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전력 키워드 '옆모습'
아무것도 아니지만
안녕. 고갤 들었더니 앞에는 한석율이 서있었다. 웃는 얼굴은 멀쩡했지만 귀도 목도 시뻘개진 것이 회식을 한건지 접대를 한건지 술을 옴팡지게 들이붓고 나타난 것은 틀림없었다. 네네. 장그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허릴 폈다. 방금 전에 벽 붙잡고 토하고 있던 장그래도 취해 있기는 매한가지인 밤이었다. 고깃집과 호프집이 늘어서있는 번화가 사이 골목에서 두 취객이 우두커니 섰다. 가방이 어딨더라. 더듬더듬하니 어깨에 잘 걸려있다. 그래 가방은 잘 챙겨야지.
"회식 했어??"
한석율은 몹시도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크고 높은 소리로 물었다. 장그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그 모양일 것이다. 술에 취해서 시계 바늘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거리위로 어깨동무한 정장 부대 여럿이 나아간다. 장그래에게 어디서 났는지 생수 한 병을 건내는 한석율의 등 뒤로 또 한 무리의 취객들이 삶을 토하며 지나갔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다들 일주일간 쌓아두었던 설움도 불만도 알콜로 싹 씻어내려고 번화가로 뛰어나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차장님 어디가셨지. 대리님은? 입을 헹군 장그래가 두리번 거리자 한석율도 같이 두리번 거렸다.
"차장님은요??"
"모르겠는데. 너가 여기 있던데? 차장님이나 김대리님이나 못 봤어."
장그래는 가방을 한번 추켜들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한석율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들은 골목에서 다시 화려한 간판이 눈을 찌르는 번화가로 나왔다. 불빛에 휘청이는 많은 등과 머리통 사이에서 장그래는 익숙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리님이 차장님 바래다 드린다고 하셨던가? 천과장님이셨나? 내가 바래다드렸던가? 한참 머릿속에 생각을 떠올렸지만 떠올리려 하면 할 수록 머릿속은 물먹은 휴지처럼 꾸역꾸역 뭉쳐졌다. 한석율이 장그래의 어깨를 툭툭쳤다.
"가셨을거야."
"맞아요."
장그래는 부러 서운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서운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자신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좀 유치한 일이고 그걸 굳이 한석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문득 그 거리 위에 서로 아는 얼굴이라고는 둘만 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장그래와 한석율은 멀뚱히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석율은 잠깐 멍한 얼굴이었는데, 이내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파드득 얼굴에 표정이 들었다.
"집에 가자. 가야지."
"가야죠."
"가자."
"가요."
둘은 로봇처럼 말을 주고 받았다. 한석율은 아무래도 안되겠는지 장그래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장그래는 스스럼없이 당기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유행하는 여자 아이돌 노래가 나왔고 또 어디에서는 흘러간 90년대 댄스곡이 나와서 거리는 공기까지 꽉 차있었다. 전철역 계단을 내려갈때 한석율이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할 것을 잡아 준 것은 장그래고, 장그래의 교통카드를 코트 주머니에서 찾아준건 한석율이었다. 승강장 3-2. 왼쪽 오른쪽 화살표 앞에 하나씩 차리 하고 서 있을 때에도 장그래는 잠깐 졸았고 한석율은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역시 생각보다는 정신을 놓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이거 막차야. 한석율이 중얼거렸다. 전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승강장의 취객들은 모두 반가운 얼굴로 객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장그래와 한석율은 나란히 앉았다. 막차에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저마다 사연만큼은 한명 한명이 인생극장 20편짜리만큼이나 있다. 승진이 막힌 차장님, 수금을 못해서 직원 2을 자른 사장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학생. 그리고 장그래와 한석율이 있었다. 장그래는 손잡이 기둥에 머릴 기댔다. 옆에 앉은 한석율이 보였다. 머리 사이로 이마가 보인다. 난 늘 저 이마를 한대 치고 싶었지. 장그래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포기했다. 한석율은 또 어딘가 자신만의 세계로 가버린듯 멍해보였다. 귀는 빨개가지고 말이야. 장그래가 투덜거렸다.
"아저씨 술냄새 나요."
"너한테서 나는거야."
"아니거든요."
"둘 다라니까."
한석율은 가늘게 뜬 눈을 비스듬히 굴려 장그래를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그들의 앞자리는 텅 비어있었고 건너편 유리에 반사되는 건 또 둘 뿐이었다. 장그래는 한석율의 옆모습을 이제까지 실컷 봐왔다. 옆자리에서 밥을 먹은 것도 몇 번이고 일하다가 마주친 것도 몇 번이다. 그런데 또 새삼 그곳에 낯선 이가 앉아있는 것이다. 눈이 풀려있지만 입을 닫고 있는 한석율. 그런데 웃고 있기도 해서 아예 모르는 것같지는 않은 한석율. 단정한 옆모습을 보며 장그래는 결국 부아가 치밀었다.
"어디가요?"
"집에."
"이거 타면 한석율씨 집 가는거 아니잖아요."
"어 안가."
"근데 왜 탔어요."
한석율은 별로 반박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로 돌리지 않고 말했다.
"장그래 집 데려다주려고."
장그래는 손에 힘을 주고 그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를 한대 딱 때리려다가 손을 내렸다. 거칠게 나간 손과 달리 입은 우물우물한다.
"제가 그러지 말랬죠."
"응."
"그런거 하지 말랬잖아요."
"응."
"근데 왜 그래요?"
"글쎄."
술취한 놈이 화를 내고 술취한 놈이 대답하니 도무지 대화에 불이 붙지 않는다. 장그래는 기가 막혔지만, 또 술 탓을 하자면, 금새 화가 난 게 가라앉고 조금 미안해졌다. 이래가지고 하지 말라고 한건데. 쓸데없는 죄책감 느끼기 싫어서, 호의를 거절한건데.
"한석율씨."
"응."
"내가 한석율씨 찼잖아요."
"그렇지."
"그건 알고 있죠?"
"알고 있어."
"근데 왜 잘해줘요? 계속?"
"그러면 안돼?"
"안.. 되지 않아요?"
"네가 어떻게 알아. 연애도 별로 해본 적도 없는 놈이."
그것도 그렇군. 분하다. 내일부터 연애에 대한 책을 독파해야겠다. 한석율의 손이 장그래의 눈을 가렸다.
"눈 좀 붙여. 내릴 때 깨워줄테니까."
큰 손이 가린 어둠 속에서 장그래는 여러번 이러면 안되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은 따뜻했고 장그래는 너무 피곤했다. 나는 또 비겁해진다. 장그래는 스스로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 설핏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 전에 손이 치워졌고 비몽사몽간데 가는 시야로 한석율을 보았다. 여전히 허릴 세우고 앉은 한석율의 옆모습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애처롭게도 보여서 장그래는 속으로 '미안해요'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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