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말이야."
러스트는 갑자기 말을 걸었다. 해질녘 묘지는 대화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이 새끼랑 함께라면 어디든 그렇지. 마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러 더 세게 삽을 흙위로 내리꽂았다. 이미 허리가 뻐근하게 아파온지도 오래됐다. 이런 일을 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아? 마티는 투덜거렸다. 러스트는 대답처럼 입을 열었으나 여전히 독백이었다.
"요즘 환상을 보고 있어."
"거 잘됐군, 티비수신료는 아낄 수 있겠어."
러스트는 걸터앉은 묘비를 손으로 쓸었다. 돌은 냉기가 스며나왔다. 그는 자신의 흙투성이 손을 들여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감각이 없다. 아니다 감각은 있다. 다만 간헐적일뿐이다. 주로 마티에게 말을 걸때마다 뭍으로 밀려온 물고기처럼 감각이 퍼덕거렸다. 손이 찌르르하게 저리고 무릎이 쑤셨다.
"특히 나는 염소를 자주 보게돼. 배턴루지의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더군. 천천히 그러나 정직하게."
"인사라도 하지 그랬어."
마티는 언제까지 파야하는지 알 수 없는 구덩이를 파면서 덜컥 영원히 이렇게 러스트의 몽롱한 목소리를 들으며 땅을 파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그리고 커피를 사러 갔을때도 가게 밖에 염소가 걸어갔어. 하얗고 수염이 긴 염소였는데. 그제서야 나만 보인다는 걸 깨달았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불길한데."
"지금도 보여."
마티는 삽을 든 채 러스트를 쳐다봤다. 약간 올려다보면서.
"개소리."
"네 옆에 누워있어. 평화롭게."
마티는 흙구덩이를 쳐다보았다. 종아리 깊이까지 내려간 구덩이는 윗부분에 희미하게 오렌지빛이 들었지만 대부분 그저 검은 흙덩어리일 뿐이었다.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고 해도 염소는 보이지 않았다. 마티는 '그럼 그렇지.' 하며 괜히 훌쩍거리며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파트너의 개소리에는 이골이 났다.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듣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이 곤란했지만 정말 가끔, 아주 가끔씩은 송곳같은 통찰을 쏟아내기도 했다. 특히 수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티는 러스트의 말을 걸러듣는 법을 배웠다. 망을 넓게 치고 중요한 말만 건져내고 아닌 것은 흘려버린다. 이제까지 효과적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또 허망하게 이야기를 전부 듣고 말았다. 염소의 환상이라니. 불길하고도 멍청한 환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묘지에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시간 속에 있었다. 마티는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함을 떨쳐내려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런 건 없어, 러스. 네 멍청한 환상은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야."
"그렇겠지. 나도 알아. 이것은 온전히 내 영역안에 속해있고 이런, 환상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다만 나는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야. 마티. 알겠어?"
마티는 그 말에 등을 돌리고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땅은 검은 흙으로 가득 차 있었고 축축했다. 그러나 묵직했고 마냥 땅을 파내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마티는 러스트와 교대한 것이 언제인지 가늠해봤지만 석양이 눈을 찌른 탓에 잘 생각나지 않았다. 파야만 하는 구덩이가 있고 일을 도와줄 동료는 묘비에 앉아서 환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맥주 생각이 난다. 잘 빠진 엉덩이와 함께. 이 일을 마치면, 전화를 걸수도 있다.
"왜 하필 염소일까?"
"네 삐쩍 마른 뺨때문이겠지."
러스트는 흙 묻은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럴지도 몰라. 마티는 이제 거의 허벅지 수준으로 땅을 팠다.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더 이상은 허리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러스트, 교대."
"마티."
"뭐야 또."
"나는 말을 해야만 해."
말을 할 때만 감각이 살아나. 그래야 살아 있는 것 같아. 러스트는 눈을 깜빡이며 마티의 등을 본다. 넓고 듬직하지면 손을 대면 미끄러져버릴 것 같은 등이다. 본다.
"나는 너에게 직접 말할 수 밖에 없어."
"뭐라고?"
"넌 이해해야해."
"러스트, 그만-"
"넌 죄를 지었으니까."
마티는 뒤를 돌아봤다. 러스트는 그곳에 없었다. 마티는 잠시 삽을 쥔 채 그가 앉아 있던 묘비를 쳐다보았다. 흙먼지가 뒤덮인 묘비에는 누군가 앉은 흔적조차 없었다. 마티는 정말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묘지는 그 혼자였고 마침 해는 완전히 넘어가 어둠이 베일처럼 드리워졌다. 마티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구덩이에서 나왔다. 맥주와 여자 생각이 간절했다. 러스트 이 또라이는 어디로 갔담. 마티는 손을 털어내면서 차키를 찾았다. 구덩이를 파는 곳 바로 근처에 차를 세워두었다. 러스트의 픽업트럭이었다. 마티는 그 차의 후미등이 깨졌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직도 그대로다. 손 끝을 깨진 후미등 안으로 밀어넣었다가 관뒀다. 의미는 없다. 차까지 두고 어딜간거야. 마티는 큰 소리로 '러스트!'하고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실체도 다가오지 않았다. 마티는 트럭의 짐칸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스트의 헛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지 불안해져서 마티는 고개를 돌렸다. 보면 안돼. 강한 의지가 그의 어깨를 경직시켰지만, 마치 빗장이 풀린 문처럼 그는 짐칸 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 형편없이 뼈가 부러진 러스트를 보았다. 차에 치였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한 편의 장면이 깜빡거린다. 마티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염소처럼 나타난 러스트를 피할 길이 없었다. 마티는 이제야 그곳에 왜 왔는지 기억이 났다.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일때문에.
"마티, 사실 난 요즘 환상을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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