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5
(센티넬버스 AU)
국장은 신중하게 보고서를 검토했다. 두께로 손가락마디 하나정도를 이루는 보고서는 빼곡하게 이단헌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고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종합 인지능력 : 정상 (범주 내)
종합 신체능력 : 정상 (범주 내)
그 외 소견: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몸을 제어할 수 있으나 부분적 기억상실 증상을 보임. 지속적 관찰 요망.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센티넬 능력 보고서
1차 : A
2차 : C
3차 : B+
종합 : B+
국장은 그 요약본의 모든 문장을 세 번씩 읽었다.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제까지 매년 받아온 이단 헌트의 보고서가 남아 있다. 처음부터 센티넬 능력 측정에서 S+ 이상으로 나와 늘 <측정 불가> 판정을 받아온 것이 그의 기록이었다. 보고서를 내려 놓고 나서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이단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이단은 눈매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점심시간에 우연히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담배 끊은 지 오래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단이 턱으로 가리킨 것은 재떨이였다. 재떨이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지만 국장실에는 아직 니코틴과 타르의 끈적함이 남아 있었다. 국장이 고갤 저었다.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야 말이지."
"그래도 꽤 많은 일들을 마음먹은 대로 이뤄내셨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할 일을 해야지. 지구가 계속 굴러가려면."
"지구가 계속 굴러가는 것에 하나의 인간이 차지하는 영향은 매우 미미할 것 같은데요."
"그 인간이 슈퍼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슈퍼맨 하나때문에 흔들릴 조직이라면 그냥 놔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단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심지어 대상도 슈퍼맨이 아니다. 이단은 언제부터 자신이 슈퍼맨과 동일시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총이나 칼에 면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빨리 상처가 아물기야 하지만, 눈에서 광선이 나올 수도 없고 제일 심한 건 하늘을 나는 거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리고, 조금 더 많이 외우고, 조금 더 감이 뛰어난 한 사람이 조직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단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국장은 그렇게 믿었고 때문에 조직은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찾았다.
"불만이 있군."
국장이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차를 마셨다. 국장은 센티넬이 아니다. 기계의 도움 없이는 정확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냉전시대 내내 적국을 누볐던 스파이였고 이제는 정치가들 사이에 앉은 노장이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몇 번 구르지도 않았는데 대번에 사람을 파악했다. 그런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장의 몸 어딘가에 훈장처럼 남아있을 흉터들과 등가교환해온 지혜일 것이다.
"이건 불공평합니다."
"그런가?"
"이제까지 그 어떤 센티넬도,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적은 없습니다."
"여기 자네가 있군."
"제 손으로 직접 보낸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국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누구도 자네같지는 않았지. 이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러지 말게, 이단. 자넨 이미 알고 있어. 그 누구도 자네 같을 순 없다는 걸. 지나친 겸손은 만용이야. 자넨 전문가잖나. 사회복지사나 정신상담의가 아니라, IMF에서 누구보다 많은 작전을 진행해온 특수요원이야. 그런 사람은 남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서도 안 되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박해도 안 되지."
"하지만 국장님-"
"이단, 제발 내가 사정하도록 만들지 말게. 그럼 내가 내 최고 요원이 그냥 죽어버리도록 놔뒀어야 한다는 건가?"
국장은 손을 펼쳐 보였다. 네. 이단은 그렇게 말하기 위해 이 국장실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 노장의 허약한 손바닥을 내보이는 앞에서 차마 네, 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다시 입을 닫고 말았다. 결코 저 손이 허약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 잘 알고 있는데도.
"그간 자네는 이상이 있어서 검사를 받고 쉰 것 뿐이야. 이제 나아졌고 다시 복귀하는 거지. 그 외의 다른 일은 없네."
이단은 눈썹을 문질렀다. 그는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주어지는 작전들은 언제나 단순했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 대화도 없었고 명확한 목표와 수단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얽히기 시작하면, 일들은 훨씬 복잡해졌다.
"당신은 가이드를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이 실험이 실패했다면 어떡하실 계획이셨습니까?"
"다른 후보를 데려왔겠지. 다행히도 처음에 고른 후보자로 성과가 나타나서 다행이야. 기밀이란 아는 사람이 없을 수록 좋은 거니까."
"... 성과가 나올때까지 계속해서 사람을 바꿔가면서요?"
"그래, 그랬겠지."
"성공확률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을 텐데요. 국장님은 도박에 열을 올리는 타입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은 많지. 난 늘 자네의 승부사적 기질에 감탄하곤 했다네."
이단은 감탄했다. 늘 이 건물에 갇혀서 현장에 나가 본지 수십년도 더 되었을 국장을 너무 만만히 봐왔다. 그는 정치판이라는 피 튀기는 전장을 맨몸으로 돌아다닌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만 깜빡 잊어버리는 것이다.
"전 불완전합니다."
이단이 의자에 기대 앉으며 웃었다.
"보고서에 뭐라고 적혀 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게다가 아직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원하시는 제 능력들도 제 의지대로 제어되지 않는게 느껴집니다. 등급이 나왔겠죠? S는 어림도 없고 A도 과분하겠죠. B?"
"B+."
"지금의 저는 B+ 등급의 요원이란 말입니다. 기존에 국장님께서 맡기셨던 작전들에 들어갈 등급 자체가 안 되는거죠. 이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애초에 너무도 오만한 실험이었어요."
"오해하고 있군.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나. 가이드가 실종된 센티넬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게 만든 것만 해도 이건 노벨상 감이란 말일세."
"그래서 수석분석가를 현장요원으로 발령내신 겁니까? 실험을 계속 하려고?"
"맞아. 나는 우리의 실험이 백프로의 효과를 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아직은 말야. 하지만 줄리아를 찾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단 생각이 들더군. 원한다면 자네의 격리실 기록을 봐도 좋아. 브란트 요원과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네의 상태가 안정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
"기가 차군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야, 이단. 자네에게 이 모든 상황이 힘겹다면, 최대한 빨리 자네의 가이드인 줄리아를 찾으면 되네."
이단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쳐서 국장의 찻잔이 크게 달그락거렸지만 국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단은 꽉 쥔 주먹과 달리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장님 말씀대로 저는 최선을 다해 줄리아를 찾아 낼 겁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기 전에 제가 다시 정신이 붕괴되어 버리면, 이 실험이 실패한다면 그때 '임시' 가이드를 맡은 사람의 안전은 누가 보장합니까."
"자네가 다시 정신을 놓는다면 그땐 사살할걸세. 이미 브란트 요원에게 전달한 상황이야. 세 번째 기회는 없어, 이단, 이걸 원한 거라면 말이야."
기회는 많지 않아요,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이단은 어렴풋이 브란트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문제 해결의 끝은 줄리아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고 이 실험을 끝낼 수 있지. 자네의 가이드를 찾아. 자네가 그토록 원하던 운명의 상대 말일세. 최대한 빨리. 그게 자네를 위한 길이고, 브란트를 위한 길이며-"
"IMF를 위한 길이겠죠."
"맞아. 당분간 자네 둘은 파트너라고 생각하게. 애초에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도 그렇게 같이 일하는 동료나 다름 없지 않나."
이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장은 일어서지 않고 다 식은 차만 또 후루룩 마셨다. 이단은 더 이상 그가 이 문제로 대화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물러나며 방을 나서기 전 국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 문장 어디에서도 진정한 감사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국장은 희미하게 웃음으로 그를 전송했다.
국장실 복도 밖에는 대기실에는 브란트가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옷도 갈아 입고 안색도 나아졌다. 이단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브란트가 느리게 일어섰다.
"맨날 정장만 입습니까?"
"당신이 웃옷도 입을 줄 아는 것처럼요."
"잠은 좀 잤습니까?"
"덕분에요."
"국장님 호출?"
"아뇨, 당신을 데리러 왔죠."
"저런."
두 사람은 대기실을 나와 긴 복도를 걸었다. 브란트는 이단에게 몇 가지 기계를 건냈다. 새로운 핸드폰, 무선 통신기, 손목 시계, 이단 앞으로 등록된 권총 한 정이었다.
"전에 쓰던 것들은 아직도 증거물품으로 묶여 있으니 당분간 이걸 쓰게 될 겁니다."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뭐가요?"
"가이드 노릇 하는 거요."
"안 괜찮다고 하면 바꿀 수 있답니까?"
"안되겠죠."
"안되니까요."
이단이 손목시계를 차면서 물었다. 내가 다시 한번 발작하면, 날 쏘라고 했다면서요. 브란트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고갤 끄덕였다.
"네, 사살명령이 떨어지면 내가 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면 말을 해요. 안전장치를 풀어놔야 하니까."
"농담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죠?"
"상황실에선 이게 먹혀요."
엘레베이터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이단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줄리아가 실종되고 가이드를 만들어 내고, 정신 나간 센티넬을 되돌리다니. 줄리아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가 보고 싶었다.
"어디부터 갈까요."
"내가 마지막으로 나갔던 현장에 갑시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데. 언론을 최대한 막았지만 비스듬한 윤곽이 신문 1면에 나갔어요. 그리고 기억하는 지역민을 만나면 곤란할 겁니다."
"그럼 다시 격리실에 들어가 흰 벽을 보면서 어떤 기억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릴까요?"
"그래, 뭐라도 합시다."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면서 한숨처럼 중얼거리던 브란트가 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인데, 완전히 농담은 아닙니다."
이단은 고갤 끄덕거렸다. 적어도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이 옆에 따라다닌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대상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니 모종의 안심까지 느껴졌다. 그는 망설임없이 이단을 쏠 것이다.
사건 현장에 가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누가 앉을 것인지를 놓고 잠시 갈등이 있었으나 브란트가 '당신이 운전 중에 정신을 놓으면 나는 당신을 쏴도 죽고 안 쏴도 죽을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가 이겼다. 두 번 연속 교차로에서 빨간 불을 만났을 때 브란트가 '조짐이 나쁜데.'라고 중얼거린 것 외에 차 안은 침묵 그 자체였다. IMF에서 지급한 차에는 개인 물품이 하나도 없어서 살풍경했다. 이단은 줄리아의 차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인형들을 떠올렸다. 백미러에 감겨 있는 묵주도. 그런 것들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심지어 손가락 사이에 파고드는 그녀의 머리카락의 감촉마저 생생했다. 보고서에 사건 직전까지 줄리아를 만났다고 보고 되어 있었다면 분명 이단이 사고를 일으킨 곳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브란트는 생각에 빠진 이단 헌트를 보면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헌트 요원."
"이단."
"그래요, 이단.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이단은 그를 쳐다봤다. 안전벨트 좀 매줄래요? 벌금 물기 싫으니까. 교통사고로는 죽지 않는다고 해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단은 벨트를 매면서 과연 수석 분석가가 그와 동행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에 잔소리를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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