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10
센티넬버스 AU
"언제 받았다고?"
"어제."
브란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신감이 센티넬이라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단 헌트 본인 성격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둘 다겠지. 어느 쪽이든 좀 재수없지 않나. 이단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게산할 순서를 기다리는 마트 손님처럼. 그가 브란트 앞에 꺼내놓은 것은 검은 아이폰이었고 그런 물건을 수없이 남에게 보내봤던 브란트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브란트가 반복되는 검사를 받을 동안 이단은 국장에게 새 임무를 받아왔다. 그걸 이제야 꺼내놓다니. 브란트는 욕을 하려다 이단이 이주 내내 '넌 좀 쉬어야돼.'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딴에는 반나절 정도 쉬게 해주려고 감춰둔 것일 것이다. 실제로 어제는 도무지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뻗어버리지 않았던가.
"무슨 임무인지도 모르면서 이걸 이제 꺼내놓다니 제정신이야?"
그러나 역시 욕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지금 태평하게 휴식이니 뭐니 논할 때인가. 제정신이 아니니까 우리가 같이 있는거 아니었어? 며칠 사이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이단은 그렇게 말했고 브란트는 할 말이 없어졌다. 현실을 방패세우는 것은 비겁하다. 그러나 똑똑한 일이기도 했다. 이단 헌트는 정말로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모든 것에 핑계가 생겨버렸다.
"할 수 있겠어?"
"해내야지."
"혼자 날아다니던 시절이 아닌 건 알고 있지?"
"걱정마."
"원래 그래, 아니면 이 센티넬-가이드 어쩌구의 영향탓으로 이상해져서 그렇게 자신감 과잉이 된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래 그래."
이미 끝난 대화였다. 센티넬에게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없는 한 이 대화는 더 이상의 진척이 없을 것이다. 브란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침식사를 했다. IMF가 자랑하는 최고의 요원이 차린 아침식사는 탄도미사일이라도 얻어맞은 교회처럼 엉망이었다. 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탄수화물들은 까맣게 잘 구워져 탄소처럼 딱딱했고 계란은 너무 익은데다 또 너무 잘게 조각나서 스푼으로 떠먹어야 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빵의 검은 시체들까지도 전부, 몹시 짰다. 이런 것을 아침식사랍시고 내놓고 어쩜 얼굴을 들고 앉아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요리 잘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너무 오랜만에 하니까 예전같지 않군."
"그 예전이 언젠데?"
"한..."
이단이 미간을 살짝 모으면서 허공을 봤다. 언제 요리했는지 생각도 안 날정도로 오래됐으면 그냥 요리 안해봤다고 말하는게 정상이지 않을까. 브란트는 숟가락으로 계란을 긁어 최대한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짜. 그가 그렇게 말하자 이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간을 안 봤더니."
"간도 안 볼 거면 음식은 왜 만드는데."
"내가 안 먹는다고 너까지 안 먹을 순 없잖아."
그리고 집을 쓸 거면 방값을 해야지. 이단이 손바닥을 펼치며 접시를 가리켰다. 원래 이거보단 좀더 잘 해. 자신감만 넘치는게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하다. 나같으면 이런 요리를 만들면 누가 보기 전에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렸을 것 같은데. 브란트는 가장 맛이 좋은-정상적인-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짠맛을 헹구어 보려고 노력했다.
"줄리아가 날씬하고 아름다웠던 이유를 알겠군. 음식 자주 해준거 아냐?"
입 밖으로 뱉어놓고 브란트는 새삼 줄리아라는 이름을 너무 쉽게 입 밖으로 낸 건 아닌지 덜컥 신경이 쓰였다. 일하는 중이라면 상관이 없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하고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지 파악해야 하므로 줄리아 앤 미드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미묘하지 않은가. 지금 막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로 줄리아의 이름을 테이블 위로 꺼내놓은 것이다. 이건 친구 사이에서나 물을 안부나 농담같은 거잖아. 시한폭탄처럼 이어져 있는 사이에선 할 말이 아닌 것 아닌가. 브란트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단은 큰 소리를 내며 한번 웃었다. 그녀는 타고 난거야, 내잘못이 아니라고. 브란트는 그 말을 받아서 '계란 요리를 너무 많이 해줬다든가.'하고 말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고 이단의 말 어미에는 묘한 침묵이 늘어져 버렸다. 이건 더 나쁜데. 브란트는 커피를 소리내서 마셨다. 이단은 아직 웃음기가 조금 남은 얼굴로 입을 닫고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다 시야에 들어오는게 블라인드 뿐이라 시선 돌리기에 실패한 브란트는 결국 컵을 내려 놓고 직진을 택했다. 언제까지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머뭇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계를 짓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줄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어?"
"프로필 봤잖아."
"아니 물론 그녀의 직업이나 주소나 생김새 같은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아는 건 아니니까."
안다는 말이 두번이나 나오고, 그러니까 말이 자꾸 겉도는 것 같은데, 내 말은. 브란트는 하고 싶은 말을 찾으려 애를 쓰다가 그냥 헛숨만 삼키고 닫아 버렸다. 프로답지도 못했거니와 말실수를 하는 일이 극히 드문 사람인지라 당혹감이 더 컸다. 고맙게도, 어색한 순간의 허리를 뎅강 자르면서 이단이 '줄리아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길게 끌었다.
"그녀는 완벽하지."
이단은 곧장 덧붙였다. 나도 이게 어떻게 보일지는 잘 알아. 하지만 그 말 만큼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어. 브란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슬 이 아침식사 자체가 모두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렇게 마주 앉아 사담이나 떠들 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커플테라피를 해주기에 윌리엄 브란트라는 인간은 너무도 부적절했다. 이단이 또 웃었다. 이 사람은 왜 자꾸 웃지. 실험 부작용은 아닐까. 며칠 째 심각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던 사이에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도 편안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모습도 브란트는 너무도 낯설었다.
"처음 줄리아를 만났을 때부터 딱 느낌이 왔어. 아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가이드고 내 평생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그야말로 뇌리에 꽂혔지. 내가 방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으면서 첫 마디를 어떻게 건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줄리아가 어깨를 움츠리면서 '여기 너무 춥지 않나요? 온도를 좀 올릴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봤어.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온갖 로맨틱한 대답을 찾아 머릴 굴리던 19살짜리 센티넬이?"
"어, 음, 당신 덕분에 하나도 춥지 않아요?"
"'미안해요, IMF 건물은 중앙냉방이라서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네요.' 이렇게 대답했어. 중앙냉방이라서요. 젠장."
중앙냉방이라니, 미친거지. 이단이 키득거렸다. 브란트는 방어적으로 의자에 기대있다가 결국 실소를 흘렸다. 등록된 센티넬 중에 가장 능력이 강력하다는 센티넬이 가이드로 삼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는 첫 마디가 '중앙냉방'이라니. 어찌나 바보같은지 브란트는 접시 위의 토스트가 얼마나 까맣게 탔는지 망각하고 그걸 한 입 물기까지 했다. 혀에서 느껴지는 탄맛을 음미하며 브란트가 투덜거렸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데."
"전혀 로맨틱하지 않지. 줄리아도 그렇게 말했어. '지금에서야 하는 말인데, 이단,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진짜 엉망이었어.' 하고 물론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지만 결국 사랑에 빠졌군."
이단은 고갤 끄덕였다. 맞아, 그랬지. 훈련 밖에 모르던 센티넬이 사랑에 빠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단의 어리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오랜 세월동안 파트너로 함께 지냈다. 줄리아는 아름답고 강한 여자야. 심지가 굳세서 어떤 응급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지. 수혈팩이 부족하다든지, 응급실로 환자가 몰려온다든지 할 때도 큰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닐 수 있어. 동물을 좋아했는데 나도 줄리아도 집에 자주 붙어 있지 못해서 외로움을 모르는 동물을 키워야 했어, 금붕어 말이야. 이단은 이제 턱을 괴고 비스듬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잖아, 하고 일러줄까 했으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기억 속의 모습들이지 창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브란트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세계 최고 보안시스템을 뚫고 나쁜 놈들의 목을 꺾어버리고 돌아오는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 좋은 사람인 것 같네, 줄리아는."
브란트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프로필들이 말해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브란트는 그 말들을 이해했다. 이단은 거기에 브란트가 앉아 있었던 것을 잊고 있던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그래, 맞아. 그녀는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그 좋은 사람을 찾으려면 우리는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알아 들어, 미스터 헌트? 갑자기 다른 임무를 맡겠다고 수락해버리는 존나 잘못된 거라고."
이단은 고개를 저었고 브란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내 잘못이야. 성급했어. 이단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동안 브란트는 빠르게 식탁을 치웠다. 접시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이단은 문득 윌리엄 브란트라는 남자는 속에 남겨두고 미처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직선적이고 효율적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밑으로 삼켜두는 말이 모르긴 몰라도 한 다스는 될거라고 생각하며 이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무 개요는 언제 들을거야?"
"설거지 끝나고."
"그럼 좀 나갔다 와도 될까, 짐을 더 챙겨와야 할 것 같은데."
"그러든지."
브란트는 개수대에 그릇들을 밀어넣으며 생각했다. 경계짓기는 무슨. 나는 그들의 경계안으로 들어와 버렸는데.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브란트는 이게 속이 상한건지 아니면 '전략적인 관점에서' 일에 실패한 건지 구분지어보려고 애쓰며 세제거품을 잔뜩 만들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아는 얼굴이 이단을 반겼다. 펜을 입에 물고 있던 릴리가 반가운 얼굴을 하며 이단에게 손을 흔들었다. 병원 응급실은 어떤 항상성을 가지고 오늘도 언제나와 처럼 엉망이었다. 오랫동안 줄리아와 함께 일해왔던 릴리는 응급실 수간호사로 뼈가 굵었다. 몇번인가 줄리아와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근래에는 격조했었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이단을 반겨주었다. 혈액팩을 새로 주문하는 일을 급하게 마치면서 릴리가 이단의 손을 붙들었다.
"이단, 오랜만이에요. 이 아래까지 어쩐 일이에요, 잘 지내죠?"
"저야 한결같죠."
릴리는 쾌활하게 웃으며 이단의 팔을 마구 때렸다. 줄리아는요? 줄리아도 잘 지내죠? 이단은 잠시 그 물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멈칫했다. 릴리는 귀신같이 그 틈을 알아채고 금새 얼굴표정이 굳었다.
"왜요, 줄리아한테 무슨 일 있어요? 세상에 암은 아니라고 해줘요, 이단. 그건 아니죠?"
"아뇨, 아니에요."
"두 사람 다 너무했어요. 나는 둘 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매정하게 굴 줄 몰랐다니까. 하지만 줄리아가 저쪽 병동으로 가버렸고 당신은 매일 출장을 다니는 사람이니 어쩌겠어요, 늙은 간호사는 혼자 응급실을 지켜야지."
"병동이요?"
이단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는 IMF로부터 받은 자료를 훑고 있었다. 줄리아는 이 병원의 응급실에 배치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찍은 출근카드와 퇴근카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저쪽병동이라니. 게다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도 없었다.
"그래요, 작년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갔잖아요. 나참, 줄리아같은 여장부가 죽어가는 늙은이들 수액이나 챙겨주고 있으니 이건 손실이에요. 줄리아랑 같이 일할때가 제일 편했는데 요즘은 남자 의사들도 그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없다구요. 고급 인력을 데려가버리니 일하는 게 두 배는 힘들어요."
릴리는 넋두리를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이단을 쳐다봤다.
"무슨 문제 있어요, 이단? 안색이 안 좋아요."
"며칠 전에 식중독이 나서 휴가를 냈거든요. 거의 회복했어요. 줄리아를 깜짝 놀래켜주려고 왔는데 저도 줄리아가 병동 옮긴 걸 깜빡했네요. 요즘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저런, 괜찮아요? 음식을 조심해서 먹어야해요, 진짜로. 며칠 전에는 한달 된 스테이크를 주워먹고 배탈난 남자가 실려왔다니까요, 웩."
이단은 릴리에게 줄리아가 쓰던 책상을 좀 볼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줄리아가 전에 뭘 좀 놓고왔다던데. 릴리는 보여줄 수는 있지만 얼마전에 간호사실을 리모델링 하면서 청소팀이 와서 남아 있던 물건을 모두 가져갔노라고 말해줬다. 그치들이 제대로 전달을 안해준 모양이네요, 그렇죠? 그녀말대로 줄리아의 책상에는 남은게 없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줄리아가 무거운 책이랑 잡동사니들은 두고 갔는데 인사팀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직도 안 돌아오네요. 릴리가 투덜거리는 동안 이단은 책상을 잘 살폈지만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아마 청소팀이라는 것은 IMF 조사팀이었을 것이다. 출근 카드가 매일 찍혔으니 줄리아가 정상적으로 응급실에 출근했다고 믿었을 것이고 비밀리에 조사중이니 주변인 인터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런 리모델링도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을 테고. 건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간호사실을 나오면서 이단은 릴리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말을 건냈다. 다음에 줄리아랑 밖에서 봐요. 두 사람 다 잔소리들을 각오하고. 릴리는 잔소리를 뱉으면서 이단을 포옹했다. 물론이죠, 단단히 준비할게요. 잘 지내요, 릴리. 릴리는 이단을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단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이마를 문질렀다. 너무 많은 정보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응급실 담당이던 줄리아가 작년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줄리아는 여전히 응급실로 출근을 했다. 아니 남아 있는 것은 출퇴근 기록뿐이다. 사람들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발령이 났다고 믿었다면 응급실에 줄리아가 없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짐을 줄리아가 직접 챙겼다면. 이단은 두통을 느끼고 관자노리를 눌렀다. 아무리 기억 속을 헤집어도 그녀가 다른 병동으로 갔다고 말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 기억일까? 이단은 기억을 자신할 수 없었다. 줄리아에 대한 모든 것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만 과연 폭주상태에서 손실된 기억이 하나도 없을까? 확인하는 길은 하나 뿐이었다. 이단은 10층을 눌렀다. 옆 병동으로 연결되는 층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고요했다. 포레스트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은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했다. 시설과 서비스 면에서 최고를 자신한다는 광고문구만큼이나 복도에서부터 값비싼 마감재들로 가득했다. 이단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제재를 받았다. 보안요원에게 CIA 신분증 -이단은 IMF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은 본부 건물 밖으로 가져온 적이 없다-을 보여주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틀어진 클래식 음악이 복도에 울렸다. 긴 복도에 늘어선 병실에는 죽을 날을 앞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이런 곳은 줄리아와 어울리지 않았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뛰어들었을 줄리아지만 그녀는 좀더 전쟁터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복도 중앙에 있는 데스크에는 간호사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이단은 그녀에게도 신분증을 보여주고 물었다.
"이 곳에 줄리아 앤 미드라는 간호사가 발령받은 걸로 아는데요."
"죄송하지만 무슨 일때문에 그러시죠? 개인정보는 함부로..."
"실종사건입니다."
간호사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죄송하지만 적법한 영장이라도 들고 오시지 않으면 아무리 CIA라도 개인정보를 알려드릴 순 없어요. 제 권한 밖의 일이네요. 수간호사님께 여쭤볼게요. 그녀가 인터폰을 돌리는 사이 이단은 왼쪽에 마련된 휴게실을 쳐다봤다. 노인 몇몇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노인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단은 간호사가 정신없이 번호를 돌리고 있는 틈에 휴게실로 들어갔다. 창 밖을 보는 노인은 이가 없어서 볼이 홀쭉하게 꺼져 있었다. 그가 숨을 쉬게 해주는 대가만으로도 수십만달러가 필요할 듯한 노인이었다. 이단은 휠체어 옆에 무릎을 꿇고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노인이 우물거리며-그는 쉼없이 우물거렸다- 고개를 조금 이단에게 돌렸다.
"날 데리러 온거야?"
"죄송해요, 그렇진 않아요."
"황새치를 잡으러 가자. 여긴 너무 조용하고 지루해."
"알았어요, 다 나으시면요. 간호사들이 잘 대해주나요?"
"형편없어. 데보라, 그 망할 빨간머리의 손은 차가워서 고약해. 고약해. 하지만 로라는 착하지. 밥을 가져다주거든."
이단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에 줄리아의 사진을 띄웠다. 할아버지, 이 사진의 여자가 여기서 일하나요? 노인의 텅빈 눈이 창 밖으로 향했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단의 얼굴로 향했다. 나를 시험해보는거지? 치매가 왔는지 보려고 말이야. 노인은 갑자기 눈에 총기가 흘렀다. 그는 마른 손가락으로 이단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분명히 이 병동에 이런 여자는 없다고. 난 치매가 아냐."
데스크의 간호사, 데보라는 한참동안 범죄를 조사한다는 CIA 요원이 와있다는 말을 설명하고 난 뒤 그래도 제대로 된 서류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는 없다는 수간호사의 말을 듣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눈 앞의 남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대신 휴게실에 앉아있던 게빈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난 치매가 아냐!'하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의문의 CIA요원에 대한 이야기는 빠르게 잊혀졌다.
'연성 > 2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임파 이단브란 / 취급주의 (3) | 2015.09.25 |
---|---|
미임파 이단브란 / 개와 늑대의 시간 (0) | 2015.09.13 |
미임파 이단브란 / 칼과 방패 (2) | 2015.09.03 |
미임파 이단브란 /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9 (4) | 2015.09.01 |
미임파 이단브란 / 충고 (2) | 2015.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