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다
(주단님 리퀘)
어떤 것은 영원하다. 빌은 그렇게 믿었다. 다만 대상의 문제인 것이다. 문학서적들이 영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이에 인문학 서적이 영원한 것은 없다고 침을 뱉었으니 절대적인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러니 믿고 싶은대로 믿으라. 그것이 지난하고도 치열한 붉은 벽돌의 시절에서 빌 헤이든이 얻어낸 진리이자 유산이었다.
너는 너 밖에 없잖아. 그래서 짐이 그렇게 말했을 때 빌은 새삼 칼에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칼은 아주 예리하게 5번째 갈비뼈와 6번째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정확하게 폐까지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그 구멍 위로 짐이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너 밖에 없잖아. 빌은 세상에 태어나 탯줄을 끊어낸 이후로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정확하게 진단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짐 프리도의 대단한 점은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도, 칼로 쑤셔서 상대를 벗겨낼 의도가 없는 채로도 정확하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이 빌은 몹시 좋았기 때문에, 크게 웃으면서 짐의 어깨 위로 팔을 걸었던 것이다. 짐은 그렇게나 대범한 진단을 내리고도 겸손했고 필요이상으로 수줍어했다. 세상은 혁명가가 너무 많아. 빌은 짐에게 고백이나 하듯 대단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고 짐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반문했다. 너는 아닌 것 처럼 이야기하네? 빌은 조용히 하라고 낮게 쉿쉿 거렸다.
짐 프리도를 헝가리로 떠나 보낼 때 빌은 담배를 태웠다. 신사들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면 으레 하는 행동들을 하나하나 하는 중이었다.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그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한다. 홍차에 브랜디를 넣어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 그러나 찻잔에는 점점 홍차가 줄고 브랜디가 가득했다. 나는 위선자야. 찻잔에 브랜디를 넣어 홀짝거리며 빌은 그 작은 표면에 부분적으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봤다. 나는 매국노, 배신자, 첫 닭이 뜨기 전에 예수를 부정할 베드로다. 그러나 무엇도 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다. 빌은 초조하게 클럽에서 시계를 봤다. 짐 프리도의 부고를 작성할 종이는 계속해서 손바닥 아래에 누워있었으나 종국에는 손에 땀이 차서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부고도 없이 짐 프리도는 죽었다. 먼 타국에서, 경계의 너머에서. 빌은 어쩌면 직접 가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짐을 과거로 떠나보내면서 벽돌을 만지작거리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유령이 서커스에 나타났을 때 빌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팔에 깁스를 하고 다리를 살짝 저는 짐 프리도의 유령이 천천히 서커스를 배회했다. 푹 꺼진 눈 위로 진 음울한 음영은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나를 찾겠지. 빌은 뒷걸음질 친다. 누구도 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부고란이 비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짐이 다리를 끌며 피터 길럼에게 몸을 돌리는 사이 빌은 서커스로부터 도망치듯 나온다. 도망치듯. 도망치듯이 빌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령은 금새 머리에 붙어 버렸다. 빌은 유령에게 '너는 기억인가? 아니면 미련?'이냐고 물었지만 유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짐 프리도가 다시 사라질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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