 원래 아름다운 걸 지나치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요. 그 아름다움이 그녀의 창문을 열고 나를 그 방안으로 이끌었고- 알타이르는 말을 잘랐다. 무단침입으로 유치장에서 나온지 세시간도 안 됐잖아. 에지오는 또 억울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밀어 올렸으나 취한 와중에서 슬슬 상대가 알타이르고, 그러니까 투정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에지오가 푸념을 하면서 또 몸이 기울어진다. 차라리 결혼을 하지 그래. 그 말을 듣더니 에지오는 고개를 또 번쩍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뇨, 난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거든요. 그럼 하면 되지. 이 세상에는 없고요. 에지오는 목을 그어 보였다. 다음 생을 노려야지.
역시 이 새낀 또라이야. 알타이르는 그걸 입 밖으로 소리내서 말했다. 에지오는 몹시 즐거워하면서 '그래봤자 형님은 집도 없잖아요.'라고 또 다시 알타이르를 물어 뜯었다. 영원히 거기에 살 거에요? 에지오의 몸이 기운다. 기운다. 둘이 사실은 사귀는 거지? 에지오는 확신에 차서, 그러나 낮게 소근거리면서 침잠한다. 실제로는 술집 바닥에 나가 떨어진 것이다. 알타이르는 한숨을 쉬면서 석상처럼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일어나 에지오를 일으킨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주정을 부리는 그를 그의 집 마당에 버려두고 돌아오면서 알타이르는 후드가 달린 가죽재킷을 털었다. 이탈리아 또라이가 우리가 사귀는 거냐고 물었어. 말릭은 안경을 쓴 채 잠들어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자꾸 밤에 알타이르는 돌아다니고 말릭은 잔다. 시간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말릭 나는. 알타이르는 버릇처럼 말릭의 발치, 침대가를 서성이다가 가만히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8
이탈리아 바보가 우리가 사귀는거냐고 물었어. 알타이르는 오늘 아침 벌써 세번 째 이 말을 되풀이한다. 알타이르의 많은 단점 중 하나는 상대가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개의치않고 하고싶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수가 적은 편이니 평소 크게 문제될 건 없었지만 집중하고 싶은 게 생기면 다르다. 말릭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렇다고. 그래. 그걸로 대화는 끝이어야하지만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진 걸 보면 곧 다시 같은 말을 할 거다. 결국 말릭은 보고 있던 장부를 덮었다. 알타이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알타이르는 말릭옆에 놓인 컵을 보고 있었다. 그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 것은 매우 드문일이었다. 그는 원래 돌맹이나 70대 노인이나 똑같이 무기질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알타이르는 컵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손잡이 근처를 빙빙 돈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 말릭은 이마를 문지른다. 나는 사회부적응자의 보모가 되기엔 나이도 많고 불친절해. 팔도 하나 없잖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말릭은 의자에 기대앉아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선 알타이르를 올려다본다. 모르긴 왜 몰라. 우리가 사귀는 사이냐? 알타이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5초쯤 생각에 잠겨있다 곧 '아니'라고 대답했다. 잘됐네, 가서 아우디토레한테 말해주고 대가로 코뼈를 새로 맞춰주고 와! 말릭은 다시 장부를 펴기 위해 가죽으로 양장된 표지를 쓰다듬었다. 알타이르의 목소리가 단도처럼 명확하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섹스는 하잖아. 말릭 주변에 던질 만한 것이 컵 뿐이었기 때문에 말릭은 컵을 집어던졌고 알타이르가 서있던 자리에 부딪히며 컵은 산산조각났다. 집에 있던 유일한 컵을 영영 잃게되었다.
말릭은 역시 그때 일이 잘못 된거라고 생각한다. 시작을 말았어야했는데, 이 불청객의 농간에 넘어갔으면 안 되는데. 알타이르도 말릭도 환자인 채로 회복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알타이르는 벌어놓은 돈을 모두 말릭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집에 눌러앉았다. 그는 구석마다 돌아다니며 그림자 속에 서있었다. 말릭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라고 한마디씩 하긴 했다. 그럴때마다 알타이르는 유령처럼 굴었다. 말릭이 미친사람이 된 것같은 기분을 느끼도록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알타이르는 거실소파에 누웠다. 그는 소파에 앉거나 창문앞에 서있거나 아주 역사가 깊은 전등 아래에 서있었다. 침실문을 닫아 놨지만 말릭은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정말 유령이라도 되려나 보지.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말릭은 언제나 문을 노려보면사 선잠을 잤다. 같은 조직의 동료로서는 최악의 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문 밖에 있다. 밤이면 말릭은 증오와 싸웠다. 그건 알타이르의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누군가 팔을 잃어야한다면 그 자신이었어야지. 그런 마음들이 촛불처럼 일렁거리다 일시에 훅꺼지기도했다.
그날은 비가 왔다. 말릭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또 알타이르가 거실을 돌아다닌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서를 구하려고 온 것도 아냐. 어쩌면 그냥 날 죽이려고 온 것일지도 모르지. 말릭은 눈이 쑤셨고 그를 발로 걷어차버리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어나 방문을 열었을 때 알타이르는 문바로 앞에 있었다. 마치 초대된 손님처럼. 어둠 속에서 빗물이 떨어지듯 빛이 이동했다. 말릭은 알타이르에게 물었다. 왜 잠을 안자고 돌아다녀. 알타이르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죽고싶을 정도로 외로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음 순간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알타이르가 말릭을 밀었는지 아니면 말릭이 알타이르를 잡아당겼는지 모호했다. 둘은 침대 위로 넘어졌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알타이르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서로의 옷을 벗기면서 피부 위로 손이 스칠때마다 낯설어하면서도 온기에 더 달아올랐다. 알타이르는 늘 하던대로 침대에서도 무자비했는데 너무도 쉽게 말릭의 페니스를 입에 물면서 말릭과 눈을 맞추는 바람에 말릭은 펄쩍뛰며 그 머리통을 손으로 꽉 쥐어뜯었다. 그러나 알타이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간사할 정도로 끈질기게 말릭의 뿌리부터 첨단까지 샅샅이 물어 훑어 발기시켰다. 말릭이 등을 구부리면서 다리를 오므리자 알타이르는 그대로 그 몸을 뒤집고는 그의 등을 내리눌렀다. 말릭의 시야에는 구겨진 이불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희가 서툴고 제멋대로긴 했지만 알타이르 나름에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콘돔도 찾아왔고 말릭의 뒤를 풀어준다고 손가락부터 넣었다. 물론 말릭이 안되겠으니까 때려치라고 말하는 것은 무시당했다. 알타이르는 말릭의 귀에 대고 대뜸 '넣는다'라고 통보했을 뿐이었다. 말릭은 그 순간부터 알타이르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굳게 믿게되었다. 잘 들어가지도 않았고 정말 죽도록 아파서 이번에는 허리 아래가 잘려나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알타이르가 앓듯이 흘리는 침음성이 빗소리에 섞여들렸다. 알타이르는 말릭의 허리를 들어올렸고 말릭은 한팔로나마 균형을 맞추기 위해 버둥거렸다. 조금 참아봐. 뭐?라고 되묻기 전에 허리를 단단히 잡은 알타이르는 자신의 성기를 끝까지 밀어넣었고 말릭은 자기 혀끝을 조금 깨물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한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한번씩 알타이르와 말릭은 섹스를 했다. 자주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둘의 김장기복이 바닥를 칠 때면 몸을 섞었다. 아주 일차원적인 행위였다. 처음보다는 두번째가, 두번보다는 세번째가 덜 고통스러웠고 차츰 몸과 몸이 맞물려서 조금씩 쾌락에 가까워졌다. 다만 말릭은 쾌락에 겨운 소리를 내느니 자기 혀 끝을 씹는 사람이어서 알타이르는 그를 안을때마다 자신의 팔을 물렸다. 아침이면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몇 번 더하면 너처럼 되겠다는 말을 해서 꼭 걷어차였다
결국 알타이르는 침실로 들어와 자게 되었다.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지만 알타이르는 잠이 들었다. 말릭은 그에게 죽고 싶을 정도로 외로운 것이 무슨의미냐고 묻지 않았으나 막연히 그의 실패와 추락이 연관있겠거니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컵 잔해를 치운 건 알타이르였다. 가만히 빗질을 해서 조각을 치우는 사이 말릭은 장부 확인을 끝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알타이르를 구경했다. 우린 사귀지 않아. 말릭의 말은 매우 단정적이었고 알타이르는 수긍했다. 다만 그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사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말릭은 알타이르를 쳐다봤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너무나 냉정하지만 너무나 아무것도 모르는 킬러는 그렇게 순박한 생각을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말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입었다. 그렇게 되려면 뭐가 필요한지 깨달았거든. 말릭은 야상의 빈 소매를 들어보인다. 내 왼팔 말이야. 그리고 그는 나가버렸다. 알타이르는 말릭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면서 생각하다가 또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의 말에 수긍해버린다. 이미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며칠 뒤 입을 오리주둥이만큼 내민 에지오가 박스를 하나 주고 갔다. 컵이 들어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세트였다. 나때문에 컵이 깨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하잖아요, 알타이르가. 안사다주면 진짜 죽일거라는데 진심인것같거든요. 이거 내가사왔다고 꼭 말해요. 에치오가 허둥지둥 떠나고 말릭은 컵을 찬장에 두었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말릭는 하얀 컵을 찬장에서 내려서 조그만 뒷마당으로 나가 담너머로 집어던졌다. 파열음을 듣고 그는 천천히, 무대에 미련이 남은 배우처럼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말릭의 집에는 컵이 하나뿐이고 알타이르는 어딜 가든 그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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