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8
(센티넬버스 AU)
브란트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보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남자는 그를 흥미롭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이가 느껴지는 뺨이었다.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당장 이름을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저 이름을 알아. 잘 알고 있어. 눈을 세번쯤 깜빡거리자 얼굴은 좀더 명확해 졌다.
"박사님?"
샤를로 박사는 이제야 브란트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마주쳤다. 정신이 듭니까? 그렇게 물어보면서 그는 브란트의 눈을 잡아 벌리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확인했다. 그 손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정신이 덜 돌아온건지 얼굴이 얼얼했다.
"혈압, 맥박 모두 정상입니다."
"얼굴이 얼얼해요."
"쓰러지면서 계단에 얼굴을 부딪혔다더군요."
"제가요?"
샤를로 박사는 유치하게 '그럼 내가 부딪혔을까요?'라고 되묻지 않았다. 브란트 스스로도 실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에 기억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나열했다.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었지. 운전도 하고. 정리되지 않은 집에 들어갔었어. 화분도 깨져있고 부엌도 뒤집어져 있었고. 그래 이단 헌트의 집이었잖아. 그리고 금붕어가 죽어 있었지. 문득 브란트는 샤를로 박사를 붙잡고 초능력을 믿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센티넬은 정확하게 뭡니까?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죠? 당신은 이단 헌트가 '염력'을 쓴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러나 그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사실 대답은 무의미하다. 이미 브란트는 이단이 초능력을 쓴다는 것을 '봤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 설명해주지 않았죠? 라고 묻는 것은 이제와서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이단이 제대로 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브란트는 '폭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바로 뒷춤에 총이 있었고 손은 방아쇠까지 닿아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갔다면, 이단이 거기서 말이라도 잊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브란트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이단 헌트를 쏴버렸을 것이다. 초능력을 발휘하는 센티넬이 폭주했을 때 일어날 인명적, 경제적 피해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계산할 수도 없다. 왜 나는 그를 쏘지 않았지? 그가 말을 했기 때문이지. 대화가 가능했다고. 그러니까 그는 '아직' 폭주한 것이 아니다. 브란트는 결론부터 내렸다. 보고하지 않는다. 몇 가지 의심이 얼얼한 얼굴을 대신해서 뭉글하게 피어 올랐으나 얼마전까지 수석 분석가의 자리에 있던 스스로의 분석을 믿기로 했다. 그는 폭주하지 않았고 때문에 보고하지 않는다.
"쓰러지기 전에는 기억이 납니까?"
"계단을 잘못 디딘 것 같은데요, 내려가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젠장."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이건 분석가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지. 브란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판단이야.
"네, 없었습니다. 헌트 요원의 집이 워낙 엉망으로 뒤집어져 있어서 제가 뭔가 잘못 밟고 미끄러진 것 같은데요. 그 집은 진짜 엉망이었거든요"
"타박상보다 맥박이 굉장히 느렸었는데 정말 아무 징후가 없었습니까?"
샤를로 박사가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선은 굉장히 높았다. 브란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사가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브란트는 천천히 몸에 붙어 있는 기기들을 떼어냈다.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이니까요.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내려 섰을 때 브란트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마시멜로우 위를 딛는다고 생각했다. 샤를로 박사가 잠시 패드에 뭔가를 작성 중이었기 때문에 한순간 무릎이 꺾인 것은 또 브란트 혼자만의 문제가 되었다.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팔과 다리를 털어내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그 기이한 감각은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하는 실험은 당신과 이단 헌트 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실험입니다. 당연히 당신 자신의 건강에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상증상이 있을 땐 반드시 연락하고 여기로 오셔야 합니다. 어쩌면 주사 용량의 문제일 수도 있고 빈도수의 문제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검사 주기를 좀더 짧게 조절해야 겠어요. 적어도 당분간은요."
"예, 그렇겠죠."
브란트가 셔츠를 입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이 좀 쓴 것 외에 몸은 괜찮았다. 아직도 얼얼한 얼굴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문득 그는 자신이 뭔가를 깜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여기 어떻게 왔죠?"
"헌트 요원이 데려왔습니다."
이단 헌트를 잊고 있었다. 판단은 자신있지만 판단에 확신을 주는 것은 끈질긴 관찰이다. 브란트는 약간 초조해졌다. 그의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브란트의 집으로? 그러나 그가 열쇠를 챙겼던가. 나중에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네요. 샤를로 박사는 패드를 보던 눈을 들어 문 밖을 가리켰다.
"그는 줄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와 있겠다는 걸 막는 것은 꽤 힘들더군요."
아하. 열쇠가 없었나봐요. 브란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샤를로 박사는 그런 농담따위에 웃을 위인은 아니었으나 어깨를 으쓱하기는 했다. 가봐도 될까요? 라는 질문에 박사는 '다른 문제가 없다면요.'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지만 그런 말의 틈바구니를 빠져나가는 것이 브란트가 주로 해온 일이었다.
"길어지면 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브란트 요원."
브란트가 검사실을 나가기 직전,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죠. 브란트는 크게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빨리 그의 가이드를 찾아오는게 좋을 겁니다. 브란트는 그 말을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오래도록 끄덕거리며 검사실을 나섰다.
이단 헌트는 바로 앞에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복도에 서 있던 그는 문을 열고 나온 브란트를 보자마자 팔을 풀었다. 그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마치 눈으로 문제라도 찾아낼 것처럼 주욱 브란트를 훑어보는데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시선이었다.
"나 괜찮거든? 그렇게 쳐다본다고 해서 날 저밀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정말 안 좋았다고."
"알아."
"맥이 거의-"
"여기서는 아니야."
브란트는 복도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단은 바로 브란트에게 따라 붙었다. 넌 기절했었다고, 브란트. 브란트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다른 연구원들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나도 알아, 지금 얼굴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이단이 브란트의 팔을 잡아 당겨 그를 멈춰 세웠다.
"넌 이걸 하면 안 돼."
"또 시작이군."
"왜 쓰러진 건지도 모르잖아. 다음번에 또 쓰러질지도 모르고, 쓰러져서 다시는 숨을 못 쉴지도 모르지."
"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참 좋은 말 한다."
"모르겠어, 브란트? 이건 나때문이라고."
"정말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브란트는 평온한 얼굴로 -어차피 얼굴은 아직도 얼얼해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꼬리만 끌어당겨서 말했다. 마치 안부라도 전하는 것처럼. 이단은 지나치게 진지했고 늘 그렇듯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IMF 센티넬 연구소고 벽에도 바닥에도 사람들의 눈과 귀가 붙어있는 곳이었다.
"사고는 네가 치지만 수습은 내 몫이야. 적어도 이건 내 선택이라고. 그러니까 따라와. 문제 있는 사람처럼 심각하게 굴지 말고."
"네가 죽을지도 몰라, 윌리엄 브란트."
그러나 기어코 이단은 그 말을 꺼냈다. 작은 소리였지만 브란트에게는 확실히 들렸다. 브란트는 뒷목을 문질렀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두통이 올라온다. 많이 나아졌었는데 다시 또 나빠졌다. 차라리 나도 센티넬로 발현되었다면 낫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팔이 하나 더 생기든지, 뇌의 주름이 없어진다든지 할 수도 있지. 상상할 수 있는 건 다 가능해. 나도 알아. 브란트는 이단을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뭘 어쩌란 거야. 이게 내 유일한 기회야. 그리고 아직 살아있잖아. 기절? 그게 뭘 어쨌다고. 현장요원들은 이틀에 한번꼴로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는데, 이게 대수야? 당신이 이러는 건 미안하지만 오만이야. 그냥 죽겠다고? 무엇을 위해서? 세계 평화? 가치가 있을까? 당신 하나 죽는다고 아무것도 안 바껴. 당신이 내 유일한 기회인 것만큼이나 나 역시 당신의 유일한 기회야."
넌 줄리아를 찾고 싶잖아. 줄리아를 포기하고 혼자 죽을 수 있어? 그녀의 생사도 모르고? 브란트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면서 이단의 멱살을 잡듯이 잡아 끌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으므로 좀 떨어져서 보면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끼리 대비를 하면 돼. 기절은 별 것 아냐. 애초에 나같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선택된 가이드가 완벽하길 바라는 건 무리야. 난 최소한으로 당신이 폭주하는 것만큼은 막을 거야."
"아까처럼 불안정할 때에는-"
"감정 기복과 폭주는 달라. 걱정마. 폭주하면 반드시 죽여줄테니까."
이단은 눈을 깜빡거렸다. 윌리엄 브란트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단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언제 이렇게 움츠러들어있었는지 확인한 뒤 깜짝 놀랐다. 줄리아의 부재는 이단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항상 이걸 챙겨."
이단이 브란트의 뒷춤에 무엇인가를 꽂아주었다. 브란트의 총이었다. 그를 옮길 때 챙겨둔 총은 첫 발만 제외하고 모두 실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는 준비하고 있었다. 브란트가 스스로를 그리고 이단 헌트라는 '요원'을 믿는 것에 비하면 이단 자신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브란트는 아, 하고 총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자연스럽게 총을 정리했다. 그들이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까지 나왔을 때 이단이 말했다.
"잘 되지 않아서 당신이 죽어야 한다면 난 그 빚을 다 감당할 수가 없어."
브란트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단이 그에게 차키를 건넸다.
"그럼 지옥에서 제일 비싼 술이나 사."
한 만 년정도. 브란트는 웃음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며 차에 올라탔다. 이단은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능력을 제어할 수 없었고 그때문에 브란트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연구소에서도 '연구데이터'인 브란트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쏟을 것이다. 그런 이유들을 포함하고도 그가 브란트에게 사과해야하는 이유는 여전히 그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아까는 운전도 했다고?"
"신호는 몇 개 어겼어."
"총무팀에서 전화오겠군."
"미안."
브란트는 시동을 걸었다. 이단이 교통신호를 어긴 것만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는 그저 '당신 이름으로 벌점 받아, 나 말고.' 라는 해설을 붙여서 사과를 피해버렸다. 일은 일일뿐이다. 사과는 받지 않는다. 사과는 개인의 영역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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