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집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거야. 맷 머독은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그는 늘 맞는 말만 했다. 가끔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악다구니를 쓰게 할 만큼, 맞는 말을 돌리지도 않고 그대로 날렸다. 천하의 스파이더맨이라고 해도 심장 바로 앞에 총구가 닿아 있으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언어의 사정거리라는 것을 두지 않는 사람의 말은 피할 도리가 없다. 더 열 받는 건 그러한 말을 듣고 그대로 갚아줄 수 있을 만큼, 피터 파커가 말 주변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상대는 변호사라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피터는 가끔 화가 끓어오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라앉혔다. 가라앉힌다고 가라앉을 감정이 아닌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그러나 가라앉히지 못하면 무엇을 어쩔 것인가. 피터 파커가 화를 내고 싶은,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감정이 목표물을 잃을 때 피터 파커는 오랜만에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의외로 그들은 평범하게 만났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기회처럼, 그들 역시 그렇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맷은 그들의 첫 만남은 지하철 공중전화 앞이라고 주장했고 피터는 스타크 타워 앞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렇게 지하철 – 혹은 스타크 타워 앞-에서 만났다. 첫 만남이 심각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장님이 한 손에 지팡이를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든 채 걸어갔다. 마주오는 남자는 덩치가 크고 뚱뚱한 흑인이었다. 부딪히겠는걸. 피터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장님이 쓰러지지 않도록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예측된 충돌의 순간에, 장님은 기가 막힌 각도로 거인을 피했고 그 결과 피터는 지나가던 장님의 허리를 끌어안은 판국이 되었다. 이것 참 어색하네요. 피터는 석상처럼 굳은 채 가짜 웃음을 잔뜩 달고 말했다. 장님의 손이 피터의 팔에 올라왔다. 큰 손이었다. 문득 피터는 이 장님이 전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리허그 유행은 지나지 않았나요? 어린 학생 같은데, 구식이네. 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피터 파커의 팔을 두드렸다. 피터는 얼른 그를 놓았다. 장님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이고는 다시 갈 길을 걸어갔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정확하게 방향을 맞춰서 고개를 끄덕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피터는 1분쯤 의아해하고, 그 뒤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한층 더 극적이었다. 그 자리에는 데어데빌과 스파이더맨이 있었고 자기소개를 할 틈도 없이 다른 손님을 맞이해야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졸음에 겨운 피터가 다음 날 있는 과제를 떠올리고 있을 때, 막 헤어지려 하던 데어데빌이 악수를 건넸다. 이제 프리허그는 그만뒀나? 그 바람에 난간 위에 올라 앉아 있던 피터 파커는 거의 떨어질 뻔 했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근래에 프리 허그를 어디서 들었는지 한참 생각해냈고 그 시시한 우연의 순간이 떠올랐다. 당신! 그렇게 외쳤을 때 이미 데어데빌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와, 사람이 떨어지는데 잡아 주지도 않다니. 피터 파커는 허공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들었다. 우습지만 이 각각의 만남은 서로를 매개삼아 불타올랐다. 맷 머독과 피터 파커, 데어데빌과 스파이더맨은 짝이 잘 맞는 궤짝처럼 빈틈없이 시간을 쌓아 올렸다. 처음에는 그들의 가면이 마주했다. 피곤함을 이기며 나누는 대화, 뉴욕을 지키는 히어로들끼리의 시시한 고충 따위를 몇 마디 나누고, 그 뒤에는 사담을 나눴다. 잘난 척 하지 마요. 피터 파커의 말버릇은 그랬다. 그러면 디디는 픽 웃으며 말했다. 잘난 척이 아니라 정말 잘난거야. 재수 없어! 피터의 두 번째 말버릇이었다. 누가 먼저 손을 잡았는지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엄청 싸웠다. 다만 중요한 것은 둘 다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살과 살이 가감없이 닿았다. 가면을 벗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접촉이었다.
맷 머독은 헬스키친에 살았다. 피터 파커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맷을 떠올렸다. 가끔은 의식적으로 그 길을 지나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 놈의 부엌 창문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익숙해서 방심하면 너무 당연하게 그 집 창문을 두드리고 있으므로, 꽤 집중해야 했다. 처음에 우유를 훔쳐 먹은 것은 반쯤 장난이고 반쯤 진심이었다. 아직 알바비를 받기 전인데다가 새로운 장비를 샀더니 통장이 바닥났다. 배고픈 영웅은 도둑보다도 나빠. 피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딱 한번 가봤던 맷 머독의 집으로 찾아 갔다. 처음부터 부엌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벨을 누르고 맷을 만나면 한끼 식사정도를 부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집 근처에 오자 ‘이과는 종이와 펜이 없으면 말을 못하잖아’라고 했던 맷의 말이 떠올랐다. 처지와 상관없이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젊은 혈기의 특권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주변을 배회하다가 결국 택한 것이 부엌 창문이었다.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자 깨끗한 우유가 잔뜩 있었다. 우유를 꺼내 마시고나니 아무도 없는 집안이 슬그머니 그를 밀어냈다. 구경이라도 해볼까싶던 마음이 침묵에 눌려 서두르게 된 통에, 피터는 선반에 있던 양념통 하나를 쓸어뜨렸다. 대충 치운다고 치우고 그 집에서 나왔는데, 이틀 뒤에 은행강도 사건에서 우연히 만난 디디는 대뜸 청구서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피터가 묻자 디디가 대답했다. 우유값과 시즈닝 값. 피터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제가 청소라도 해드릴게요, 디디. 디디는 짧게 생각하고 허락했다. 그렇게 피터 파커는 맷 머독의 집으로 들어갔다. 청소를 하지 않을 때에도 들리게 된 것은 디디가 그의 방문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같이 밥을 먹고 일-히어로의 업무 말고도-이야기를 하다가 각자 할 일을 하기도 했다. 맷이 막 창문 밖으로 나서려는 피터의 등에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만난지 6개월쯤 되는 때였다. 자고 갈래? 피터는 부엌 창틀에 앉은 채 다리를 바깥 쪽으로 뻗고 있었다. 피터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 맷은 천천히 부엌 창문으로 걸어와 바깥으로 뻗은 피터의 다리 한 쪽을 들어 안쪽으로 옮겼다. 나머지 한 쪽은 피터의 몫이었다. 그렇게 되었다.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현실적이었고, 조금은 즉흥적이었다. 피터 파커는 맷 머독의 부엌 창문으로 드나들었고 그와 함께 떠들고 웃고 싸우고 같은 침대에서 잤다. 디디도 스파이디도 아닌 시간을 맷 머독과 함께 보냈다.
피터 파커는 벨을 눌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곳에 살았던 빨간 머리에 어딘지 성격이 이상한 변호사는 그 곳에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사무실에도, 법원에도, 집에도 그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데어데빌의 부재에 대해 수군거렸다. 헬스키친의 장님 변호사가 슈퍼히어로라는 ‘소문’이 도시를 덮쳤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떠난 남자는 정말 갑자기 사라졌다. 따로 여행을 암시하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는 그냥 그렇게 갔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사건을 모두 처리하고 그의 동료 포기에게 ‘조금 쉬어야 겠어’라고 말한게 전부였다. 피터는 그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증명해 줄 수 없지만. 그들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잠이 많은 피터가 빵을 발사믹이 아니라 콜라에 찍어먹고 있을 때 맷은 식탁에 기대 앉아 있다가 말했다.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거야.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피터는 무슨 개소리냐는식으로 물어봤지만 맷은 해석해주지 않았다. 피터가 부엌 창문으로 기어 나갈 때 피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맷 머독은 사라졌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부엌 창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피터는 그것을 초대장으로 받아들였다. 한 달 째 주인이 사라진 집은 적막했고 무거웠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집안에서 피터는 사막을 걷듯이 천천히 구경했다. 맷 머독이 살아온 인생이 거기에 있었다. 디디의 역사는 아니었다. 이곳은 맷의 집이었다. 장님, 변호사, 밉살스러운 말을 잘 하는, 맷 머독의 집이었다. 피터는 혼자 식탁에 앉았다.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될 거야. 피터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러나 문장을 끝까지 뱉지는 못했다. 아무 일도 아닌 일은 없어, 이 재수 없는 자식아. 친절하지 못한 마음으로 피터는 맷 머독에게 말했다. 어딘가에 있을 그에게, 어디에도 없는 그의 집에서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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