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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킹스맨 팅테AU 해리+에그시+멀린 / 원탁의 남자들


+ 저번에 썼던 '안개 속으로'와 꼭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보시면 이해가 더 잘되는...그런.. 이런거 뭐라고 하지 한국말 어렵습니다.

+빌 헤이든=해리 하트 / 짐 프리도 = 멀린 / 빌의 '어린 남자'= 에그시 언윈 팅테AU



해리 하트가 뛰어난 언변을 가졌다는 것은 말하기 조차 아까울 정도로 뻔한 사실이었다. 그는 혓바닥을 교묘하게 써서 상대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쓸데 없는 것을 쫓아가도록 만드는데 선수였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그는 태연하게 찻잔을 한번 기울이고 차 한 모금을 다 삼키기도 전에 주제를 바꿔버렸다. 에그시는 그에게 '뱀같다'고 지칭했고 해리는 '능숙한 편이지.'라는 또 다른 말로 넘어갔다.


그런 해리 하트가 친구 이야기랍시고 꺼낸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었다. 자기 이야기는 슬슬 피하는 사람이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할때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뱉어냈다. 특히나 걸핏하면 '우리 편이라는 건 허상이란다, 에그시'라고 가르쳤던 해리하트였기에 에그시는 도통 그가 말하는 친구가 살아있는 사람이기는 한건지, 아니면 해리의 머리통 안에서만 사는 가상의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사실상 에그시가 그의 친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옆 골목에 사는 사기꾼 노파에게 점을 치는 것 외에는 없었으므로 에그시는 그저 '해리 하트의 친구'라는 존재가 실존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듣고 넘기기로 했다.


"그는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야, 에그시. 마치 혼자 움직이는 전차같이 뜻을 밀고 나가거든. 요즘 세대는 그런 면이 부족해."

"뭐 하는 사람인데요?"

"비밀이란다."

"당신과 같이 일하죠?"

"에그시, 점점 똑똑해지는구나. 곧 템스강 옆에서 점도 칠 수 있겠는걸."


늘 대화는 이런식으로 문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반복했다. 그래도 에그시는 해리가 그의 기억 속 문을 열때마다 부지런히 눈에 힘을 주고 - 비유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해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에그시는 온 몸에 힘을 주고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그 안을 들여다 봤다. 그것이 해리가 방심하는 유일한 틈이었고 그 틈으로 무언가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지만 그저 그 틈을 봤다는 것 자체가 에그시에겐 즐거움이 되었다. 에그시는 그 문 너머에서 빨간 벽돌담을 산책하는 젊은 날의, 지금보다도 훨씬 뻔뻔한 해리 하트와 그와 함께 걸어가며 사회운동에 대해 논의하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들은 함께 공도 차고 때로는 테이블을 엎을 만큼 격정적인 토론을 하고 종국엔 와인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해리 본인이 인식했는지 아니면 그 친구가 그의 삶에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마저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지, 해리 하트는 자주 친구라는 주제로 틈을 보였고 에그시는 마치 그 둘 모두와 함께 앉아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종국엔, 에그시도 해리 하트의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칭찬밖에 듣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느 날은 꿈을 꿨다. 에그시의 명함이 가득한 탁자를 둘러 싸고 해리와 에그시가 앉아 있었는데, 원탁에는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 남자는 목소리가 낮고 웃으면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담배 한 갑을 나눠피면서 카드 게임을 했다. 돈이 없어서 명함을 돈대신 썼는데, 해리 하트가 명함을 모두 가져갔다. 에그시가 분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킬킬거리자 얼굴 없는 남자가 한 마디했다. '해리, 이 여우같은 자식.' 해리는 아주 만족한 듯이 건배제의를 했다. 배경이 크리스마스였는지 테이블에는 몰드 와인이 든 작은 솥이 올려져 있었다. ' 이 멍청한 솥은 어디서 난거에요?' 에그시가 물었지만 다들 출처를 몰랐고, 그냥 넓적한 잔에 그것을 떠서 잔을 들어올렸다. '비밀을 위하여!' 해리가 외쳤다. 몰드 와인은 달고 시나몬 향이 많이 나면서 따뜻했다. 그런 꿈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데다가, 이야기를 들은 해리는 별로 좋아할 것같지 않아서 에그시는 해리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비오는 날 밤, 거의 잠에 취했던 에그시는 천둥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에 현관문을 열었다. 우산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해리 하트가 유령처럼 그곳에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에그시는 지나치게 퉁명스럽게 묻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자다 깬 목소리는 잘 다잡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해리 하트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레인코트의 깃도 채 세우지 않고 비를 다 맞은 해리는 뺨이 창백해서 에그시는 이것마저도 꿈인가 싶었다.


"친구가 죽었어."


해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저히 그 사실을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입에 들어온 모래알을 뱉듯이 말을 뱉었다. 에그시는 빗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와요. 맙소사, 당신 지금 무슨 꼴인지 알아요? 들어와서 말해요."


해리는 눈 앞에서 움직이는 에그시의 손을 분명히 보고 있었지만 전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에그시는 점점 간청하는 마음이 되었다. 


"해리?"

"내가 죽인거야."


해리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창백한 손을 쥐었다 피더니 고개를 들고 에그시를 쳐다봤다. 에그시는 그 눈을 보고 쇠꼬챙이에 찔린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해리 하트의 조각난 정신이 그대로 에그시를 찌르며 들어왔다. 


"이제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남기고 해리는 몸을 돌리고 빗속으로 걸어갔다. 에그시는 오래도록 현관에 서 있었지만 해리의 등은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에그시는 삼일 정도 잠을 자지 못했고 2주 정도는 우울함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2주 뒤에 나타난 해리 하트는 언제나와 같이 멀끔하고 시덥잖은 말장난을 좋아했다. 에그시는 대체 그 빗속의 유령은 누구였는지 묻고 싶었지만 해리는 그런 틈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잘 웃고 농담도 잘했지만, 이후 에그시를 만나는 나날 내내 다시는 그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


키가 큰 남자가 현관 밖에 서 있었다. 에그시는 고개를 조금 젖히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몹시 피곤해보였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에그시는 그가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 에그시는 설명없이 현관문을 비켜섰고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원탁을 둘러 싸고 앉았다. 


"당신이 해리 하트의 친구죠?"

"그래."

"하지만 당신은 날 모르죠?"

"맞아."


에그시는 상처받지 않았다. 해리의 안목은 좋았다.  에그시는 똑똑했고 눈치도 빨랐고 그만큼 포기도 빨랐다. 에그시는 해리 하트가 그를 매일 만나러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해리 하트에게 그의 친구만큼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에그시에 대해 모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해리 하트다운 일이라 차라리 에그시는 웃음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요?"

"그가 몇 마디 말을 남겼다."

"당신한테요?"

"아니. 난 전달자일 뿐이야."


남자는 며칠 못 잔 사람같았다. 눈이 꺼지고 목소리도 갈라졌다. 꿈 속에서 모두 킬킬거렸던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기다리지 마라. 해리는,"

"전에 이런 꿈을 꿨었어요."


에그시는 그의 말을 잘랐다. 꿈에서 나랑 해리랑 당신이 카드 게임을 했어요. 몰드 와인도 마시고 정신없이 킬킬거리면서. 당신은 거기에 앉아 있었고, 해리는 저쪽이었어요. 물론 당신 얼굴을 몰랐지만, 난 그게 당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가 당신 이야기를 엄청 했거든요, 젠장, 정말 엄청했다구요. 남자는 담배를 꺼내더니 한 개피를 물었다. 불을 붙인 다음 길게 연기를 뱉을 때까지 에그시는 그의 손을 쳐다봤다. 


"해리는 그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어요."

"......"

"당신이 그를 죽였어요?"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그시는 그의 담배갑에서 담배를 한 개피를 꺼냈다. 남자는 에그시를 놔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명함을 흥미있게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담배 연기만 피어 오르는 방안에서 남자는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해리 하트는 정말, 개새끼였어."


그 목소리 안의 슬픔과 비통을 외면하며, 에그시는 천장을 보았다. 해리가 굴같다고 표현했던 방 안 천장에 빠져나가지 못한 담배연기가 빙글빙글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