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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신세계 청+자성 단문 모음





1


나약한 인간 이자성은 죽었다. 그 날 그 병실, 산소호흡기를 그러쥔 채 손을 움직이지 못했던 그때, 정청이란 이름의 남자의 숨이 파르르 넘어갈 때 잠들듯이 가버린 것은 정청만이 아니었다. 나약한, 배신자, 이자성도 그때 죽었다.




2



본래 정청이란 인간은 구제불능이었다.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 나갈듯이 긴장한 채로 수술장에 들어섰던 그 첫 대면에 피 칠갑을 한 채 이마 위에 찢긴 상처가 아프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그를 처음 봤을 때 이자성 머릿속엔 빨간 원숭이가 떠올랐다. 하도 난리를 해서 말도 못 붙이고 서 있는데, 정청이 중국말로 욕을 했다. 대일밴드든 스카치테이프든 좀 가져와보라고 쌍것들아. 거의 반사적으로 이자성은 거기에 대답했다. 저 하나 있습니다. 중국어였고, 그 말에 정청이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눈은 꽤 오래 맞았다. 이자성은 긴장했고 정청은 눈을 두어번 껌뻑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소릴 질렀다. 내놔 새끼야 대일밴드 있다고 자랑질만 허고 자빠질거냐, 시방!! 이자성은 바지주머니에서 대일밴드를 꺼냈다. 정말 우연히 들어있었고 왜 들어있었는지는 잊었으나 그 현란한 미키마우스 문양은 잊을 수 없다. 정청이 제 옷 소매로 이마주변을 닦으며 손으로 이자성을 불렀다. 여 좀 붙여봐야. 이자성은 천천히 그의 오른쪽 눈썹 위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 상처는 별 거 아니었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았다. 그러나 정청은 그 상처가 제 이마를 반으로 쪼갤 것처럼 굴었고 밴드를 붙이면서도 아프다고 설레발을 쳤다. 짧게 깎은 머리에 금목걸이, 입에 걸게 붙은 욕설을 한 깡패와 미키마우스는 코미디였다. 그러나 정청은 화사하다며 그 밴드를 좋아했고 이자성에게 담배 한 대를 빌렸다. 그들은 서서 담배를 태웠다. 별로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오래된 나이트클럽은 완전히 뒤집어져서 엉망이었고 시체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정청은 그 곳이 여수 앞 바다 부둣가인것마냥 희희낙낙 거렸다. 그들은 담배 한 대를 다 필때까지 말이 없었다. 이자성은 담배연기를 일부러 깊이 끌어당겨서 폐를 괴롭혔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정청 옆에는 버려진 회칼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게 이자성의 현실감각을 일깨워줬다. 본의 아니게 그 칼을 쳐다보며 집중하는 바람에, 이자성은 정청이 제 뺨을 치려고 들어올린 손을 못 봤고 피하지도 못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이자성은 눈 앞에 멈춰선 손바닥을 봤다. 핏물이 손금마다 벤 악인의 손이었다. 손금 위로 그어진 무수한 흉터들이 징그럽게 패여있었다. 새끼 쫄았냐. 바지에 지려부린건 아니제? 정청이 이자성 눈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긍께 묻는데 왜 바로 대답을 안해 씨빨놈아. 금방이라도 뺨을 칠것처럼 다가왔던 손이 공중을 돌았다. 새끼 얼굴이 분가루바른 것마냥 희어서 어디 손자국 날까봐 손도 못대겄디야. 정청이 입이 째지게 웃었다. 분명 정청은 이자성을 처음 봤다. 이자성도 정청을 처음봤다. 봐서도 안 될 사이였다. 그런데도 정청은 이자성을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우보듯이 쳐다보며 웃었다. 정청이 바닥에 꽁초를 버렸다.


느, 이름이 뭐여?


이자성이요.


내는 청이여, 정청. 이름 한번 기똥차지 그르지 않냐? 정청은 킥킥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이자성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담배 값 갚는셈 치고 매운탕 한 그릇 사줄게 이 밀가루반죽같은 새끼야. 이자성은 정청에게 질질 끌려갔다. 정신차려 보니 눈 앞에 매운탕이 있었고 소주병이 굴러다녔고 담배갑이 텅 비어 있었다. 앞에서 떠드는 정청 이마엔 여즉 미키마우스 밴드가 붙어 있었다. 그날의 임무는 정청과 안면을 트는 것이었다. 이쯤이면 성공했네. 이자성은 소주잔 위를 타고 넘어 제 손등까지 흐르는 소주를 보며 멍하게 생각했다. 이자성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정청은 잔마다 넘치게 술을 따랐고 실컷 마시더니 제가 먼저 쓰러졌다. 결국 계산은 이자성이 했다. 취기 속에서도, 이거 강팀장님이 영수증 처리 해주시려나 하고 생각했다. 



3




첫만남의 요란함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즉 아직 숙취로 고생하던 이자성 앞에 또 정청이 불쑥 나타났다. 채 어떻게 대화할지 판도 짜지 못한 이자성을 막무가내로 끌고 나가 낚시를 하자며 낚시배로 밀어넣고 정작 본인은 뱃머리 붙잡고 고기밥을 주고 있었다. 정청은 그 요란한만큼이나 예상 밖이었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이자성의 하루하루를 조각냈다. 


세번쯤 술을 마시자 대뜸 정청이 숟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말 놔, 새끼야, 혀끝에 빠다라도 발랐냐. 들을때마다 징그러버서 못살겠구마잉. 이자성은 그 말에 어, 라고 해야할지 네, 라고 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들은 부두 앞 간이 포차에 앉아있었다. 비린내 물씬 나는 선창 바닥에 목욕탕에서나 쓰일법한 낮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이자성이 말이 없자 정청은 더 요란하게 숟가락을 두드렸다. 빌어처머글 새끼야 시방 면전에 놓고 안주로 말 씹어먹고잡냐, 말을 놓으랬지, 시건방떨랬냐 이 개새끼가. 이자성이 소주잔을 놓으며 큰맘먹고 입을 열었다. 형님. 그리고 뒷말은 삼켰다. 갑자기 정청이 낄낄 웃었다. 야 이새끼보드라고 불알도 없는 새끼 싸나이가 되가지고 반말 함 해볼 뱃심도 없냐, 니 달린거 고마 떼뿌리라고. 정청의 손이 짖궂게 달려들어서 이자성은 허우적거리다 의자 뒤로 넘어졌고 정청은 더 크게 웃었다. 새끼, 누가 느 잡아묵는다냐. 정청이 손을 내밀었다. 첫날과 달리 피묻지 않은 손이었다. 일어나서 술이나 한잔 따라올려보드라고잉. 이자성은 주춤했다. 저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 어떤 식으로든 그 손은 이자성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그도 알았다. 그게 바로 강팀장이 지시한 일이었다. 이자성이 목숨걸고 여수 바닥에서 건달놀음하고 있는 것도 그 일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자성은 그것이 내키지 않았다. 정청이 짜증을 냈다. 씨빨노마 형님 팔 빠져분다. 이자성은 얼결에 그 손을 잡았다. 정청이 이자성을 끌어당겼다. 힘 있고, 안정적으로. 형님답게. 일으킨 이자성의 머리를 마구 헤집은 손이 다시 술잔을 들었다. 싸게싸게 한잔 올려라잉. 이자성은 그 잔을 채웠다. 정청은 그에게 윙크를 했다. 


우리 이제 여수 브라더여, 알긋냐. 


정청은 된발음으로 브라더를 외치며 술을 마시고 또 다시 뻗었다. 이자성은 그 다음날 강팀장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브라더라는 단어를 10번쯤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 단어는 보고서에 올라가지 않았다. 



4



왜 이렇게 살갑게 굴어요? 자성은 청이에게 물어봤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여수 시내에서 마주치면 안 될 미친개 리스트 1위부터 5위까지 독보적으로 혼자 이름을 올린 정청이 이자성에게는 유독 사람처럼 굴었다. 원래가 잘 웃고 떠들기도 잘 했지만 조직에 몸 담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신참내기한테까지 사근하게 굴 인간은 아니었다. 청이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자성의 귀를 잡아당겼다. 우리 브라더를 사랑하니까 그라제. 얼어죽을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딱 견적이 나왔는데, 순전히 술값 덤테기 씌우려는거 아니요. 내 말이 틀려? 정청이 불만스럽게 눈을 까뒤집었다. 아이 씨빨놈이 하늘같은 형님한테 술 한잔 사는게 아까우냐?응?아까워? 청이가 자성의 귀를 잡아당기자 자성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그 손에서 벗어났다. 그 꼴을 보며 청이는 낄낄 웃고. 그런 날이 태반이었다.



5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정청은 한번도 이자성을 때린 적이 없었다. 첫날부터 언젠가의 마지막날까지.



6


씨빨노마 느 낯짝 좀 보라고 허여멀건해서 푹 찌르면 뒤질 것 같은디 우짜 때리겄냐 느는 얼굴이 무기다 개새끼야 개가튼새끼 알겠냐?잉? 알겠냐고? 야 씨빨 취했냐?어?취했냐고 왜 말이 읍어



청이의 손이 탁자에 엎드린 자성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아 이 멍멍이 같은 새끼가 하늘같은 형님 말씀하시는데 처자빠져 자고 있고 이 아름다운 개새끼가. 청이는 요란하게 자성의 귀에 소리를 지르려다 말았다. 하얀 얼굴이 탁자위로 쏟아졌다. 그래서 정청은 그냥 이자성의 파리한 뺨 위에 손을 올렸다. 누굴 때리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올려둔 것은 아마 머리털 나고 한글 기역니은 배운 뒤로 처음일 것이다. 뺨이 차가웠다. 씨빨놈이 왜 차갑고 지랄이여. 그 하얗고 마른 얼굴, 신경질적인 눈매는 그 자체로 이자성이었다. 정청은 그 얼굴이 크게 가슴에 남았다. 어디 기집년 죽여주는 젖통도 아닌데 그 별거 없이 허여멀건한 얼굴이 크게 남았다. 잘생기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청이에게 동정을 샀다. 그지새끼한테 적선 한번 해본 적 없었지만 정청에게 이자성은 단박에 걱정스럽고 걱정해야하고 챙겨야 할 존재가 되었다. 지롤을 하세요, 지롤을 해. 정청은 혼자 방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혼자 낄낄거리기도 했다. 



7


야, 느 오늘 뭐한다냐. 느긋하게 물으며 청이 피를 닦았다. 아따 쓰벌놈들 피도 더럽게 튀네. 그가 아끼는 화려한 셔츠깃에 핏물이 들어 정청은 된통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자성은 옆에 앉아서 다친 부분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집에가서 퍼질러 잘건데요. 붕대를 감던 자성이 퍼뜩 고갤 들었다. 아, 나 오늘은 안 해. 씨빨노마 뭘 안하냐. 술 안마신다고요. 이러다 칼침맞아 뒈지는게 아니라 간이 썩어서 죽겠어. 자성이 툴툴거리는데 청이 눈을 부라렸다. 야이 쌍놈의 새끼야 술 처마시자고 한거 아니그든? 그럼 왜요, 뭐 시킬 일 있어요? 자성이 묻자 곧 때려 죽일 것처럼 눈을 부라리더니 정청이 개구리 뒷다리 잡아 챈 남학생마냥 빛났다. 느 나랑 영화 보러 가자. 


자성의 얼굴이 어찌나 기이하게 구겨지는지 정청은 처음으로 자성의 얼굴을 걷어 찰 뻔 했다.


아 시꺼먼 사내놈들끼리 뭔놈의 영화야, 영화는. 자성이 고개를 저으며 먼저 가버리자 청이가 뒤에서 굴러다니던 냅킨을 집어 던졌다. 야이 개가튼 노무 새끼야 형님 말씀하시는데 등을 보인다냐 야! 이리 안오냐! 브라더!!!! 



이자성은 그 일을 그냥 해프닝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청은 생각이 날 때마다, 마치 숨 쉬는 것마냥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결국 기가 질린 자성이 영화관에 끌려갔다. 낡은 영화관은 사람도 없었다. 낮엔 일반 영화를 상영하고 밤엔 성인영화를 상영하는 동네 망해가는 작은 극장이었다. 에라이, 왜 꼭 봐도 이런데서 보쟤, 찝찝하게시리. 자성은 극장 앞에서부터 투덜거렸다. 이런 그지같은 새끼 낭만이라고는 니은자도 모르는 새끼. 청이는 그 등을 떠밀었다. 상영관 안은 더 가관이었다. 80년대 고속버스에서 썼을 법한 낡은 좌석에 공기는 습했고 어딘지 비린,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이자성은 도로 나가다가 청이에게 뒷덜미가 잡혔고 억지로 자리에까지 앉았다. 대낮에, 낡은 극장은 뭔 짓을 하러 들어왔는지 모를 불륜커플 한 쌍과 나는 조폭이다라고 미간 주름 사이사이 끼워맞춘 남자 둘이 전부였다. 잠이나 자다가 나가야지하고 생각하며 자성이 그래서 영화는 뭐유? 하고 티켓을 보니 멜로영화였다. 


아나 씨발. 

이 개새끼가 이제 형님 앞에서 욕도 하네. 


아예 멍멍짖어라 개놈아. 다시 나가려는 자성을 붙잡아 앉히자 마자 영화가 시작됐다. 상투적인 멜로 영화였다. 남자와 여자가 운명적으로 만나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더니 또 갑자기 장애물에 부딪혀 방황하고 결국 다시 만나는 그런 이야기였다. 차라리 밤에 와서 성인영화를 보자고 했으면, 낯간지럽지나 않지. 자성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 꼴도 좋은 꼴은 아니다 싶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자성은 불편한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자는게 낫지. 어디서 훌쩍거리는 소리만 안났어도, 이자성은 그대로 잠들었을 것이다. 처음엔 영화 속 음향 효과인줄 알았으나 그러기엔 너무 크게 들렸고 거칠었다. 자성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에 반사되는 빛에 의존해서 옆을 보니 정청이 몸을 앞으로 쭉 뺀 채 앉아 있었다.


얼굴이 반짝거려서 그제서야 그 인간이 운다는 걸 알았다. 가관인 것은 우는 것을 쪽팔려하지도 않고 큰 소리로 훌쩍거린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짧게 친 덩치 좋은 남자가 멜로 영화를 보면서 슬피 우는 걸 상상해 보라. 저 앞에 앉은 불륜커플이 신경쓰이는지 자꾸 이쪽을 돌아봤다. 아나 시발. 자성은 속으로 욕을 했다. 당황한 탓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같이 스크린을 봤다. 똑바로 보지 못해서 내용도 모르는 영화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생각했다. 조금 더 있으면 대성통곡도 할 기세였다. 일단 자성은 휴지 비슷한 것이라도 찾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 미치겠네. 자성은 일단 청이의 팔을 잡아 끌어 의자쪽으로 당겼다. 거의 앞의자에 붙어 보던 정청이 의자에 바로 안착했는데 정확히 보는 얼굴은 더 가관이었다. 신나게 얻어터진 얼굴이랑 비슷하게 울긋불긋했다. 와 진짜 형님 골때려요, 아슈?? 


청이는 평소 그 걸던 입담도 집어 삼킨 채 자성을 무시했다. 그 얼굴이나 좀 닦고 보라고요. 그러나 다시 스크린 너머로 가버린 청이를 보며 자성은 혀를 차며 결국 제 소매로 그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손 저리 치우라고 허우적거리는 청이와 몸싸움이 있었지만 아무튼 극장을 나서기 전까지 그럭저럭 눈물 흔적은 없앨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며 자성은 엉망이 된 제 자켓 소매를 쳐다봤다. 더 얄미운 것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정청이 언제 울었냐는 듯 멀쩡한 얼굴을 하고 담배를 빼물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형님이 무슨 사춘기 소녀요? 저런 걸 보고 질질 짜게? / 입다물어라 이자성이 느 생리한다냐. 왜이렇게 지지배배거려싸. 청이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자성은 문득 그 태연한 목소리 끝에 아직 다 삼키지 않은 울음이 묻어난다는 걸 깨닫고 그냥 입을 닫았다. 그날은 술도 마시지 않고 헤어졌다. 야, 브라더 담엔 니가 표 사는거제? 청이가 그렇게 뱉어놓고 가버릴때 자성은 사긴 뭘사냐며 무시했다. 그러나 둘은 또 영화를 보러 갔다. 꽤 자주. 정청은 액션 영화를 보면서도 가끔 울었는데 주로 악당이 죽을 때 울었다. 아니 형님 악당 죽는데 왜 울어요? / 야이 정없는 새끼야 같은 처지 사람이 뒈지는데 안 슬프다냐 감정이라고는 여수 앞바다 떠다니는 모래알보다도 없는 호로새끼야.


 여수바닥을 떠서 서울로 옮길 때까지 그들은 자주 영화를 봤다. 스크린 앞에 있는 정청은 정청이 아니었다. 정청은 영화를 봤고 이자성은 정청을 봤다. 볼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8


이자성은 잠을 잘 못 잤다. 오랜 불면증은 인생의 커다란 흉터였다. 



9



여수로 내려가 처음 칼을 잡던 날부터 그는 잠들지 못하고 옅은 잠에선 악몽을 꿨다. 처음 증상이 시작 될 때부터, 그럼 이 상황에 잘 자면 그게 정청이지 사람이냐 싶어 넘어갔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그 무렵의 아직은 순진했던 이자성은 보고 받으러 내려온 강팀장에게 말했다. 잠이 잘 안 옵니다. 강팀장은 껄껄 웃었다. 좋은 징조야, 네가 아직 경찰이란 뜻이거든.


그러나 좋은 징조고 자시고, 불면증은 자성에게 현실이었다. 술에 취해 뻗어 겨우 눈을 붙이거나 악몽으로 이어지는 옅은 잠이 점점이 이어졌다. 여수에서 얻은 그의 자취방은 반지하였고 그 가격답게 어둑했는데, 자성은 늘 불을 켜고 살았다. 빛이 꺼진 어둠 속에는, 늘 무엇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강팀장이, 때로는 얹그제 수술한 이름모르는 떡대가, 때로는 정청이 느물느물 웃으며 회칼을 빙빙 돌렸다. 싸구려 전구는 빛이 밝지 않았지만, 그 빛이라도 없으면 자성은 견딜 수 없었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짜바리로는 이상한 일이지만, 이자성은 혼자 있는 일을 극히 싫어하게 되었다. 늘 패거리와 어울렸고 정청과 시시한 농담을 하며 술을 마셨고 모르는 여자들과 뒹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어둠을 걱정하지 않았다.


여수에서 일한지 2년쯤 넘어갔을 때, 그러한 증상은 이미 만성이 되었다. 자성은 여전히 방의 불을 켜고 다녔고 이제는 집에 사람이 있든 없든 불을 켜놨다. 강팀장에게 부탁해서 수면제를 샀다. 그걸 먹으면 강제로나마 잘 수 있었다. 그러냐 약기운에 거뭇거뭇 시야가 흐려질 때, 그 흐려지는 시야를 지켜보는 순간이 두려운 것은 약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불면증은 뒤이어 친구를 데려왔다. 이자성은 약을 먹고 잠들다 문득 숨이 막혀 몸부림치며 깨어나곤 했다. 기억나지 않는 끔찍한 악몽들 중에서 목이라도 졸렸는지 자다가 숨 쉬기를 그만둔건지, 그는 괴롭게 눈을 떴고 그나마 눈을 떠서 살 수 있었다. 어쩌면 자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 무사히 눈을 뜬 아침이면 이자성은 '아, 하루 더 남았구나.'생각했다. 딱 하루 더. 그래서 하루밖에 안 남은 사람처럼 막 살 수 있었다. 덕분에 미친개 정청 옆에 같이 미친개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새벽이었던지, 초저녁일수도 있고. 비가 와서 창밖이 어두웠다. 일이 없어서 하루종일 집에 있던 날이었다. 때마침 똑 떨어진 약을 받으러 가기엔 날이 궂었다. 자성은 라면 한 봉지를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는 여즉 그 반지하의 방에서 살았다. 지갑이 터지도록 현금이 남아 돌기도 했지만 집을 사는 것은 책임감의 문제였다. 그는 축축한 반지하방으로 자신의 인생의 격을 결정했다. 소주 한 병에도 그는 잠이 오지 않았다. 먼지 낀 전구 한 알이 흐리게 보이도록 담배를 뻑뻑 피며 재미없는 드라마 재방송을 봤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삶인 사람들 말이야. 소주를 한 병 더 찾아 마시며 자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잠보다 먼저 속이 울렁거렸다. 목 너머에서 쓴 소주맛이 났다. 누구라도 부를까. 바닥에 내팽겨친 핸드폰을 주워드는데 전화를 걸 사람이 없었다. 누구를 부른단 말인가. 그는 집으로 사람을 잘 부르지 않았다. 혹시 모를 위험때문에. 잠깐 정청의 전화번호를 놓고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지만 이내 다시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자성은 담배를 냄비에 지져끈 뒤 아무렇게나 펴놓은 이불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자고 싶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이자성은 몸을 웅크렸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태아자세입니다. 언젠가의 아침프로그램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무릎에 머릴 붙인다.


씨발, 안정감은 지랄.


이불속 어둠이 이자성을 삼켰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자성은 그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날 발견해줄까. 보고를 못 받은 강팀장이 사람 시켜 보낼지도 모른다. 다행이네. 그건 다행이다. 의식이 가라앉는다. 의식이 뚝뚝 끊어졌다. 문득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명치에서부터, 갑자기 뭍에 밀려온 물고기처럼, 들이쉴 산소가 하나도 남지 않은 최후의 인간처럼. 자성은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죽을거야 아마.


야 이 씨빠빠야 눈 좀 떠보라고!


누군가 자성을 흔들었다. 억센 손이 멱살을 잡고 흔드는데 자성은 추수녘의 벼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 손길에 따라 어둠이 떨어져 나갔다. 가슴을 쥐어뜯던 숨을 멈추며 자성은 간신히 눈을 떴다. 태어나서 처음 빛을 본것처럼 크게. 첫 숨을 튼 것처럼 급하게 산소가 폐로 밀려 들었다.


정청의 짧은 머리가, 흔들리는 금목걸이가, 그을린 얼굴이 눈에 가득 찼다.


정청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벌어진 눈이 어느때보다 컸다. 이자성은 말을 더듬었다. 여긴 어쩐일인데요. 정청은 대답도 않고 이자성의 멱살을 쥔 채 이자성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아 이거 놔요.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쓰벌놈아. 느 뒤진 줄 알았잖아. 정청의 얼굴은 긴장으로 턱이 굳어 있었다. 그 순간의 진심을 이자성은 가까이서 잘 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서러워졌다. 아 뒈지긴 누가 뒤져, 멀쩡히 살아있는데!!! 이자성이 큰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목이 메어서 괜히 남은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남의 집엔 어쩐 일이에요, 아니 어떻게 들어왔어. 자성은 활짝 열린 현관문을 쳐다봤다. 문고리가 망가진게 틀림 없었다. 요란한 소리가 났을텐데 듣지 못했다. 정청이 방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비도 좆빠지게 쳐오는데 술이나 빨러 가자고 온거 왔제, 근데 와보니까 불은 켜져 있는디 하늘같은 형님 내다도 않보고 있는 꼴이 수상해서 혼자 손장난이라도 하나 하고 문 열어 제낀거 아녀. 근데 지 혼자 술처먹고 자빠졌네. 정청이 자성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 하지마!! 그들은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순식간에 죽음의 기운이 자성에게서 사라졌다. 평범하고 엉망인 그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쓰벌놈아, 불길하게 이불은 왜 대가리까지 덮어쓰고 처주무셨어요 향냄시 그립냐, 응? 청이가 자성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 놔요, 놓으라고. 정청은 순순히 손을 놨다가 다시 자성의 양쪽 귀를 잡아 당겼다. 정면으로 얼굴이 마주했다.


야 이 쓰벌놈아 혼자 뒈지면 안돼야. 응? 알아먹었냐고, 브라더 새끼야.


이자성은 그때쯤 '아 뒈지긴 누가 뒈져, 내가 형님보다 오래 오래 좋은 꼴 다보고 살건데.'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말이 저 밑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아 올라오지 않았다. 무거웠다. 가볍지 못하고. 그래서 그냥 고갤 끄덕였다. 바로 그 다음에 또 술 마시러 나가서 내장을 절이도록 술을 마셨지만. 


종종 정청은 이자성의 방에 찾아왔다. 언제나 시끄럽게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다.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자면, 더욱 큰 걱정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정청은 이자성이 숨을 잘 쉬는지 확인했다. 갑자기 켁 하고 죽어버릴까봐 불안했다. 이자성이 갑자기 여수바닥에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죽어버릴까봐 정청은 그게 걱정이 되었다.




10



느 요즘은 잘 자냐. 정청이 그렇게 물은 것은 이사회가 끝나고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서였다. 드물게 부하들은 타지 않고 둘만 올라탄 그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정청은 뜬금없이 물었다. 거 언제적 얘기요, 질리지도 않아? 이자성이 면박을 놓자 대신 때릴 석무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정청이 엘레베이터를 발로 찼다. 아오 이 아름다운 브라더새끼는 형님의 자애로움을 이렇게 개떡같이 취급하네. 이자성은 웃지도 않았다. 내 걱정 말고 형님이나 챙겨요.


그는 굳이, 서연이 밤마다 그를 깨운다는 것, 아직도 수면제를 먹는다는 것, 서연의 옆에서 그다지 잘 자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1층에서 내렸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말 할 사이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11



정청의 장례식에서 이자성은 문득, 그가 강을 건너고 빛을 따라가고 마침내 저승 문턱을 넘는 그 과정이 낯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문가 흉내를 내며 휘적휘적 걸어갈 모습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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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은 젊을 적에 한번 죽었다. 거의 죽었었다. 향 사이로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옆구리에 칼침을 맞은 채 여수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이름없는 변사체1로 세상에서 지워질 뻔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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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적인 지역다툼을 하던 칼날같은 공기 속에서 상대가 선택한 것은 꼭지따기였고, 때마침 이자성은 부모님 산소에 간다는 핑계로 강팀장을 만났다. 부모님 묘지는 여수에서 통영쪽으로 빠지는 공원묘지에 있었다. 잔디를 뜯으며 강팀장을 기다리는데 벨이 울렸다. 강팀장은 공원묘지 저 아래서 느릿느릿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늘 피곤했고 담배를 물고 있지 않을 때도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찌들어 보였다. 자성은 전화를 받았다. 큰형님이 당했어라. 비명같은 소리를 뒤로 한 채 이자성이 전화를 끊고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씨발. 그러나 밑에서 강팀장이 올라왔다. 강팀장의 처진 어깨를 보자 문득 이자성은, 그, 정청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떠올렸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그러나 그 일이 죽는다. 시나리오는 폐기된다. 이자성은 손을 씻고 경찰로 복직한다. 마킹대상이 죽은 것은 페널티는 되겠지만, 이 일 자체가 이자성 인생의 레드카드였다. 이 일을 그만두는 것 그 이상으로 이자성이 원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정청은 죽어도 좋았다.


죽어야 했다. 이자성은 부모님의 묘 앞에 있었다. 정청은 그대로 보낸다. 강팀장이 지척에 있었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너 어디 아프냐? 안색이 왜 그러냐? 강팀장이 이자성을 보고 물었다. 아니요, 그냥 좀 멀미가 나서요. 새끼, 그거 차 몇시간 타고 왔다고. 강팀장이 담배를 물었다. 필래? 이자성은 담배를 하나 받아 들었다. 한모금 깊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한 번 숨을 내쉬면서 시간이 가고 두번째 숨에서 다시 또 시간이 간다. 초조하리만큼 긴 시간 사실은 숨 두번 쉰 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요란한 벨 소리가 무덤 사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강팀장이 받으라고 눈치를 주었고 이자성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거의 울고 있었다. 형님 지금 큰 형님이. 거기까지 듣고 이자성은 전화를 끊었다. 담배를 꺾은 것과 강팀장의 어깨를 밀치고 뛰어달린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기억이 흐렸다. 난폭운전을 하면서 이자성은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다. 너무 많은 생각이 스쳐서 이자성은 멀미가 났다. 속이 울렁거렸다. 정청은 죽었을까. 아마 죽었을 것이다. 죽었겠지. 나는 단지 그걸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죽었으면 좋겠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모두가 이자성의 진심이어서 이자성은 뿌리부터 흔들리는 약해빠진 잡초같은 신세였다. 그는 전해들은 부두의 폐창고 셔터로 차를 갖다 박았고, 그 안에 벌어진 아비규환으로 뛰어들었다. 칼춤을 추는 무리들 사이에 정청은 없었다. 창고를 통과하기 까지 이자성은 몇 번의 피를 뒤집어 썼다. 창고 뒤편으로 이어진 핏자국을 따라 가자 정청이 있었다. 막 드럼통 속에 집어넣는 남자들과 함께. 마치 그가 도살당한 돼지나 소나 되는 것처럼. 이자성은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머리를 크게 얻어 맞았지만 용케 다른 남자의 명치를 걷어차고 뒤 이어 덤벼든 남자의 턱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러나 드럼통은 굴러가 부두 너머로 떨어졌다. 첨벙 하는 소리가 따귀를 맞을 때처럼 생생히 들렸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이정도면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그러나 이자성은 이미 여수의 차가운 바다물, 해조류가 떠다니는 어둠 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시멘트를 붓기 전의 드럼통은 느리지만 착실히 가라앉고 있었다. 통 밖으로 정청의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흔들리고 의식없는 팔이 이자성을 환영하듯 흔들렸다. 자성은 그 팔을 잡아 끄집어냈다. 잘 빠지지 않았다. 디딜 곳 없는 물 속에서 그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어깨를 잡아 빼고 몸통을 잡아 빼고 숨이 차 터져 죽기 직전까지 이자성은 정청을 끄집어냈다. 정작 그를 살린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바다로 뛰어든 부하들이 손을 더한 뒤에야 정청을 빼냈고 더불어 그쯤 의식을 잃은 자성 역시 부하들 손에 이끌려 육지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4


이자성이 눈을 뜬 것은 한시간뒤였다. 그는 병실이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놈이 큰형님은 수술중이셔라 하고 재빨리 전해주었다. 

다행이네. 나는 아니지만.


피를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밑에 놈들 전부 달려들어 수혈을 지원해도 부족할 판이었다. 상처는 실컷 벌어지고 바다물이 들어갔으며 몇초간 호흡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청은 살았다. 일단 숨은 붙어 있었다.



대수술을 거치고 중환자실에 이런 저런 기계를 부착한 채 누워있는 정청은 낯설었다. 언제나 괄괄하게 웃고 떠들며 천박하게 욕을 싸지르던 사내가 겨우 심장박동기의 일정한 기계음 하나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슬픈일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으나 정청은 여전히 창백했고 의식이 없었다. 중환자실 면회는 아침 8시와 저녁 7시 10분만 허용되었다. 이자성은 아침저녁으로 10분씩 정청을 들여다봤다. 기계음과 산소호흡기에 연결된 펌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리만이 살아있었다.


강팀장은 화를 냈다. 이자성을 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때마침 그 이야기를 전한 대상이 이자성이었다. 그 새끼 죽으면 안 돼. 우리 몇년간 수술한거 말짱 도루묵된다고, 알아들어?? 저승사자 배때지에 칼침을 놓더라도 정청 그 새끼는 살려놓으라고! 아침 8시, 저녁 7시. 이자성은 중환자실에 앉아 정청을 보는 10분에 하루 중 가장 많은 생각을 했다. 살아 날거요, 형님? 아님 날 위해 그냥 죽어줄거요.



15



일주일이 지났다. 뇌파 검사를 했고 또 이름 모를 복잡한 여러 검사를 했다. 이자성은 이제 아침 8시에 면회를 하고 주욱 병원 복도를 지키다가 저녁 7시에 다시 면회를 했다. 그리고 다시 복도에 앉았다. 정청이 깨어나기를, 혹은 죽어버리기를 기다리며.


말을 걸면 듣는다데요. 이자성은 우두커니 서서 정청을 내려다 보며 말을 했다. 진짜유? 진짜 내 말이 들려? 펌프만 왔다갔다했다. 나는 형님처럼 잘 자는 사람 첨 봤수. 정말 부러워 죽겠네. 잠이 부족한 건 난데 왜 댁이 처자냐고. 누구 놀리나. 정청의 험한 손에 꽂힌 링겔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이자성은 그걸 보며 정청의 파마머리나 싸구려 시계등에 대한 험담을 몇 마디 더 했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말은 사그러들었다. 면회시간이 끝나갔다. 이자성은 정청의 손등 위에 손가락을 겹쳤다. 체온이 따뜻했다. 정청은 손발이 늘 뜨거웠다. 속에서 열불이 나서 그런다며 맨날 펄펄 뛰었다. 자성은 여름에도 손끝이 찼다. 느 몸이 그래서 어디 사람구실하겄냐. 정청이 낄낄 웃으며 이자성 목덜미에 손을 집어 넣을 때면 그 뜨끈함에 놀라며 빼라고 난리를 쳤다. 뜨끈함은 낙인처럼 오래 남았다. 정청은 어떻게 생각할까. 서늘해서 얼음이 묻은 것 같다고 할까. 아니다. 정청은, 정청은 돌려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시체 손도 아니고 느 어디 사람 구실 하겄냐.



산소호흡기 안에서 터져 나온 말은 구겨져서 잘 안들렸지만 정청은 그렇게 말했다.




이자성은 간호사를 부르고 의사를 불렀다. 사람들을 피해 이자성은 벽으로 물러났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정청을 살려내는 광경을 지켜봤다. 동시에 제 인생이 다시 여수 바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광경을 지켜봤다.


일반적인 조치가 끝난 뒤에 이자성은 의료진을 따라 중환자실을 나가려 했다. 절대주의요망. 팻말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침대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플라스틱 물컵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서 이자성 발치까지 굴러왔다. 느 이 씨빨놈이 형님한테 인사도 안 허고 등을 돌려야. 이자성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냥 이 곳을 나가서 복도로 간 뒤 조직 전체에 알려야 한다. 강팀장에게도 알려야 했다. 살았으니 되었다. 면회 시간도 끝났다. 그러나 물컵 하나가 더 날아와 정확히 이자성의 등판을 때리고 떨어졌을 때 결국 이자성은 몸을 뒤로 돌렸다. 산소호흡기를 뗀 정청이 그제야 이자성을 보며 씩 웃었다. 웃다가 상처가 아픈지 허릴 숙였다가 손짓으로 오라고 이자성을 불렀다. 이자성이 다가오자 정청은 제 다리를 조금 비키고 침대에 빈자리를 만들어 두들겼다. 이자성은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수척한 정청은 뵈기 싫었다. 


내 없는동안 브라더 혼자 고생했제 수고혔어. 그 염통부터 대가리까지 갈라버릴 새끼들은 내가 여기서 나가면 싹 다 조사버릴탱께, 걱정하지마러야. 느 설마 이 형님 죽을까봐 걱정한 건 아니제? 이자성은 우물거렸다. 걱정은 뭔 걱정. 질긴 목숨이 어디가나? 정청이 껄껄 웃었다. 씨발놈 걱정했으면서. 정청이 이자성의 뺨을 툭 쳤다. 설날이나 푹신한 털을 가진 강아지, 햇볕 따위가 생각나는 손짓이었다. 


그 손가락이 이자성의 뺨을 미는 순간, 손의 뜨끈함이 뺨으로 옮겨붙는 순간, 이자성은 그만 눈물이 터졌다.


미안해요 형님 미안해. 이자성은 울었다. 나는 당신이 살아날까봐 걱정했고 죽기를 바랐는데, 당신은 따뜻한 손을 내게 던진다. 그보다 더 이자성 스스로를 쓰레기로 만드는 순간은 없다.


정청은 당황하여 야 씨발놈아 왜 처울고 지랄이여 나 안죽었어 재수털리게 왜 우니 하며 횡설수설했다. 너무 당황하여 간호사까지 부를 참이었다. 야야 걱정마러. 우리 브라더는 이 형님만 믿으면 되어야. 우는 자성의 머리 위에 정청의 손이 얹혔다. 정청이 죽으면 이자성은 자신의 인생으로 돌아간다.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갈 굴을 찾은 엘리스처럼. 그러나 그 인생은 이 험하고 따뜻한 악인의 손이 없는 인생 아니던가. 이자성은 한참 울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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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은 이자성에게 라이터를 사줬다. 서울에 입성했을 때, 정청은 이자성에게 라이터를 하나 사줬다. 느 라이터 어디 꺼내나 놓겠냐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말이여, 횟집이 뭐여 횟집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며 테이블 위로 쓱 밀어 준 것은 소위 명품 라이터였다. 이거 또 중국서 사왔구만. 이자성으 라이터를 집어들며 고갤 젓자 정청이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쓰벌놈아 이거 진짜 개명품이그든? 그러나 곧 매같은 이자성의 눈에 라이터 모서리의 금이 보였다. 이봐 이봐. 정청은 대충 눈치를 살피다가 이자성의 손에서 라이터를 낚아채더니 그걸 쥔 채 뒤에 섰던 부하녀석의 대가리를 갈겼다. 야이 씨발놈아 티 안나는 걸로 가져!오라고!했어!안혔어! 거 형님은 어떻게 맨날 짝퉁만 들고 다니쇼. 이자성이 의자를 옆으로 돌리며 혀를 차자 정청은 흥분한 채 테이블을 내리쳤다. 브라더 우리 사이에 중대한 오해가 있는것 같은디, 이건 진퉁이여 진퉁이!다만 쪼까 디스카운트해서 산거랑께 씨빨놈아 니가 말 좀 혀봐!!!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부하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줄줄이 읊었다. 매장에 진열된 하자있는 제품을 좀 싸게 구했다고. 정청은 어깨를 빙빙 돌렸다. 


느 이제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밑에 부리는 새끼들도 늘어날 것인디 언제까지 횟집 라이터 들고 다니면서 뻐끔거리고 다닐거여, 가오 죽게.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가서 정청의 동생이라 안하겄냐. 정청이 박자에 맞춰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그럼 형님은요. 이자성이 기가 차다는 듯 물었더니 정청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 기회에 내것도 하나 장만 했으야. 부하가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놨다. 정청이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데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다이아가 번쩍이는 금빛 라이터였다. 


..............짭이네.


이자성의 칼같은 말 한마디에 뒤에 서있던 부하들의 머리통이 죄다 깨져나간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런 멍멍이개새끼들아 티 안 난다며! 안난다며! 죽여줍니다잉 형님은 얼어뒈질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 적당히 좀 해요 애들이 무슨 죄야. 형님 취향때문에 개고생하는 애들 데려다 놓고. 이자성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정청은 한참을 더 분노를 토했을 것이다. 그럼 형님이 이거 써요. 이자성이 제 손에 있는 라이터를 정청 쪽으로 밀었다. 어어 이게 뭔 짓이여 시방? 형님이 주는 귀한 것을 지금 니가 홀대허야? 이자성은 고갤 저었다. 그게 아니고, 나 담배 끊었수다. 정청은 와하하 웃었다. 아 이 아름다운 개새끼, 농담 한번 기똥차네. 농담 아니거든요. 정청은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임마 안돼 다시 펴부러!!!


야이 씨빠빠야 내가 큰 맘 먹고 선물을 주는디 니가 담배를 끊어야? 느 담배 끊을라믄 나랑 인연부터 끊어야 할 것이여


아 뭐래는거야, 또. 이자성은 손을 휘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브라더 느 어디가 아직 말 안 끝났어!! 정청이 길길이 뛰는 바람에 이자성은 결국 라이터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침대 옆에 잘 모셔놨다. 자기 전에 한번씩 찰칵찰칵 켜보면서. 


그 다음 해 1월 1일에 이자성은 정청에게 진짜 다이아가 박힌 라이터를 선물했다. 진짜 명품으로.




17


이자성은 갑작스럽게 결혼을 했다. 누가 떠밀어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재빨리 해치워버렸다. 우연히 만난 여자는 참했고 착했다. 흠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여자였다. 강과장이-세월에 따라 그도 승진했다- 지나가는 말로 자릴 잡으려면 결혼이 제일이라고 던진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서연을 만난지 한달만에 그는 결혼해버렸다. 이자성은 금요일 아침일찍 청첩장을 돌렸다. 거의 모든 조직원들의 손에 하얗고 단정한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 중국으로 출장간 정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이가 그걸 받았다. 정청이 돌아온 것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한국땅을 밟자마자 정청은 이자성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결혼? 정청은 평소의 요란함을 뺀 채 되물었다. 자성이가 결혼을 허야? 부하가 제가 받은 청첩장을 정청에게 내밀었다. 네, 다다음주랍니다 형님.


정청은 부하가 두 손 들어 바치는 청첩장을 쳐다봤다 하얗고 빳빳한 종이였다. 손으로 만지면 시커멓게 지문이 남을 것 같은 물건이었다. 그거 누구 앞으로 받은거여? / 네? 아 제 이름으로 왔습니다 / 내 물건은? / 안 왔는데요 정청은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 청첩장을 쳐다봤다. 저리 치워야. 정청이 손짓으로 훠이훠이 물렸다. 내것은 호랑말코같은 새끼가 직접 가져올텐께.


정청의 말은 맞았다. 일요일, 이자성이 정청을 찾아왔다. 형님, 낚시 좀 갑시다. 정청은 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끄며 느물느물 웃었다. 이 겨울에 뭔놈의 낚시여 이 미친늠아. 그러나 정청은 군말없이 따라 나섰다.


낚시터까지 가는 길은 둘 뿐이었다. 이자성이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교외로 나가는 모든 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자성과 정청은 차 안에 앉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유행가나 크게 틀어놨다. 정청이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담배를 뻑뻑 필 때 이자성은 운전대를 잡은 채 말이 없었다. 정청은 괘의치 않았다.



호수는 크고 넓었다. 바다처럼. 그러나 이자성과 정청은 바다를 보며 산 세월이 길어서 어줍잖은 것에 바다라는 말을 붙여주지 않았다. 산등성이 사이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만들어진 모양인 호수는 점점이 낚시용 민박집이 떠다녔다. 섬들처럼 점점이. 아따 바람 좋네. 코를 한번 훌쩍이며 정청이 말했고 이자성은 픽 웃으며 차에서 낚시가방을 내렸다. 낚시터를 운영하는 주인이 모터보트를 타고 다가왔다. 출렁이는 보트 위에 올라타자 배는 호수를 가로질렀다. 산이 스쳤다. 가장 먼 부표까지는 꽤 걸렸다. 미리 주인에게 말을 해놓은 것인지, 부표 위 민박에는 라면, 쌀 따위와 각종 도구들, 떡밥들이 준비 되어 있었다. 덜렁 몸만 가지고 온 정청은 크게 놀라지도 않고 라면멀티팩을 집어들며 쓰벌 난 삼양라면 아니면 안 먹는디야 하고 투덜거렸다. 이자성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떡밥을 물에 개서 주무르고 낚시대를 펼쳐 줄감기를 확인했다. 그동안 정청은 낚시의자에 앉아 담배연기로 링을 만들며 놀았다. 호숫가는 바람이 매서웠다.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채 정청은 꽁초를 호수에 버렸다. 아, 거 호수에 버리지 말라니까요. 이자성이 준비를 끝냈는지 옆에 놓인 낚시의자에 앉으며 잔소리를 했다. 정청은 낄낄 웃었다. 지랄을 하세요, 지랄을. 


이자성이 정청에게 낚시대를 넘겨 줬다. 정청은 낚시대를 한번 뒤로 휘었다가 앞으로 던졌다. 낚시바늘이 멀리 날아가 천천히 잠기고 찌가 곧게 서서 위치를 알려줬다. 이자성도 낚시대를 던졌다. 낚시대를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니 남은 것은 침묵과 바람뿐이었다. 정청은 두터운 산악가용 패딩속으로 깊숙이 고갤 묻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경종처럼 흔들렸다. 소리가 날 것같이 곱슬곱슬 말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자성은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찌가 아니고, 호수를. 가끔 바다처럼 파도가 쳤다.


참 유난떤다 싶었다. 정청은 패딩 속으로 파고든 고개만큼 그 말도 속으로 끌어들였다. 장가 한번 가는게 뭐이가 대단한 일이라고. 형님 나 장가갑니다잉 한 마디 하는 것을 꾸역꾸역 집어 삼켜가지고 여까지 오게 만들고 지랄이여, 지랄이. 




찌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아직 해는 하늘에 박혀 있었고 흐린 물 위로 바람만 왔다갔다했다. 이자성은 찌를 쳐다봤다. 낚시는 호흡을 재고 순간을 낚는 일이다. 그러나 이자성은 다른 것을 재고 있었다. 말 한 마디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첫 마디가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울음처럼, 목이 꽉 막히게 하는 첫 마디였다. 지금 물에 빠진다면 이자성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천근보다 무거웠다. 그가 숨을 훅 하고 불고 훅 하고 들이쉬었다.


지금이다. 이자성이 생각했다.

지금이다. 정청이 생각했다.


형님 나 결혼해요. 이자성이 말을 던졌다. 파문은 호수 위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공기 위로 퍼졌다. 정청은 그 말이 주는 묵직함을 한참 곱씹었다. 마음이 일렁거린다. 


별안간 정청이 크게 웃었다. 낄낄거리면서 이자성의 등을 두드렸다. 야이 호로새끼가 형님보다 먼저 장개를 가야? 느는 장유유서도 모르냐, 장유유서. 회칼잡는 것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디 말이여, 잉? 이자성은 조금 웃었다. 정청은 이자성의 옆 얼굴을 쳐다봤다. 처음 봤을때보다는 세월이 들었지만 여전히 대리석마냥 매끈한 흰 얼굴의 옆선은, 묘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좋으냐. 정청이 다시 고개를 찌로 돌렸다. 여전히 침묵하는 찌 위로 시선을 던진다. 목적어는 없었지만 이자성은 늘 정청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좋아? 너는 좋으냐. 이자성은 찌에게 물었다. 좋은건가, 이게? 그래도 해야할 대답은 잘 알고 있었다. 네, 좋아요. 정청은 코를 훌쩍거렸다. 찬 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그래, 좋아야제. 좋은 것이 좋은 거여. 좋아야 잘 살지. 정청은 그 말을 되풀이 하며 고갤 끄덕거렸다. 아따 쓰벌 춥다. 에라이 쓰벌놈의 괴기들은 죄다 뒤져부렀나 어째 한 마리도 반응이 없어야. 정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좀 누워있을랑께, 찌 좀 잘 봐야, 알겄제. 정청은 낚시에 흥미가 없었다. 여수에서 배낚시 나갔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준 것은 모두 이자성을 위한 것임을, 이자성도 잘 알았다. 


형님. 


그래서 그랬는지, 이자성은 자신의 옆 자리 의자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울컥하니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정청은 뒤뚱뒤뚱 뒤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시여. 정청이 그를 돌아봤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굳은 뺨은 삐딱했다. 그래도 눈만은 따뜻했다. 뜨거운 눈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도무지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세야 할 타이밍은 하나가 아니었음을, 이자성은 그제야 알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안 돼. 이자성은 그 중요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차돌보다 무겁고, 찬밥보다 서러운 그 무언가를 어렵게 끄집어 내려 했다. 


나는, 형님, 나는요.

알어.


정청은 툭 뱉었다. 입안에 씹던 껌을 뱉듯이, 쉽게. 이자성은 말을 멈췄고 둘의 시선 위로 바람이 누웠다. 정청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알어, 새끼야. 말 안혀도 된다고. 정청은 웃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자한 표정이라는 말이 맞았다. 열반에 든 부처처럼, 그는 자상하게 말했다. 됐어야, 그만 괴롭히더라고, 난 괜찮응께. 그리고 뒤뚱뒤뚱 마저 걸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자성은 빈 의자와 함께 남겨졌다. 그보다 더한 단절은 없을 것이다. 그 옆에 주경이 앉고 다른 가족이 생긴다 한들, 이 호수보다 넓은 고독, 호수보다 깊은 외로움은 메울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이자성이 절망한 것은, 그마저 옆에 있을 사람도 없이 고스란히 이 감정을 나누고 있을 정청의 존재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시발, 허세는. 이자성은 찌를 노려봤다.


찌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수의 모든 물고기가 정말 죽기라도 한 것처럼.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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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더 느 기억하겄냐 너랑 내랑 거의 목 따일 뻔 한 일 기억 나더냐고. 나는 아주 쓰리디입체영상으로 기억나야. 그때 우리 겨우 살아서 기나와서 꼴사납게 버스 정류장에서 첫차기다렸는디, 기억나야? 날은 춥지 사방은 시커멓지 눈앞은 어질어질해서 영 컴컴한데 몸이 막 간질병난거맹큼 덜덜덜 떨려가지고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잖어 기억나야? 지도 추웠을 텐디, 어디 지 입던, 똑같이 넝마가 된 점퍼쪼가리를 느가 나한테 둘러주는데, 거절도 못했제 그래서 내가 뭐라했더라 아 쓰벌 더럽게 아프네였나 더럽게 춥네였나. 이건 좀 헷갈려야. 아무튼 그 말을 뱉자마자 느가 내 어깨에 이렇게 팔을 두르더니 꽉 끌어안는거 아니겄어? 난 그때 오메 쓰벌 미친놈 따뜻도 하다 라고생각했는데. 느 심장소리가 쿵쿵 뛰는디 이야 그게 소리가 아니여. 박자랑 진동이 쿵쿵 전해져 오는데 그 지랄난 새벽에 그 감각이 나한테는 너무 찌인하게 다가와서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이 나믄 숨이 콱 막혀야. 브라더 느는 그렇게 뜨거운 심장을 가져서 나를 녹였구만.



씨발놈아 그런데 왜 날 배신했냐 옆에 고작 느 하나 남게 해놓고 왜 나를 종이인형으로 만들었냐고 이 개새끼야. 이 브라더야. 자성아. 그냥 두고 가버리던지 뒈지게 왜 살아남게 힘을 줘버렸냐 이 개새끼야




19


이자성 지갑 안에는 100위안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있다. 정청이 부적이랍시고 넣어준 100위안이었는데, 지갑이 점점 고급품으로 바뀔때도 꼬깃한 모양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


정청은 설을 챙겨 본 기억이 없다. 추석도 마찬가지로. 빨간 날이 여럿붙어있어서 좋다고 시시덕거린 것 외에 정청에게 설이나 추석은 거리의 식당들이 문을 닫는 성가신 날의 연속이었다. 다른 날은 그럭저럭 떡영화나보고 라면 좀 끓여먹고 운 좋게 문 연 식당에서 소주도 빨 수 있지만 설날 당일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정청은 새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대신 하루종일 누워 자는 걸로 보내곤 했다. 머리를 베개 아래로 밀어넣고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양 자다보면 하루가 갔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결린 허리와 어깨를 두드리며 일어날쯤엔 다시 익숙한 생활이 반복되었다. 딱히 외롭지도 않았고 서글프지도 않았다. 뭔날이라고 지랄들이여 지랄이. TV화면 가득 채운 자동차들의 행렬, 민족의 대이동을 볼 때면, 정청은 배를 북북 긁으며 혀를 찼다.



어김없이 설이 가까워 졌다. 대부분 고만고만하게 여수 근처에 고향집이 있는 동생들의 들뜬 얼굴을 보며 담배를 얻어 피는데 이자성이 담배를 줬다. 둘은 테이블 귀퉁이에서 담배를 태웠다. 할 말이 없었으니까. 느는 어디 안가야? 청이가 담배를 그냥 테이블에 지져 끄며 물었다. 지나가던 종업원아줌마가 보고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정청은 넉살좋게 술 한 병 더 달라고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갈 데가 있어야 가죠. 이자성이 별 걸 다 묻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지같이 불쌍한 새끼, 남들 다 가는 곳이 워째 갈 곳이 없다냐. 정청이 낄낄 웃으며 새 술병을 땄다. 이자성이 바닥으로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는 형님은 어디 가슈? 정청이 이자성의 잔을 채웠다. 씨빨노마, 느한티 한 야그 아녀. 그리고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나헌티 한 거제. 이자성은 같이 웃었고 둘은 술잔을 원샷했다.


고향집간다는 동생들 주머니에 돈 좀 쥐어주고 술을 잔뜩 사서 집에 온 정청은 명절 맞을 준비를 했다. 술이 떡이 된 상태에서도 깨끗이 씻고 이불 펴고 그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고 따숩다. 정청은 습관적으로 머릴 베개 밑으로 넣었다. 아득하게 폭탄터지는 소리가 났다. 쓰벌 전쟁났는갑네. 정청은 베개를 붙잡고 생각했다. 숙취는 아직 정청의 명치 언저리에 남아 바늘처럼 속을 찔렀다. 머리는 젖은 솜처럼 처지는데 포탄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자다가 뒤지는거 아녀? 그래서 정청은 베개 밑에서 머릴 빼냈다. 폭탄소리는 점점 더 명쾌해졌는데 잘 들어보니 폭탄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회칼이 집에 있던가. 정청은 이불 위를 기어 장농문을 열고 그 안에 놓인 회칼하나를 집어 들었다. 칼을 신발장 위에 놓은 채 정청은 길게 하품한 뒤 거 누구다냐, 하고 물었다. 난 또 죽은 줄 알았네, 안에 있음 빨리 문이나 열어요. 적당히 짜증이 섞인 반듯한 목소리가 언뜻 반가워서 정청은 문을 열었다. 이자성이 서 있었다.


느는 여기 워쩐일이다냐. 정청이 뒤로 물러나며 들어오는 이자성에게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아 거 신발장 위에 이런 것 좀 놓지 마요. 이자성이 들어오다 신발장 위의 회칼을 보고 잔소리를 해서, 정청은 그걸 대충 신발장 안에 넣었다. 주인도 아닌 것이 먼저 성큼성큼 들어가는데 정청은 그 등을 쫓아갔다. 이자성이 방안을 한번 들여다 보더니 들어가지도 않았다. 형님 내가 장담하는데, 이렇게 살다 골병으로 한번에 훅간다니까. 정청은 이자성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자성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에만 온통 신경이 쏠렸다. 뭐 사왔다냐, 잉? 정청이 킁킁거리자 왠지 위압감을 느낀 이자성이 봉투를 들어올렸다. 에헤이, 좀 차려놓고 먹읍시다. 이자성은 부엌에서 접시를 찾다가, 포기했다. 하도 정청이 귀찮게 따라 붙어서, 이자성은 그냥 포기하고 한쪽 다리가 부러진 상을 펴고 그 위에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놨다. 칼로 봉투를 찢어서 펼치니 동태전, 동그랑땡, 산적꼬치, 버섯전 등 기름 냄새 물씬 나는 전들이 굴러다녔다. 


안주 좀 사왔어요. 이자성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집은 개판인데 냉장고안의 소주는 착실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청은 상 앞에 앉아서 멀뚱히 전조각들을 쳐다봤다. 느가 부쳐왔다냐, 수고스럽게 므하러. 


아 내가 미쳤어요? 당연히 사왔지. 정청은 웃었다. 나도 알아 씨빨노마 그냥 함 말해봤다 이 씨빨노마.


근데 지금 몇시냐. 11시요. 밤? 아침이죠. 어쩐지 속이 존내 쓰리더라.



이자성이 정청의 잔에 술을 따라 주는데 정청이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느끼해서 싫어요? 아니 나가 설음식을 첨 먹어봐서 그라제. 이자성은 잠깐 말을 골랐다. 아 동태전이 다 똑같지 뭔 또 설음식이야, 그냥 사온거라니까요. 오야, 알았어, 알았어, 새살거리지 말어야. 정청은 잔을 들어올렸다. 자자자, 브라더 건배하자잉. 이자성이 잔을 들어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슈, 형님. 응, 너도 새해 복 좆나 많이 받아 처먹어라잉. 둘은 잔을 비운 뒤 동태전을 하나 집어먹었다.



21



푹신하고 무거운 회장의 의자에 앉는 순간, 이자성은 몸이 안으로 꺼져버리는 감각을 느꼈다. 진창속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들어가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주경은 갑자기 떠났다. 어느날 아침 여느때처럼 마주 앉아 아침을 먹다가 그녀가 울음을 터뜨린 순간, 이자성은 오랫동안 걸어온 살얼음판의 실금이 터져나가는 소릴 들었다. 오빠 미안해요 나 더 이상은 안되겠어요. 자성은 뭐가 안 되는거냐고 묻지 않았다.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경이 받겠다고도 안했지만, 자성은 그녀에게 엄청난 위자료를 주고 혼자 살 집과 차도 따로 사줬다. 이자성는 거실소파에 앉아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주경은 비쩍 마른 어깨를 하고 있었다. 오빠. 이자성은 담뱃재를 털며 응 하고 대답했다. 주경은 그를 잠깐 돌아봤다. 건강 좀 챙겨요. 간신히 그 말만 하고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이자성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무서운 적막이 그와 어울렸다. 


마침내 이자성은 멋진 신세계에서 유일하게 고독한,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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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이자성은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혔던 불면증은 주경처럼 어느날 갑자기 떠났다. 약없이도 10시간씩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꿨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엉망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많은 이를 만났다. 꿈은 지독해서 잠에서 깨고난 뒤 이자성은 그 꿈이 굉장했지, 하며 기억해내려했지만 지독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꿈만이 희미하게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은, 인간 이자성의 조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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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결혼식은 단촐했다. 외부인사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식구'끼리만 하고 싶다는 이자성의 뜻에 따라서. 신부쪽 친지가 별로 없어 하객 수 맞추는 구색인가보다 하고 정청은 생각했다. 신부쪽은 골골한 아버지 한 명만 앉아 있었다. 신랑 측 자리는 비어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이 땅에 사는 화교가 으레 그렇듯 친척도 없던 터라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었다. 신랑입장 차례가 되어 이자성이 식장에 들어설 때, 이자성은 제 아버지 자리에 앉아 박수를 치고 있는 정청을 보았다. 제가 가진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앉아 머리를 말끔하게 넘기고 크게 박수를 치는 정청은 이제까지 살면서 본 중에 제일 말끔한 차림이었다.


정청은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정청이 정말 이자성의 큰 형이나 사촌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결혼식하고 피로연에서 그럴싸하게 노래 한곡조를 뽑아내는 걸 보면, 정말이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이자성은,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 정청과 악수하며 그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웃는 것을 보고 그날의 모든 것을 후회했다. 결혼식 자체가 잘못되었다. 아야 잘 다녀와야. 여는 걱정말고 떡이나 존내쳐서 떡두꺼비같은 조카 데려오더라고, 알았제? 정청이 새 신랑을 끌어당겨 안았다. 아 거 씨빨놈이 형님보다 먼저 장개를 가다니, 천지가 뒤집힐 일 아니냐? 아무리 형님이 좆같어도 말이여, 잉? 이자성은 말이 없었다. 정청이 손으로 이자성의 등을 두드렸다. 같은 바닥을 굴러도, 같은 피를 뒤집어 쓰고 같은 죄를 뭍혀도, 이자성이는 언제나 정청과는 같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때를 묻혀도 마냥 흰 백자마냥, 이자성은 청이에게 그런 존재였다. 깨질까봐 조심조심 묵혀둔 귀한 가보. 그랴서 그려, 아까버서 그려. 정청은 이제 놔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 시간은 정해져 있고, 신부는 차에서 그의 새신랑을 기다린다. 정청은 그 반듯한 어깨를 꽉 안았다. 잘 살아라잉. 자성아 넌 잘 살것이여. 꼭 잘 살아야헌다. 개새끼야.


잘 살게요. 이자성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잘 산다고. 이자성의 눈이 휘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바다냄새가 났다. 물비린내, 생선 비늘 따위가 떠올랐다. 그때의 이자성은 머리를 복실하게 볶았고 비실거렸지만 강단있었다. 그때의 정청은 머리를 짧게 밀었고 현란한 꽃남방을 좋아했으며 똑같이 입이 걸었다. 그리고 지금 우린 어디에 서 있던가. 우는 대신 정청이 새끼, 하며 얼굴 위에 손을 툭 올렸다. 니 색시 눈알 빠지겄다 가봐 새끼야. 이자성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자성의 뺨이 정청의 손바닥에 미지근한 체온만 남기고 서서히 떨어졌다. 부하들이 요란하게 축하해주는 소리와 함께 이자성은 차에 탔고 차는 배기가스만 미련맞게 남기고 떠나버렸다. 정청은 두 손을 주머니에 우겨넣다.


저들끼리 떠들고 잡일을 하는 부하들을 돌아봤다. 아야, 재헌아, 담배 좀 줘봐라. 재헌이 잽싸게 담배를 정청에게 건너주고 불을 붙여줬다. 느 오늘 뭐허냐. 재헌이 눈을 껌뻑거렸다. 형님 모시고 다니죠. 느 그럼 나랑. 거기까지 말하고 정청은 볼이 패이도록 담배를 깊게 빨았다. 쓰벌놈 담배도 좆같이 맛없는 걸로 피네, 됐어인마 가서 일이나 혀라. 정청이 재헌의 뒷통수를 치며 보내고 혼자 주차장에 서서 담배를 태웠다. 씨빨, 날씨도 존나게 좋구마잉. 정청은 품에서 선그라스를 꺼내썼다.


몇 달 뒤 정청도 결혼을 했다. 정청이 자주 다니던 술집 마담이었다. 얼마 못가 이혼할 때까지 이자성이 그녀와 만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다시 이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혼인신고를 하는 건지 마는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안 했으리라. 이자성은 한번도 형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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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 건설은 상해의 큰 공사건을 맡았다. 정청이 따낸 일이었고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이걸 더 잘 포장해서 이사회에서 브리핑하는 것은 고스란히 이자성 몫이었다. 느 좆같은 얼굴이 잘 먹히잖어하며 정청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이자성은 거 일하기 싫으믄 관두쇼 하며 투덜거렸지만, 브리핑을 준비했다. 여전한 불면의 밤과 까마득한 스트레스 속에서 이자성은 지쳐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서울에 올라온 뒤부터 지쳐있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피로와 불안은 이자성의 그림자 속에 녹아있었다. 이사회 당일 이자성은 약간 피곤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이미 강과장 몫의 리포트도 올렸고 브리핑도 늘 정청 대신에 하던 일이니 어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상 스크린 옆에 서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건물이 기우는 느낌이었다. 피사의 사탑마냥. 창문쪽으로 기우는 느낌에 자성은 옆에 있는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모두가 가만히 있었다. 서류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피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제자리에 앉아 이자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자성은 문득 사람은 왜 눈이 두개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당 두개씩 형형히 빛나는 안광들이 무수히 많이 뜬 채로 이자성을 쳐다봤다. 모두가 이자성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골드문 건설의 프로젝트는. 이자성은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만 숨이 턱 막혔다는 것에 있다. 숨이 막히면 공기가 목으로 못 들어가고 다시 뱉을 숨도 없으니 소리가 안나온다. 이자성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자세하게 머릿속에 그렸다. 그만큼 그에겐 긴 시간이었다. 실제로 자리에 앉은 이사들이 본 것은 잠시 말을 멈춘 영업이사 이자성뿐이었지만, 그 앞에 서 숨이 막힌 이자성은 경찰 이자성이었다. 주춤하는 사이 건물이 더 기울었다. 아예 빙글빙글 도는 세탁기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진땀이 흘렀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수채화처럼 색으로 뭉뚱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눈빛들, 형형하게 번쩍이는 두 개의 수많은 눈들은 선명하게 이자성을 노려봤다. 사람들앞에서 장기를 적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왜 시작을 안하지? 책상을 짚은 손이 하얗게 일어났지만, 미끄러졌다. 추락한다. 바닥으로. 이자성은 몸이 기우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아따 서프라이즈허요, 우리 이 이사가 나를 소개하는디 자꾸 뜸을 들이는구만. 그러나 이자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서 있었고 정청이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수고혔어, 들어가 앉어, 정청의 손에 자성의 어깨를 꽉 눌렀다. 브리핑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정청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격식있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정청은 특유의 넉살을 부리면서 브리핑을 끝냈고 그것에 대해 딱히 트집잡을 사람은 없었다. 이중구가 이사회 끝에 아주 재미난 쇼, 잘봤수다? 하며 웃는 낯으로 나간 걸보니 내가 발표를 개말아드셨구나 하고 정청은 생각했다. 이자성은 아직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 괜찮으냐? 부하들과 엘레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정청이 물었다. 어디 아프냐. 너 지금 구신 본 사람같어.


아 일없어요. 괜찮아요. 거 내가 하면 될 일을 왜 공연히 나섰어요. 저 늙은이들이 뒤에서 딴 소리 안하겠소? 정청은 눈을 꿈뻑거렸다. 너 선채로 졸도할뻔했어야. 정청은 그렇게 말하려다, 관두었다. 식구들끼리라지만 말이 퍼져서 좋을 건 없었다. 



이틀 뒤에 정청이 이자성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자성은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주경이 문을 열자, 정청이 선그라스를 벗으며 이를 보이고 웃었다. 제수씨 몸은 건강허요? 볼때마다 이뻐지는구마. 주경이 웃으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열린 문으로 검은 정장입은 사내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날랐다. 주경이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봤다. 현관 앞에 착착 쌓인 박스를 보며 이건 뭔가요, 아주버님? 이라고 묻자 간만에 들린 자성의 집을 구경하던 정청이 어깰 으쓱했다. 별건 아이고 몸에 좋은게 들어와서 좀 나눠주려고잉. 자성이 그 새끼가 얼굴만 허연해서 영 힘은 못쓰잖소. 주경이 보기에, 박스들은 결코 나눠주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복, 한우, 홍삼, 그 옆엔 한약박스도 있었다. 요즘 피곤해뵈서 영 일하는게 신통치가 않허요. 제수씨가잘 챙겨주쇼. 난 가요. 주경이 고맙다고 제대로 인사하기도 전에 정청은 우르르 섰던 부하들의 뒷통수를 때리며 그 곳에서 나갔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이자성은 음식을 보관하느라 낑낑거리는 주경과 부엌을 가득 채운 건강식품을 보며 넋이 나갔다.


정청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걸려온 이자성의 전화를 보며 혀를 찼다. 또 잔소리 겁나게 하게 생겼네. 정청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시요. 대답이 없었다. 여보셔요, 거기 좆같은 브라더가 건 전화 아닌가요? 이자성은 간신히 한마디 했다. 형님. 불렀으면 말을 해 새끼야 술 마시느라 존나 바쁜데. 정청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자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있다가 고맙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새끼 싱겁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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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는 가끔 청이랑 같이 잔다. 섹스를 한다는게 아니라 정말 그냥 잔다.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는 유일한 잠자리였다. 청이는 옆에서 자는 자성이를 두고 영화도 보고 야한 잡지도 보고 저도 잠들거나 그냥 그 얼굴을 멀거니 봤다. 천하의 골드문 전무이사 사무실 소파에 누워 퍼질러 자는 놈도 이자성뿐일 거라고 생각하며, 정청은 자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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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느 일끝나고 뭐하냐. 해장국을 퍼먹다 말고 던진 말에 자성은 고갤 저었다. 아 형님이랑 영화보러 안 가요. 다 큰 남자가 의자 붙잡고 울고있으니 내가 더 쪽팔린단말요. 정청은 깍두기를 씹다말고 숟가락을 휘저었다. 야이씨부럴새끼야, 영화 보러가는거 아니거든? 이자성이 청의 숟가락을 피해 앉으며 투덜거렸다. 아 술도 안 마셔. 간이 다 녹아빠질 것 같아. 정청은 분한듯 숟가락을 내려놨다. 술빨러 가잔 소리도 아니거든?? 아 그럼 뭐요. 형님이 뜸 들이면 불안하다고. 자성이 뚝배기를 저만치 밀어놓고 담배를 찾아물었다. 그 사이 한 그릇을 싹 비운 정청이 급하게 손짓을 했다. 형님이 좀 사서 펴요. 자성이 투덜거리며 담배를 한 대 주자 정청이 덥썩 물며 말했다. 놀러가자. 아 빡촌 좀 그만가요. 그러다 병난다. 자성의 말에 정청이 담배를 볼이 홀쭉하게 빨았다. 아 씨벌 아니라니까!!


유원지 가자, 유원지. 정청은 들뜬듯 눈을 크게 뜨고 히히덕거렸다. 이자성은 담배를 문 채 정청을 쳐다봤다. 형님 지금 유치장을 잘못 말한거 아니요? 한참 욕을 쏟아내는 틈틈히 내뱉는 불성실한 설명을 들어보니, 무슨 지역축제를 한다고 떠들석하더니 근처에 간이 유원지가 들어선 모양이었다. 정청이 꽃남방 포켓에서 구겨진 전단지까지 꺼내보이는 걸 보니 진심이 느껴져서 이자성은 좀 무서울 지경이었다. 아 뭐 거창하지도 않고 별볼일없게 생겼구만. 이자성이 전단지를 보며 퉁박을 놓았다. 탈 것도 없어 보이는데 가서 뭐해. 난 안 갈라요. 이자성이 전단지를 바닥에 버리자 정청이 기겁하며 주웠다. 씨뽕새끼야, 이거 가져가면입장료 깎아준다는데 왜버려.


안 어울리게 뭔 유원지야. 애들도 아니고. 자성이가 지갑을 챙기며 일어났다. 정청은 계속 구시렁거렸다. 자성이 해장국 값을 치르고 식당을 나오자 뒤따라 나오며 정청이 성질을 냈다. 야 너 진짜 안가냐. 다른 애들 데리고 가던가 해요, 둘이 가서 무슨 청승이야. 안 그래도 맨날 둘이 다녀서 징글징글한데. 이자성이 복실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보는데 정청이 전단지를 쥔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욕을 한 바탕 할 차례인데 왜 조용하지. 이자성은 멀거니 정청을 쳐다봤다.


형님 설마 유원지 한번도 안 가봤소?


정청은 목덜미가 시뻘게지더니 무기마냥 전단지를 휘둘렀다. 그래 안 가봤다 개새끼야!! 뒤지기 전에 가볼라헌다 왜!! 그때 이자성 머릿속에 든 생각은 짠한것보다 구질구질하다는 것이었다. 정청의 삶은 참으로 값싸고 구질구질하다. 남들 다가는 유원지 한번을 못 가고 삼십년 넘게 산 남자가 아직까지 그런 곳을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구질구질했다. 정청다웠다. 가자잉. 갈꺼제? 술 한잔만 더 하고 가자고 꼬실 때처럼 정청이 살살 물어봤다. 이자성은 꽁초를 바닥으로 버렸다. 생각 좀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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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이 그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 참이면, 그는 등떠밀린 사람처럼 침대 주위를 뱅뱅 돌다가 간신히 눕곤 했다. 눈꺼풀 안 쪽에 비치는 빛도 막을 참으로 손등으로 눈을 덮으면 그게 잘 준비였다. 그러나 의식이 흐물흐물 떠돌다가 배수구 사이로 빠져나가 완전히 잠겨버리기 직전, 꼭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성아, 느 자냐?


아뇨, 안 자요. 이자성은 반사적으로 손등을 치우며 눈을 떴고 늘 보던 천장과 적막과 고독을 똑바로 노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것이 이자성의 밤이고 새벽이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무간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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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엉아. 뭣허냐. 이자성은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로 눈을 떴다. 어렴풋이 아주 멀리 아득히 부르는 소리가 꿈결이라도 익숙하긴 했다. 선잠을 자다가 겨우 깊은 잠에 깜빡 빠졌다가 눈을 뜬 바람에, 이자성은 영 기분이 뒤숭숭했다. 그러나 거창하게 창문에 투투둑 뭔가 쏟아지는 소리는 느리게 껌뻑이던 의식에 불을 당겼다. 눈을 똑바로 뜨고 어두운 방안 건너편 창문, 오렌지빛 가로등이 뿌옇게 비친 창문을 보고 있자니 다시 뭐가 투두둑 쏟아진다. 아, 이런. 야아, 쓰벌느음아. 자냐. 이자성은 무릎으로 기어 창문앞까지 갔다. 새벽 2시하고도 반, 동네는 막 눈꺼풀을 닫을 시간이었다. 창턱을 짚고 일어나 가슴팍까지 오는 창문 밖으로 고갤 내밀자, 가로등 아래 선 인영이 신나게 손을 흔든다. 흔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보아하니 백프로 취했다. 거기에 뭘 부스럭거리나 했더니 손에 든 비닐봉투에 손을 넣고 뭔가를 집어 한움큼 뿌리는 것이 아닌가. 이자성은 따닥소리를 내는 것들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바닥에 떨어진 걸 보니 콩이었다.


아 미쳤어요? 왠 콩을 던져. 이자성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도로 주워 창밖으로 던졌다. 어어 하며 옆으로 피했던 정청이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올려다 보는데 얼굴이 벌건 것이 술탓인지 가로등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오다 주웠다, 이 쓰벌놈아. 느 왜 안자냐아. 정청은 손안에서 콩을 굴리며 이자성을 올려다 봤다. 이자성의 집은 이층 높이였고 제법 높이 차이가 났다. 자고 있었는데 형님이 깨운거잖소. 주위를 둘러보니 데리고 온 놈도 안 보인다. 왜 가서 자지 여기 와서 행패에요. 풋 콩을 까먹으면서 정청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라게, 나는 와 여기 왔다냐. 너는 왜 거기있냐. 여기가 내 방이니까 여기 있죠. 음머, 너 거기 사냐? 아 그럼 여기 살지 거기 살아요? 신발은 또 어디에 놓고 온 건지,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왼손목엔 검은 비닐봉지를 건 채 가로등 아래에서 흔들거리는 정청은 몹시 작아 보였다. 저녁 먹기 전에 헤어질 적엔 아무 일 없었는데, 또 무슨 심사가 뒤틀려 이렇게 된건지 이자성은 전혀 모를 일이었다. 형님 뭔일 있소? 하고 묻기에는, 높이가 너무 달라서 이자성은 그냥 손안에 콩 몇알을 굴리다 도로 아래로 집어 던졌다. 아 올라나 와요. 시끄럽게 소리지르지 말고. 야, 라면 끓여줘라 라면. 아 알았으니 조용히 올라와요. 이자성은 창문을 닫았다. 창밖으로 구성진 트로트가락이 흘러들었다. 이자성은 방의 불을 켰다. 라면이 어디에 있더라.



29


가끔 이자성은 그 여름날 굴다리에서의 일을 생각한다. 날파리 하나 날아들지 않았던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그 여름날, 굴다리 밖에서 이파리가 초록색으로 반짝거렸는데, 그게 눈에 아릴만큼 선명하게 기억났다. 경찰 뱃지 달고 처음 만나본 본청 사람을 뒤에 태우고 아직 경찰제복에 세운 줄도 빳빳하기만 했던 그때의 이자성이 지금에와서는 가장 한심하고도 한스러울수가 없었다. 다시 그 여름날의 푹푹 찌는 차 안 운전석에 올라탄다면, 이자성은 당장 그 차를 내려서 꽉 죄는 모자를 벗어던지고 굴다리 밖 반짝이는 나무그늘로 기어가 바람이나 쐴 것이다. 강과장이 무어라 하든 듣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게 그냥 그곳에서 살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자성은 자신의 검은 왕좌에 앉아 생각했다. 눈 안쪽에선 반짝거리는 이파리들을 보다가 눈을 뜨면 그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묵빛으로 가득한 사무실에 무거운 명패 회장 이자성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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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은 죽은 사람들한테 야박했다. 뭘보고 그렇게 느꼈냐면, 여수 시절에 같이 술마시러 다니던 동년배 건달 하나가 칼침을 맞고 죽었을때였다. 장례치뤄줄 식구도 없으니 대충 시신만 수습해서 화장시키고 난 뒤 정청은 이자성을 데리고 주인없어진 집에 가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엉망이었다. 정청은 부엌가서 냉장고 문을 열더니 아직 마시지 않은 소주 두병을 챙기고 식당에서 사온듯한 반찬 몇 개를 빼냈다. 지금 뭐해요? 이자성이 뒤에서서 묻자 정청은 김치통을 열어 총각무 하나를 으적으적 씹어먹으며 부엌을 둘러봤다. 주인 없으니 주워가는 것이 임자제. 나가 화장도 시켜줬는디. 이자성은 어딘지 소름이 끼쳐서 집 현관 언저리만 빙빙 돌았는데 정청은 신발 신은 채 들어가서 총각무를 씹어가며 하나 딸린 방을 뒤져서 비상금을 찾아내고 멀쩡해 보이는 티비도 찾아냈다. 결국 그날 정청이 그 빈 집에서 얻어낸 것은 비상금 20만원에 소주 두 병, 24인치 티비 하나, 총각김치와 갓김치 한통씩이었다. 죽은 사람 껄 왜 건드려요. 이자성이 타박을 하자 정청은 제 방 냉장고에 김치통을 넣으며 고갤 저었다. 인간이 뒤진것이지 물건이 뒤진것은 아니잖어, 인마. 뒤끝없이 정리해주는 것인디. 쓸데없이 잔정많고 속깊은 형님이었지만, 이럴때는 영락없이 계산이 칼같았다. 


나중에 정청은 그 집을 팔아서 돈을 자기가 챙겼다. 죽은 건달 이름으로 납골당에 넣어준 것도 그 집 판 돈이 생긴 뒤였다. 그게 정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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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린데 말이여, 지금 눈을 감아버리믄 다시 또 그 좆같은 얼굴 못 볼까봐서, 눈을 못 감고 있잖냐, 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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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절에 정청은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 꼭 라이터를 두개씩 챙겼다. 공짜좋아하면 머리 벗겨져요, 궁상맞게 왜 이래요 하고 타박을 하면 정청은 낄낄 웃으며 눈을 부라렸다. 이게 다 살림밑천이여, 살림밑천!! 그 모습이 그렇게 촌스러울수가 없었다. 있는 궁상 없는 궁상을 떨며 요란하게 촌티를 풍기는 사내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그때의 이자성은 맘 놓고 타박도 하고 웃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더이상 정청이 공짜 라이터에 연연하지 않게 됐을 때 이자성은 서러웠고 그 서러움을 표할 길이 없어서 담배를 끊었다. 




33



자성아. 우리 바다 갈까? 자성이 눈을 껌뻑거렸다. 어디 아파요? 널린게 바단데 또 어딜가. 정청이 담배를 담벼락에 지져껐다. 시꺼먼 그으름이 벽을 따라 그어진다. 이런데 말고 새끼야. 쩌어기, 저짝같은 곳. 이자성이 고갤 들었다. 전광판에 붙은 낡은 그림은 하와이인지 세부인지의 바다를 그려놨다. 색이 바래서 바다색이 옥색으로 보였지만, 것도 나름 괜찮았다. 긴 해변, 하얀 모래, 옥색의 바다, 태양, 파라솔. 저기나 여기나. 아 빨리 오기나 해요. 바쁜데 무슨 한가치게 바다타령이야. 이자성이 앞서서 팔을 휘둘렀다. 정청은 고갤 까딱까딱 저었다. 갈꺼거든? 이 씨브랄탱아. 그리고 몇 걸음걷다가 앞서 걷는 이자성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야 암튼 가는거다? 언제가 됐건 말이여, 저런 죽여주는 바다에 가보자고. 좆나게 쭉쭉빵빵한 여자들이 천지일텐데. 정청은 이자성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흔들었다. 알았지? 가는 거다, 대답해 씨벌놈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이거나 놔요. 더워죽겠는데.



이자성이 세부에 간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아주 나중에. 혼자서.






34


나는 사실 별로 대단한 인간이 아니오. 따지자면 시시한 쪽에 가까울 거요. 그런데 형님은 굳이 나를 대단하고, 별스럽게 잘난 인간으로 대한단 말입니다. 마치 어디 금띠라도 숨겨진 불상 다루듯, 나를 그렇게 어여삐 대한단 말이어요. 그럴때마다 나는 내가 마치 정말 대단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하게 되는데, 형님, 나 진짜 그러면 안 되는 처지란 말입니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담쟁이 덩쿨처럼 벽에 붙어 시드는 존재여야 한단 말이오. 그러니 제발 나를 돌아보지 말아요. 자꾸 죽은 화분에 볕을 쬐어주고 물을 준다고 해서 그 화분에 봄이 옵디까? 안 와요, 형님. 나의 봄은 여름 이후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소. 그러니 그냥 이러저러하게 삽시다. 나는 그늘서 시들어가게 그냥 놔두셔요. 


미안해요, 형님, 나는 그 빛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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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매 씨빠 비는 니미, 허이고 아까워 어쩐다냐, 잉? 어째. / 뭐가요 / 목련 대가리 다 떨어지겄다, 아까워 워째. 비 그친 다음날, 이자성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옛수. 이기 뭐여, 떡영화냐. 시시덕거리며 받아든 봉지 안에는 채 다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목련 봉오리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거 뭐 어따 쓰라고. 이 골때리는 새끼야. 정청은 담배를 물고 어이없다는듯 껄껄 웃었다. 아 아깝다메! 이자성은 그 말을 던져놓고 갈게요 하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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