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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미임파 이단브란 /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9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9

(센티넬버스 AU)



"임무를 맡았다고?"


루터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냥 놀 수는 없지. 이단은 고갤 끄덕거렸다. 그 말에 루터가 대놓고 큰 웃음을 터뜨리면서 빈정거렸다. 놀아? 정말 태어나서 한번 놀아본 적이라도 있긴 해? 이단은 풀이 죽어보였으나 루터의 말이 사실이었다. 일찌감치 센티넬로서 각성한 뒤에는 엄격한 생활을 해야했고 IMF에 들어온 이후로 이단의 삶은 언제나 임무 중 아니면 대기 중이었다. 줄리아는 늘 말했다. 너무 잘난 남자를 만난게 내 죄지. 루터는 이단의 삶을 잘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센티넬학교 시절에 만난 루터는 신체능력 등급이 높지는 않았으나 해킹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이단이 현장에서 입지를 다지는 동안 루터는 컴퓨터 너머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일찌감치 IMF를 그만두고 나가버렸고 평생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지금의 부인을 애지중지 모시고 사는 것이 하루 일과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임무는 무리지. 사실 이건 다 테스트일 뿐이야.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굳이 그들이 요구하는 걸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루터가 느긋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이단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일을 강제로 떠맡을 필요는 없다. 이단 헌트쯤 되는 위치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모든 것에 우수했던 '이단 헌트'는 더 이상 우수하지 않다. 이단은 뒤집어져 있던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그것이 현재 이단의 위치를 정확히 말해주는 풍경이었다. 그동안 좋은 성과를 냈던 요원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으로 기회를 줬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빨리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결국 그렇게 버려질 것이다. 혼자였다면 차라리 그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자신과 함께 '묶여버린' 남자가 있다는 것이 항상 이단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홀몸이 아니어서."


루터가 의뭉스럽다는 얼굴로 눈을 치켜떴지만 이단은 그저 웃어보이고 말을 아꼈다. 부탁한 건 찾아봤어? 이단이 테이블을 두드리자 루터가 고개를 저으며 USB를 넘겼다. 


"민간인 사찰이 불법인 건 알지? 특히 나같은 백수한테는 말야."

"넌 절대 들키지 않잖아."

"물론 들키지 않았지만 말야, 다른 놈이었다면 바로 철창신세라구."

"술 살게."

"엄청나게 많이 사야 할거야, 이단."


너한테도 한 만년쯤 사면 될까? 이단의 말에 루터는 잠시 벙찐 얼굴을 했다. 뭐라고? 이단이 손을 저었다. 지옥에서 가장 비싼 술을 만년쯤 사겠다고 대답해도 그에게 통할 농담은 아니다. 집에서 나오기 전 확인했을 때 브란트는 잠들어 있었다. 이단의 집에서 쓰러진 뒤에 여러 번 불려다닌 탓에 그는 이번주 내내 눈 아래가 푹 꺼져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잠든 덕분에 강제로 재울 필요는 없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그는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쉬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브란트는 어이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은 다음에 아무것도 못 들은것처럼 행동했다. 브란트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전체적인 데이터는 이상이 없어. 줄리아의 출근 기록 같은 것 말야. 지극히 평범해. 이미 한번 들여다보지 않았어?"

"보고서로만."


그리고 네가 자료를 찾아본게 아니니까. 이단이 USB를 챙겨 일어났다. 뭐야, 벌써 가는거야? 아직 두 병 밖에 안 마셨는데? 루터가 술병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일이 해결되면 코가 땅에 붙도록 사줄게. 이단이 지폐를 꺼내자 루터가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결국 그도 일어났다. 펍을 나서면서 둘은 간단히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빨리 해결해, 이단. 루터는 계속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오래 살고 싶으면 말야. 이단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후드를 뒤집어 썼다. 밤거리에 뛰어들면서, 문득 이단은 이 방향이 맞는지 두려워졌다. 거리는 하염없이 어둡고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단이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주머니 안의 USB뿐이었다. 그는 어지럼증을 머리의 구석으로 몰아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편이 나았다.




불이 꺼진 집안은 조용했다. 새벽의 어스름이 주황색 가로등 불빛과 뒤섞은 거실은 요란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적막했다. 이단은 적막에 떠밀린 채 조용히 걸어다녔다. 자켓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고 브란트의 노트북을 펼쳐 놓는 동안에도 닫힌 침실 문 안쪽은 조용했다. 달려온 다리는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그럼에도 이단은 여전히 가벼운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단은 여러번 거실을 빙빙 돌며 고민하다가 결국 브란트의 침실 앞에 섰다. 노크를 할까.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단은 작은 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반응은 없었다. 새벽 세시였다. 답이 있는 것이 훨씬 이상한 시간이지. 차라리 답이 없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단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창문이 열려 있어서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방에는 블라인드가 아니라 커튼이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가 침실에 커튼을 달아 놓은 광경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다. 브란트는 이사 올 때부터 달려 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특이한 광경이었다. 커튼이 흔들리고 그 옆의 침대에 브란트가 자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시체처럼 잠든 모습을 보고 이단은 방의 가장자리를 돌아 천천히 침대쪽으로 다가갔다. 브란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단은 침대에 앉을까 하다가 결국 침대 옆 바닥에 주저 앉았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손 끝부터 저미듯이 다가오는 무기력증과 두통은 가이드가 없기 때문이란 것을 이단은 직접 유전자에 새겨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순간이 오기 전에 브란트의 손은 이단에게 닿아 있었다. 가이드는 그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부족한 것은 센티넬이기 때문에 그는 도무지 이단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음에도 브란트는 귀신같이 알고 손을 뻗어왔다. 잠시 손목을 맞잡거나 뺨이 찬 손이라도 닿으면 물로 더러움을 씻어내듯 곧 상태가 나아졌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불안정하지는 않았는데. 이단이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브란트는 너무도 명료하게 '가이드가 시원찮은 짝퉁이라 그런가봐.'라는 말을 했다. 브란트의 말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것 역시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단 헌트는 그 말이 너무나 신경쓰여서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브란트, 손을 좀 잡아도 될까?"


이단이 침대 밑에서 조용히 읊는 말에 브란트는 답이 없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을까? 행복한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의 인생에서 이단 헌트라는 굴러온 돌이 없는 시절에 자유롭게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꿈 말이다. 이단은 침대에 반쯤 기댄 채 손을 뻗었다. 브란트의 손목을 쥐고 침대에 머릴 기대고 있으니 어둠 속에 비스듬히 브란트 얼굴의 반이 보였다. 두통이 물러나길 기다리면서 이단은 브란트의 가려진 얼굴을 지켜봤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제대로 보는 일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공과 사 구분이 몹시 뛰어나서 절대 속내를 표정에 표현하지 않는 브란트는 지금은 다른 의미로 무표정했다. 뺨은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러웠고 콧등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때로 그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이단은 브란트의 손목을 쥔 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문득 눈을 뜬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침대에 기댄 두 시선이 비스듬히 만났다.


"여기서 뭐해?"


브란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다른 손이 감겨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이 안 와?"


잠깐 깼어. 이단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브란트는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알아 들었다. 그는 또 차가운 거리의 냄새를 맡았다. 먼지와 술 냄새가 이단에게서 났다. 이단이 밖에 나갔다 온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가 혼자 밖으로 나갔다가 폭주할 경우 책임 져야할 사람은 당장 브란트가 될 것이다. 그래서 브란트는 늘 최선을 다했다. 


"손을 잡을래?"


브란트가 손을 펼쳤다. 이단은 조금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브란트와 손을 잡았다. 손바닥은 따뜻했다. 창문이 열려 있는데도, 커튼이 너울거리는데도. 브란트의 눈이 어둠속에서 감겼다가 도로 나타났다.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자, 브란트. 깨우려는 것은 아니었어."

"나갔다 왔지."

"어."

"잠이 안와서?"


이단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줄리아를 찾기 위해서. 브란트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대로 잠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시 말했다.


"잘했어."


브란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침묵했다. 이단은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잃는 광경을 쳐다봤다. 브란트는 자신의 할 일을 충실히 한 뒤 돌아갔다. 이단이 폭주하지 않도록 막는 것. 그게 브란트가 할 일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이단은 침대에 기대 브란트의 감긴 눈과 잡은 손을 번갈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손에서 줄리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