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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킹스맨 해리+에그시 / 거리의 신사

킹스맨은 킹스맨인데 설정 쪼오오오금 다른... 렌트보이 에그시..





거리의 신사




차창 밖에 소년이 서 있었다. 손을 눈썹 위에 붙이고 창문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다분히 불량스러웠고 심지어 조금 친근하게 느껴질정도였다. 해리는 창문을 내렸다. 갑자기 내려간 창문에도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워우, 하고 한번 뒤로 물러났지만 곧 다시 차 지붕에 손을 얹고 차 안쪽으로 몸을 숙였다.
"딱봐고 공사가 다망하고 귀해보이는 분께서 뭐를 찾아 여기까지 오셨으려나. 말만 해요. 다 구해다 줄테니까."
창문을 내리고 자세히 보니 소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큰 성인 남성 취급을 하기에는 뺨이나 콧잔등에 덜 자란 심성이 묻어나왔다. '소년'은 지붕을 노크했다. 
"약, 사람 다 있어요."
"게리 언윈을 찾아 왔는데"
"게리요? 글쎄 오늘 못 봤는데. 무슨 일인데요? 설마 돈이라도 뜯겼어요?"
"그런건 아니고."
해리는 점잖게 말하며 소년을 한번 더 아래위로 훑었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저도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다 있어도 게리는 없어요."
다른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온 남자가 '에기!'라고 부르자 소년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욕을했다. 에그시라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리고 해리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아니다,그 순간에 벌써 비싼 차를 탄 남자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해리는 창문을 올린 뒤 '에그시'가 골목 앞에서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쳐다봤다. 그들은 붙어서서 뭔가를 속닥거렸고 바쁘게 손이 주머니를 스쳤다. 아무튼 맞게 찾아오긴 했군. 해리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게리 '에그시' 언윈의 파일을 옆으로 내려 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는 만날 때가 되었다. 해리 하트는 에그시의 뒤로 지나가면서, 그가 쾌활하게 떠드는 뒷골목 풍경을 옆눈으로 지켜보았다. 


에그시는 텅 빈 펍에 혼자 앉아서 성냥으로 탑을 쌓고 있었다. 심지어 늘상 얼굴에 멍을 달고 사는 가게 주인 아줌마마저 자리에 없어서 에그시는 스스로 바를 넘어가 맥주를 따라와야 했다. 그는 손끝에 모든 기운을 집중해서 성냥을 쌓아 올렸다. 왜 이렇게 아무도 없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에그시는 효율적으로 살아왔다. 아무도 없는 펍에서는, 그저 공짜 술이나 챙겨 마시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펍의 문이 열렸을 때에도 에그시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성냥은 거의 15cm 높이로 쌓여 있었고 꽤 견고해 보였다. 에그시는 입을 꾹 다문 채 성냥 탑 위에 성냥을 하나 더 올리기 위해 바를 더듬었다. 그러나 성냥갑은 비어 있어서 에그시의 손은 빈 상자 속만 쓰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옆에 의자를 빼서 앉은 사람은 정장을 잘 빼입은 신사였다. 


"솜씨가 좋구나."

"뭐든 잘하거든요."

"탑이니?"

"몰라요."


에그시는 더 이상 쌓아 올릴 성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갑자기 성냥으로 치는 장난이 몹시 지겨워졌다. 그는 손끝으로 탑을 밀어 냈다. 성냥들은 저항할 힘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서 한번도 탑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구나, 에그시."

"누구세요?"


에그시는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다지 궁금해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해리는 문득 그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들은 대체 어떤 일들인지 궁금해졌다. 아마 10분 후에 런던으로 핵폭탄이 떨어진 데도 그는 '아, 그거 참 아쉽게 됐네요.' 하는 말을 감흥없이 흘릴 것 같았다. 


"내 이름은 해리 하트다. 재단사지."

"무얼 원해요?"

"이야기."

"무슨 이야기요? 대부분 제일 변태인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시작하던데."


에그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를 넘어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잔을 하나 집어들더니, 기네스를 한잔 받아주었다. 해리 앞에 잔을 내려놓으며 에그시는 웃었다.


"이렇게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비우게 하고서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굉장할지 기대가 되네."


해리는 잔을 잡았다. 차가운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스며들었고 에그시가 세운 날도 손톱 밑으로 함께 치고 올라왔다. 거리에서 벼려진 칼이었다. 무딘 것같지만 잘못 잡았다만 손가락을 잃게 될 그런 칼이었다. 해리 하트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뒤돌아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순간을 수없이 떠올려봤지만 실제로 에그시를 마주하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나는 바주카포 앞에서도 커프스를 정리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해리는 자조적으로 비웃으면서 입을 뗐다. 그래야 되는 순간이었다. 뒤로 가는 길은 막혔다. 이곳에 오기 전에, 수도 없이 멀린이 지적했듯이, 시작되면 직진 뿐인 길이었다.


"난 네 아버지에게 빚을 진 사람이다. 네 아버지가 날 구했지."


에그시는 입을 헤 벌리고 해리를 봤다. 멍청한 표정이었고, 곧 해리는 에그시가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서 해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 그런거 없는데. 근데 왜, 이제와서 그런 이름이 나와요? 아무튼 그 머저리가 어디서 뭘 하든 관심없어요. 심지어 무슨 대박이 나서 어디 큰 기업의 사장님이라고 해도, 나는 좆도 관심 없거든요? 아이씨 이 시시한 이야기 때문에 나의 귀중한 시간만 버렸잖아요. 술값은 아저씨가 내야겠네. 양심이 있으면."

"네 아버지는 죽었다."


에그시는 입을 잠깐 다물었다. 하지만 별로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딘가의 노숙자로 얼어 뒤졌을 것이라는 것이 근 몇년간의 아버지에 대한 추측이었기 때문이다. 


"뭐 잘됐네요. 피차 좋은 사이도 아닌데. 그 말 하려고 온거면 알겠어요. 자 슬픔을 딛고 저는 그만 가볼게요."

"네 아버지는 나를 구하고 죽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죽었지. 네 아버지는 영웅이었어. 다만 세상이 알지 못했을 뿐이지."


에그시는 바 너머에서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 남자는 매사 진지한 모양이다. 진지함이라면 넌덜머리가 나. 침대에서 이야기 들어주기 가장 곤혹스러운 사람들도 진지한 인간들이잖아. 차라리 돼지처럼 우는 쪽이 더 낫지. 


"영웅이든 뭐든 관심없다고요. 그 인간이 세상을 구했을진 몰라도 우리 엄마는 그 자식이 죽인거나 마찬가지니까. 폐병이 심하게 들었는데 홀연히 떠나더니 얼굴 한 번 안 비춘 걸 뭐. 우리 엄마는 그 자식이 집을 떠나고 한 달 뒤에 죽었어요. 내내 누워서 '네 아빠만 돌아오면 상황은 나아질거야.' 라고 하면서 바보처럼 울다 죽었다니까요. 데이지는 딱 2살 되던 때라 엄마가 죽은지도 몰랐고요. 지금은 시설에 가있지만.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는 아버지란 인간한테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단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 영어로 말하고 있는거 아닌가? 왜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아저씨."


에그시는 말 끝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해리는 그게 그가 화를 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네 아버지는 마지막 테스트만 거치면 정식으로 우리 멤버가 될 참이었어. 집에 있는 가족 이야기를 자주 했지. 우리의 일은 극비임무였기 때문에 집에 연락을 할 수 없어서 힘들어 했지만, 곧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고 잘 이겨냈어. 아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는데, 아마 테스트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한 모양이더군. 마지막 날, 우린 테러리스트를 저지했고 그를 심문하던 중에 사고가 났어. 그가 숨긴 폭탄이-"

"아저씨."


에그시가 바를 노크했다. 해리의 말은 방향을 잃고 멈춰섰다. 올리브 색의 눈이 집요하게 해리의 안경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왔는지나 말해요. 난 길바닥에서 뒹구는 놈이라 어르신들과 달리 인내심같은 거 없거든."

".....보상하기 위해 왔다, 에그시."

"보상?"

"그래, 보상. 너의 잃어버린 삶에 대해서."

"얼마 줄건데요?"


해리는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해리는 에그시가 거부할 경우와 바로 따라올 경우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고 그가 분노하는 경우, 기뻐하는 경우 등 다양한 감정표현에 대해 대비했지만, 그가 곧바로 돈 이야기를 하며 입맛을 다실지는 몰랐다. 귀족나리들이란. 해리는 스스로의 허벅지를 찌르고 싶었다.


"입고 온 것 보니까 하나같이 돈냄새나는 것들인데, 아저씬 부자니까 통도 크겠죠? 얼마 줄건데요."

"당장에 돈으로 줄 수도 있겠지만, 난 네가 지금의 생활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기를 원해. 제대로 된 집에서 살면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구할 수 있도록 후원자가 되고 싶다."


에그시는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쭉 펴고 섰다. 해리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면서 목이 허전함을 느꼈다. 칼이 목 밑까지 따라 온 느낌. 에그시는 서서 실실 웃더니 해리를 보고 말했다.


"야."


이런 반응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꺼져, 개새끼야. 니가 뭔데 내 삶을 판단하고 지랄이야? 제대로 살기를 원해? 좆까, 돼지하고나 굴러먹을 변태새끼야. 아버지라는 병신한테 빚을 갚고 싶으면, 화장실 수건걸이에 목이나 매고 뒤져버려."


해리는 이런 폭언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인가를 헤아려봤다. 10여년 전에 만났던 미치광이 살인마가 비슷하게 말했던 것도 같고, 어쩌면 에그시가 더 심한 것도 같고. 에그시는 해리 앞에 놨던 기네스 잔을 뺏어 들더니 바닥에다가 술을 따라 부었다. 그리고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 나갔다. 


"에그시."


에그시는 돌아보지 않고 펍을 나섰다. 해리는 텅빈 펍에 앉아서 에그시가 무너뜨린 성냥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우린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해리 하트는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