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현상
너 그렇게 살다가 손해만 본다니까! 성준은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린 탄식에 고갤 돌렸다. 소리는 창가쪽에 서 있던 동식한테서 터져나온 참이었다. 그 앞에는 종이컵을 들고 머쓱하게 웃고 있는 준식이 있었다. 동식은 답답하다는듯 제 가슴팍을 몇번이나 내리쳤다.
"야 그래가지고 그 살집이 무너지겠냐? 더 쳐야지?"
"아니 너는 괜히 시비야. 야 얘 하는 말 들어봐라, 안 답답하게 생겼나."
"뭔 말?"
성준은 준식을 쳐다봤다. 체구가 작고 마른 입사동기는 아냐아냐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자주 짓는 표정이 있는데, 주로 칭찬을 들을 때 짓는 머쓱한 표정이었다. 눈을 휘면서 입가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면 볼에 보조개가 패이는데 그게 웃는 얼굴을 웃는 얼굴 같지 않게 보이게 했다. 준식이 말을 않자 동식이 나섰다. 참 언제봐도 오지랖도 넓은 김동식이다.
"얘 저번에 기획서 올려서 실적낸거 있잖아. 베트남건. 그거 잘했다고 칭찬받고 나서 김대리님이 베트남만 들어갔다 하면 일을 다 얘한테 돌린다잖아. 또 얘는 그걸 다 한다?? 야 이게 말이 되냐??"
"에이, 아냐. 다 나 가르쳐주시려고 하시는 거지."
또 그런다. 눈이 휘었다. 성준은 커피를 한모금 후루룩 마시고 입맛을 쩝 한번 다셨다.
"뭐 신입이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어? 근데 넌 왜이렇게 흥분했는데 김동식."
"오늘 얘네 조카 돌잔치인데 김대리님이 보고서 자료만 휙 떠넘기고 출장가버렸데. 내일 아침 9시 30분 회의건인데. 야근 확정이잖아. 근데 얘가 그냥 실실 웃는다니까?"
"아이 그럼 어떡해. 그냥 해야지. 조카 생일이야 매년 오니까..."
준식은 제법 쾌활하게 말했다.
"미리 사둔 선물이나 주말에 갖다주지 뭐."
동식은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 시작했다. 얘는 또 이게 버릇이다. 무슨 일만 생기면 두 손을 허리에 척 붙이고 뱅뱅 도는거. 그러더니 갑자기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멈춰선다.
"성준식, 내가 도와줄게."
"뭐?"
"내가 보고서 해줄게, 넘겨. 나도 베트남 쪽이랑 연결한거 몇 건 있으니까 대충 가닥은 알아. 맨날 그렇게 남의 일 다 해주고 야근하면 어떡하냐. 조카 첫 조카라며. 가봐야지."
"아냐, 야 그러려고 너한테 말한거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 호구로 보지. 너 그러다 호구되는거야, 잔말말고 가서 자료나 넘겨."
성준은 멀뚱히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동식 너 진짜 하게?"
"그래, 진짜 한다! 사나이가 의리빼면 뭐가 남냐!"
"아이 참 아니라니까. 내가 할거야."
"자자 가자 성준식. 자료줘, 자료."
동식이 준식을 떠밀면서 휴게실을 나갔다. 성준은 그 크고 작은 등을 보며 커피를 마저 털어넣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는 강해준을 만났다. 나이도 두어살 어린 녀석이 싹싹하기는 커녕 말수도 적고 칼같은 성격을 여기저기 드러내서 또 한성격하는 하성준은 대놓고 그에게 재수없다고 말한 적이 몇 번있는데 오히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이가 더 부드러워 진것은 아이러니이다.
"퇴근?"
"응."
"요새 바쁘냐?"
"너는 안 바쁜가보네."
"에이씨."
성준은 투덜거렸다. 말로 이기려면 피곤하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 없는 동기들이 생각났다.
"오늘 휴게실에서 성준식이랑 김동식봤는데, 성준식 일에 김동식이 엄청 흥분해가지고 걔 오늘 보고서 대신 써준다고 난리치던데 알아? 준식이 첫조카 돌잔치라나 뭐라나."
해준은 잠시 성준을 돌아봤다. 무뚝뚝한 얼굴이 잠시 성준을 쳐다보다가 다시 앞을 본다.
"또 그러네."
"또?"
성준은 '또'라는 의미를 물으려 했지만 해준은 열린 엘레베이터 문 사이로 휙 나가버렸다. '그럼 수고.' 이 말만 남기고. 저 재수없는 새끼 진짜. 성준은 가방을 고쳐메며 로비를 걸었다. 또. 또다. 그렇다. 성준이 휴게실에서 느꼈던 기시감은 그것이었다. 또. 성준식 일을 김동식이 대신 해주고 있다.
처음 입사할때부터 주변에 사람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성준식을 두고 지도 쥐뿔 가진 거 없는 신입사원주제에 엄청 챙겨주려고 한 김동식도 유별났다. '순한' 준식이 부당하게 일을 받아오면 같이 도와주는 식이었다. 재수없는 강해준이야 자기 일 아니면 관심이 없고 성준 본인도 남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동기중에서는 김동식이 가장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고 보니 또 그러네. 또. 찝찝한 기분이 구두 끝으로 스민다. 에라이 알게 뭐야. 성준은 마침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신경을 돌렸다. 술자리? 콜이지.
그래서 그는 퇴근이 무색하게 술집으로 달려갔다. 대학동창들이 모여든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섞어 마시고 오징어를 던지면서 낄낄거리니 속이 다 시원했다. 출근이 다 뭐람. 밤은 긴데. 성준은 낄낄거리면서 일어났다. 야, 나 물빼고 온다! 친구들의 야유를 뒤로 한 채 성준은 휘적휘적 화장실로 향해갔다. 화장실로 가는 길목은 어둑했다. 벽을 짚고 걸어가는 성준의 눈에 한 덩어리가 되서 얽혀 있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모텔을 가라, 모텔을. 신성한 술집에서 무슨. 성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열정적으로 키스중인 남녀는 뱀처럼 얽혀서 꿈틀거렸는데, 움직이면서 핀조명에 얼굴이 드러났다. 성준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시 움직이면서 얼굴은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성준은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자비없이 출근해야 할 다음날 아침은 오고 성준은 숙취해소제를 입에 털어넣으며 휴게실에 널부러져 있었다. 너무 달렸다.
"어제 술 마셨어?"
성준은 눈만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준식이었다. 늘 그렇듯 깔끔한 모습이었다. 커피 한잔 줄까? 하더니 두 잔을 타왔다.
"완전 많이 마셨나보네. 몸 걱정해야지 이제."
"알어, 알어."
성준은 귀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준식의 손에는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그거 어제 했어?"
"어? 어어...동식이가 자꾸 해준다고 해서.."
"김동식이 만들었다고?"
"난 안해도 된다고 했는데 자꾸."
"너는?"
"어?"
"넌 어딨었는데."
준식은 가만히 있다가 눈을 휘었다.
"난 당연히 형네 집에 가 있었지."
그러다 호구잡히는거야! 외치는 김동식의 목소리가 겹치면서 간밤 술집 복도에서 본 얼굴이 떠오른다.
"조카 돌잔치였다니까."
바로 저렇게 눈을 휘던 성준식의 얼굴이. 성준은 혀를 찼다. 그는 보고서를 옮겨 들더니 그걸 준식에게 던졌다. 이 성격, 참아야 하는데. 내 일도 아닌데. 그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꼴보기 싫다. 암것도 모르는 김동식도 한심하다.
"야 넌 사람 하나 호구잡고 노니까 좋으니?"
준식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내 눈을 뜨더니 그는 보고서를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준식은 종이컵을 든 채 성준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눈을 휘면서, 입가를 당겨서 보조개가 패이도록. 그러나 더 이상 그 보조개는 머쓱해보이지 않았다. 교활한 얼굴이었다.
"넌 좀 머리가 되는 놈이구나, 하성준. 눈치 좋네."
준식은 보고서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오늘도 수고. 그리고는 휴게실에서 걸어나갔다. 하성준은 남은 커피를 버리고 물로 입을 헹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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