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전야
@데나님 리퀘 : 율래 발렌타인데이
결전의 날이 왔다. 그 날. 석율은 알람이 울리기 30분전부터 눈을 뜨고 있었지만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 날이다. 2월 13일. 물론 오늘은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날은 아니다. 하지만 내일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만큼은 가히 역사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준다는, 딱히 뿌리를 알고 싶지는 않지만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있는 날이다. 문제는 토요일이라는 것이다. 토요일은 출근하지 않는다. 출근하지 않으면, 장그래를 만날 일이 없다. 물론 그래에게 연락을 하면서 동네까지 찾아가면 귀찮은 얼굴을 해도 모른 체 안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몇번 해봤다) 이미 그 계획도 다 짜놨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한석율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이 그것이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장그래와 한석율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러니까, 아직. 아직은. 한석율의 치밀한 계획에 의하면 내일 장그래를 찾아가 사실은, 아니 너무 뻔하게도 너를 좋아하였노라고 말할 참이었다. 압구정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베이커리에서 이미 예약도 해놨다. 풍선쇼, 촛불 다 유치할 것 같아서 -장그래의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모두 빼고 심플하게 초콜릿과 말 한마디를 전하기로 했다. 너 좋아한다. 이렇게. 완벽했다. 내일의 계획은 완벽하다. 하지만 한석율은 내심 내일의 계획이 조금쯤 무너지기를 바랐다. 오늘 책상 위에 장그래의 초콜릿이 놓여 있다면. 탕비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아저씨 이거나 먹어요.' 하고 초코바라도 하나 찔러준다면.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이라도 고백할 참이었다. 적어도 보험은 되겠지. 내일 뻥 차일 것을 반쯤은 예방해주는 지표 아니겠는가. 항상 다가가 잡아채는 것은 본인이라는 걸 한석율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 것이다. 힘내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며 한석율은 큰 소리로 혼잣말까지 했다. 아자, 한석율, 넌 멋진 놈이고 장그래는 착한놈이야! 그 마음도 같을 거라 믿어! 그러나 별 도움은 되지 않아서 그는 침묵 속에서 출근준비를 하게 되었다.
엘레베이터에서는 동기 중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면서 16층에 내렸다. 다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지만 벌써 사무실에 들어사자마자 초콜릿이 군데군데 보였다. 예의상 돌리는 500원짜리 가나 초콜릿들이 대부분이었다. 석율은 코너를 돌아 섬유팀에 들어서기 직전에 잠깐 멈춰서서 숨을 가다듬고 몸을 휙 돌렸다. 다섯걸음. 하나, 둘, 셋, 넷, 다섯. 책상 앞에 도착한 한석율은 책상 위에서 500원짜리 가나 초콜릿을 발견하고 잠시 호흡곤란을 느꼈다. 이내 그 아래 붙은 포스트잇 쪽지를 조심스럽게 읽었다. <한석율씨 우정 초콜릿이에요 -안영이> 석율은 초콜릿을 내팽개친 뒤 자리에 앉았다. 몸을 돌려 보니 성대리 책상에는 가지각색의 초콜릿이 쌓여 있었다. 심지어 꽃바구니까지 배달받았는지 자랑스레 올려져 있었다. 저런 놈 뭐가 좋다고 초콜릿을 처먹이지. 아 당뇨걸러서 죽으라는 모두의 염원인가. 한석율은 입을 오리마냥 내민 채 컴퓨터를 켰다. 부재중 메시지. 없음. 호출 없음. 메일 없음. 석율은 키보드 옆에 머리를 박았다. 아무것도 없어, 실패야. 이 발렌타인데이는 망했다고.
사실 장그래같이 뻣뻣한 남자가 이런 행사를 챙긴다는 게 좀 말이 안 되지.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석율은 합리화를 시작했다.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퇴근전까지 제출해야하는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발렌타인 데이 뭔지도 모를걸? 양주 마시는 날로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래 아마 그럴거야. 으이그 장그래. 이미 머릿속에 결론까지 내버린 한석율은 성대리가 딴짓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15층으로 내려갔다. 슬쩍 눈이 마주친 장백기와 안영이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영업 3팀쪽으로 걸어가봤다. 장그래는 마침 자리에 없었다. 파티션 너머에서 고개를 쭉 내밀었는데 김대리가 뭔가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반쯤 먹은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초콜릿.
"안녕하십니까 대리님!"
"어어 한석율씨. 장그래 만나러 왔어?"
"네. 자리에 없네요."
"차장님이랑 미팅 들어갔어. 걔도 뭘 좀 배워야 할거 아냐."
한석율은 빠르고 낮은 자세로 김대리 옆에 착 붙었다.
"이야대리님 초콜릿! 역시 원인터 최고의 매력남답게 발렌타인 데이가 오기도 전에! 초콜릿 받으셨네요."
"아아 이거. 내 신세에 누가 주겠어? 장그래가 남사시럽게 챙겨다준거야. 여자애도 아닌데 뭘 이런 걸 다."
"하하하하하 그러게요. 하하하하하"
한석율은 다가갔던 것만큼 빠르게 물러났다. 장그래는 분명히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돌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지만, 안주는 거다. 왜냐, 마음이 없으니까. 이렇게 빠른 정리가 다 어딨냐. 난 너무 계산이 명확해. 한석율이 우울한 기분으로 자리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반겨주는 건 성대리가 넘긴 폭탄과도 같은 자료들이었다. <오늘안으로 분석해^^ 난 출장. 수고> 이런 쪽지가 얄밉게도 붙어 있었다. 한석율은 분노에 치이고 우울한 기분에 낚인 채 원단자료집부터 펼쳤다. 일 밖에 없다. 이런 나를 달래주는 건 일밖에 없어. 장그래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불금이고 뭐고 야근을 하면서 한석율은 그래도 내일 장그래 집에 찾아갈거야 생각했다. 플랜A는 건재하다. 설령 차인다고 해도 나는 말할거야. 더 이상은 삼킬 수 없는 말들이야. 보험 까짓거 나는 위험부담따위 두려워 하지 않아. 한석율이 엄청난 속도로 보고서를 타이핑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장그래를-
"아직 안 끝났어요?"
좋아한다.
석율은 파티션 옆에 서있는 그래가 귀신 얼굴이라도 한듯 깜짝 놀랐다.
"이 시간에 왠일?"
"일했어요."
"아아- 퇴근?"
"해야죠 이제."
그래가 책상을 훑어본다. 멀었어요? 석율은 왠지 갑자기 간이 콩알만해져서 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바쁜 척을 했다. 응 좀 바빠. 많이 바쁘네. 아직 못 가겠다 나는. 그래는 그런가보다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그래, 잘가 장그래."
석율은 손을 흔들었다. 내일 말할 수 있을까. 저렇게 등을 보면서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입안이 바짝 말랐다. 등을 돌리고 가던 장그래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깜빡했는데."
이거 받아요. 장그래는 자기 얼굴만큼 큰 초콜릿을 내밀었다. 석율은 넋이 나간 얼굴로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배터지게 이거나 먹어요. 한번에 다 먹는건 아니겠죠? 에이 혼자 다 먹든 말든. 아무튼, 나는 갈게요."
그래는 초콜릿을 꺼내주기가 무섭게 조금은 서두르는 느낌으로 사라졌다. 석율은 두 손으로 초콜릿을 든 채 앉아 있었다. 대리님이 먹던 초콜릿은 500원. 이건 3500원. 500원. 3500원.
뭐든 돈으로 따지는 것은 잘못 된 거지만, 적어도 장그래는 초콜릿을 고르면서 팀원들보다 더 비싸고 다른 초콜릿을 '한석율을' 위해 골라온 것이다. 석율은 초콜릿 포장지위에 뽀뽀를 퍼부었다. 어서 오늘이 끝나기를 빌면서. 내일 내가 끝내주게 멋지게 고백할거야. 평생 잊지 못하도록 말할거야.
발렌타인 데이에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거야 장그래.
+데나님 리퀘인데..괜히받은드슈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 제가 달달하고 이런거 잘 못써요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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