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 end
막다른 길
한석율씨를 좋아해요. 나는 물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서 컵 안의 물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장그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그도 내 컵을 보았을 것이다. 고요하지만 처참하게 흔들리는 물. 하지만 직장 동료 이상의 감정은 아닙니다. 하얀 얼굴에 입술은 붉고 눈은 또렷하게 생긴 미인 상의 얼굴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의외로 거절에 능하다. 정리해 주세요. 장그래는 그렇게 말할 때까지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를 똑바로 보면서, 두 번 다시 그런 이야기를 꺼낼 기회조차 만들지 않겠다는 듯 확고한 태도였다. 나는, 어떻게 했냐면, 일단 웃었다. 하하하하, 뭘- 뭘 정리해? 장그래는 눈을 잠깐 아래로 내렸다. 나는 그가 내 손을 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빈 커피잔들 사이의 투명한 물컵을. 긴장으로 굳어진 손을. 나는 어쩌면 그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팍한 동정이라도 들면, 적어도 그 칼같은 거절을 조금 뒤로 미뤄나 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장그래는 다시 눈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한석율씨의 마음이요. 절 좋아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계속 웃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 다는 말은 다 거짓이야. 침이 아니라 칼도 꽂는데 무슨 소리람. 시대가 바껴도 너무 많이 바꼈다.
'상관없잖아, 내가 너한테 뭘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마음에서 비죽이 솟은 모진 말 끄트머리를 잘라 툭 던졌다. 장그래는 또 그럴듯하게 수긍했다. 그렇죠. 너무 잘 받아들여서 맥이 쭉 빠졌다.
'하지만 영향을 미치잖아요.'
'뭐?'
'영향이요. 한석율씨의 마음이 한석율씨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그건 다시 주변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잖아요. 그걸 조절할 수 있어요?'
가끔 생각하지만 장그래가 유달리 말을 잘하는 순간이 있다. 승부사적인 기질을 발휘할 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때. 너무 말을 잘해서 그 입을 한대 쳐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미간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또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기면, 어제처럼 행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어제의 일이라 함은 작은 소동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퇴근길에 장그래를 만났다. 혼자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붙잡고 저녁 먹고 들어가자고 꼬드기고 있었다. 나 배고파, 우리 밥 먹고 가자. 그는 난감한 기색은 없었지만 한숨을 쉬면서 어머니랑 같이 저녁먹어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먹고가. 안됩니다. 먹고가. 우리의 작은 실갱이는 계속 이어져서 건널목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초록불이 들어오고 길을 건너려는데 갑자기 우회전 차량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장그래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안됩니다.'라고만 하고 있었고 차는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장그래의 등을 세게 밀었다. 충분히 멀리 넘어지도록. 차가 그대로 지나가더라도 치이지 않도록. 모든 것은 느리게 다가왔다. 달려오는 차 앞에 고작 몸뚱아리 하나 내밀고 서 있는 동안,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면서 모든 것이 너무도 느리고 정확하게 보였다. 장그래는 앞으로 기우뚱하면서 몇발자국 앞에 나가 비틀거렸고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왜그래요? 이렇게 묻는 눈으로. 내 얼굴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웃었을 것이다. 나는 할 말이 없으면 웃는다. 우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그래가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넘어지면서 많이 다치지 않기를 바랬다.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떠오르다가 빙빙 도는 것은 결국 저 하얀 얼굴의 의문이었다. 왜그래요, 한석율씨?
마치 평생과도 같은 순간은 사실 30초 남짓 할까말까한 시간이었고, 기적처럼 나는 차에 치이지 않았다. 우회전하던 차가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나는 정말 살짝 다리를 툭 부딪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았지만 장그래는 운전자에게 명함을 받고 보험회사까지 전화해주었다. 일단 병원가서 진단서 떼보기로 했지만 나는 걷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장그래도 알았을 것이다. 이 사고가 다 끝나고 나는 장그래의 옷을 털어주었다. 와 진짜 식겁했네. 그지? 와 대박 나 완전 행운의 사나이. 그러나 장그래는 내 손을 잡아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먼저 갈게요. 가야겠어요. 나는 그가 너무 놀라서 그런 얼굴을 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놀라서, 그렇게 하얗게 질렸고 걱정스런 얼굴을 한 줄 알았다.
그리고 오늘 만나자길래 고맙다고 인사하려는 줄 알았지. 나는 그래서 세시간동안 옷을 고르고 한시간동안 드라이기랑 씨름을 하다가 나왔는데 장그래는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접으세요. 야 차라리 내 얼굴에 물을 끼얹지. 그럼 좀더 불쌍해 보일텐데.
그래서 이러는 거구나. 그동안 한번도 입 밖으로 내서 말한 적은 없지만 둘러 둘러 닿기를 바라던 마음을, 장그래도 입 밖으로 소리내서 거절한 적이 없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희망을 목 안으로 욱여넣고 있었나보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안된다 이말이지.
'말씀해주세요. 어제와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을거라고 말해주세요.'
'나는....'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입이 바짝 말라서 물 한컵을 다 마셔도 나아지지 않았다. 장그래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의 시간들을 모두 바꿔놓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장그래와 보냈던 옥상에서의 5분처럼.
'나는 똑같이 할거야.'
마음이 종이접듯 접히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안 되잖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장그래는 고갤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결연하고 어떤 면에서는 평화로운 얼굴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그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리해주세요, 한석율씨. 한석율씨 본인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저를 위해서라도 정리해주세요. 장그래는 드라마 속 대사같은 말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말이나 해보고 차이면 몰라.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사겨달라고도, 좋아한다고도 못해봤는데. 왜 나더러 접으래. 왜 자기를 위해 정리해달래? 이 새끼 진짜 웃기네. 그러나 나는 장그래가 나가는 동안 그를 잡지 못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 하자고 붙잡기에는 장그래를 너무 잘 알았다.
그는 바뀌지 않는다. 물 위에 떠나니는 부표가 아니라 물 그 자체다. 어디에 담아도 본질이 바뀌지 않는 그런 사람. 나는 미친듯이 서운하고 또 슬퍼서 한참 혼자 앉아 있었다. 야, 말이 되니. 너는 바다고 나는 부표인데. 바다가 없으면 부표가 뜨니? 이 매정한 놈아.
카톡을 아무리 보내도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며 그날 밤 나는 문자를 보냈다.
[잘 자 장그래. 내 사랑도 나인투식스면 얼마나 좋을까.]
답은 없었다.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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