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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미임파 이단브란 / 그의 밤



그의 밤(하마님 리퀘)





샌프란시스코의 부두에서 서로의 패를 다 꺼내 보인 이후에 브란트는 이단 헌트의 팀원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현장요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평가보고서도 우수했으며, 무엇보다 미친 과학자의 핵전쟁 계획을 막은 장본인 중 하나였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의를 제기할 만한 윗선이 부재중이라는 것도 시류상 적절했다. 물론 공식적인 이야기는 그랬다. 사람들의 입은 자유롭게 말을 옮겼다. 이단의 팀은 IMF 내의 어떤 팀보다도 업무 강도가 높고 어려운 임무를 맡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그동안 펜대나 굴렸던 사람이 바로 현장으로 나올 수 있겠냐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곧장 복귀한 이단의 팀이 몇 개의 작은 작전들을 연달아 성공시키고 또 다시 인도에서 핵 발사코드가 유출되는 것을 막아내자 윌리엄 브란트의 자질논란을 금새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밤이 왔다. 밤은 늘 온다. 브란트는 언젠가 그런 계획을 세웠다. 해가 뜨는 쪽을 쫓아 비행기를 계속 달리면 영원히 밤이 오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벤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무한동력따위는 없거든, 브란트?? 그러나 브란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한동력이 아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호시탐탐 발뒤꿈치를 쫓아오는 '밤'이라는 존재였다. 그러나 브란트가 인간인 이상 심지어 한낮에도 그는 그 밤을 피할 수 없음을 직시했다. 

밤은 눈꺼풀 안에서 시작되는데 눈을 감으면 마치 겹겹이 장막을 친 것처럼 캄캄하다. 얇은 살에 불과한 눈꺼풀을 감으면 빛이 비치는 것이 정상인데 브란트의 밤은 그러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 곳이 무저갱이었다. 브란트는 자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어둠 속을 방황하다가 문득 눈을 뜬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크로아티아에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공기가 뒷목을 감싸고 멀리 자전거 경적소리가 아득한 거리에 그는 우두커니 서 있다. 그의 앞에는 호텔이 있다. 갈 곳이라고는 그 호텔 뿐이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층으로 이동해 익숙한 방 앞에 선다.   문을 열면 안 돼. 문을 열면 안 돼. 그러나 브란트는 문을 연다. 공기에서 쇠맛이 나는 방이다.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지다가 누군가 깜빡하고 와인을 엎은 것처럼 카펫을 물들였다. 터번을 쓴 남자들이 소리를 지른다. 피가 번진 카펫 위에는 여자가 쓰러져 있다. 숨이 바로 목구멍 앞에서 달락거리는 여자다. 터번을 쓴 남자가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녀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브란트는 총을 쥔 손을 들어올리지만 이상하게 팔이 들리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자신의 팔과 함께 싸우는 사이, 총구는 점점 여자의 머리로 가까워진다. 도무지 도망칠 수 없는 거리가 되는 동안 브란트는 분에 찬 비명을 지르지만, 방 안의 누구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여자의 손이 경련한다. 여자는 브란트를 보고 있다. 살려줘요. 오직 그녀만이 브란트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손을 뻗는다. 살려줘요. 어느 순간 브란트는 드디어 자신의 팔이 자유로워졌음을 느끼고 팔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남자의 총이 훨씬 빨랐다. 여자의 머리가 반도 더 날아가는 광경은 유독 선명하고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브란트의 구두 바로 앞까지 튄 피를 보는데 문득 브란트는 그의 손에 총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어. 브란트는 너무나 말끔한 하얀 손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터번 쓴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총구가 서서히 브란트를 향한다. 그의 총은 목적도 없고 미련도 없다. 단 한 발. 탕 하고 울린 총알이 브란트의 폐를 관통한다. 브란트는 멍하게 자신의 상처에서 솟는 피를 보고 생각나는 것들을 떠오른다. 저 남자를 죽일 수 없다.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터번을 쓴 남자가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벗는다. 꼭 아는 얼굴처럼. 다만 웃지 않을 뿐. 브란트는 기억을 짜내서 그 이름을 부른다. 

"이단."

깨어나면 이단이 있었다. 이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억센 손으로 브란트의 손목을 꽉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브란트의 길고 긴 밤을 시작하게 하고 끝내는 것도 모두 이단이었다. 브란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이단."
"듣고 있어."
"밤이 무서워."

이단은 땀에 젖은 브란트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죄책감과 충격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작전을 성공시키면 성공시킬 수록, 그의 밤은 길어진다. 이단은 그의 어깨를 안았다. 조금 더 자. 잘 수 있을 거야. 브란트는 이단의 손목을 잡고 잔다. 그의 맥박이 있으면 아무 꿈도 꾸지 않는다. 그리고 돌아가. 이단이 브란트에게 속삭인다. 그래, 그래야겠어. 브란트는 그제야 잠의 나락에 빠진다.


윌리엄 브란트가 상황실에 복귀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타고난 전략가이며 남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장 요원과 수석 분석가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인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다만 윌리엄 브란트는 팀원들의 모니터를 보며 혼자 두 손가락으로 손목의 맥박을 재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