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사자수인 이단헌트와 군견인 브란트)
수통이 비었다. 브란트는 뚜껑도 열지 않은 그 수통을 손에 쥐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수통 안에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이미 두 시간 전에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서 입, 그러니까 입마개의 틈 사이로 털어 넣었으니까. 내가 언제부터 무릎을 꿇고 있었지. 브란트는 두 손으로 수통을 뒨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손바닥이 수통에 끈적하게 달라 붙는다. 천으로 감아 놓은 손바닥에선 아직도 핏물이 베어 있었다. 브란크는 킁, 하고 숨을 쉰다. 마비된 코가 그나마 기능을 하길 바라면서. 피비린내 사이로 다른 쇠냄새를 찾아보지만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모래, 모래, 모래 뿐. 추적자가 없다. 이미 망가진 총기는 왜 여기까지 메고 왔지.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추적자가 있으면 쏴야하니까. 맞아, 그랬어. 발목에도 허벅지에도 권총이 한정씩 있다. 모래에 파묻혀있지만, 쓸 수 있겠지. 그러나 지금당장은 수통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지난 밤의 악몽같은 전투에서 브란트의 부대는 길을 잃었다. 반군은 신기루처럼 나타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브란트는 자신의 형제들과 핸들러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브란트가 제 형제의 목을 자르는 반군 한 명의 머리를 날렸을 때 뒤에서 누군가 그를 잡아 채서 뒤로 넘어뜨렸다. 저 쪽이야, 브란트. 그 목소리는 그의 핸들러였다. 지원 요청해!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지원 요청. 달려가던 브란트도, 그를 보낸 핸들러도 폭음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브란트는 달려가던 방향 그대로 내던져졌고 어딘가에 머릴 부딪혔다. 그를 다시 깨운 것은 송곳이었다. 브란트는 자신이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햇빛이었고 해가 뜨기 시작한 참이었다. 지난 전투의 흔적은 망가진 부품 몇가지 뿐이었다. 어디였지. 지원요청. 형제들. 브란트는 걷기 시작했다. 해가 머리 위로 뜰때까지. 수통의 마지막 물 한방울까지 모두 쏟아낼때까지. 머리에서 흐른 피가 끈적하게 굳을 때까지. 지원 요청. 브란트는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모래속에 파묻힌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아 아마 난 못 일어날거야. 피에 젖은 군복이 무겁게 느껴진다. 일생에 거의 풀어본 적도 없는 입마개 또한 그랬다. 머리 위에 솟은 귀로도 꼬리로도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브란트는 세상이 기우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지원, 요청.
"이런 걸 궁에 들이시면 안 됩니다."
"그럼 마당에 둡시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워왔잖아요."
"애초에 주워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주워왔잖습니까, 내가요."
목소리는 긴 한숨을 쉰다. 다른 목소리가 다시 이어붙인다.
"근데 입마개는 왜하고 있는 겁니까?"
"군에서 양산하는 견신인들은 어릴때부터 복종 훈련의 일환으로 입마개를 씌워놓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말은 못 할까요?"
브란트는 눈을 떴다. 대리석 바닥에서는 찬 기운이 올라왔다. 목을 움직이려하자 머리에서 끔찍한 두통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잇사이로 고통의 신음이 새어나갔다. 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자꾸만 바닥으로 풀썩 넘어졌다. 팔은 양쪽으로 길게 나온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고 다리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총. 총. 그는 불안하게 총을 찾았다. 그의 총은 누군가의 발 밑에 있었다.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눈 부분은 살짝 망사로 처리하기는 했으나 잘 보이진 않았다. 그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나이가 지긋했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브란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잘 안되었고 쇠사슬에서 묵직하고 날카로운 소리만 났다. 그곳은 생전 처음와보는 곳이었다. 끝도 없이 넓은 회랑이 양 옆으로 펼쳐져 있었고 바닥의 대리석은 저마다 철저하게 계산된 각도로 맞물려 문양을 만들었다. 천장이 높아서 회랑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열려 있는 회랑 너머로는 아지랑이처럼 무한대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브란트는 묶여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총을 가져간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불편함때문에 브란트는 이를 드러냈다. 귀가 파르르하게 섰고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화가 난 것 같은데?"
얼굴을 가린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공연히 더 화를 낸 것은 뒤에 있는 남자였다.
"이 천박한 것이 어딜 감히-"
더 길게 말이 이어지기 전에 얼굴을 가린 남자가 손을 들었다. 꿀을 탄 물과 고기를 좀 가져오세요. 피부가 까만 남자는 한참 브란트를 쳐다보다가 결국 포기한 듯 회랑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자는 혼자 서 있었다.
"화가 났구나."
그는 브란트 앞으로 허릴 숙이며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린 천을 풀었다.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브란트가 딛고 있는 이 대리석도 그보다는 덜 날카로울 것이다. 완벽하게 계산된 공예품같은 얼굴은 올리브색 눈으로 브란트를 쳐다봤다. 아니 회색. 아니 파란색. 그의 눈색을 짐작할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갑자기 어깨가 너무나도 무겁다고 느꼈다. 다리가 저렸고 쓰러졌던 탓에 내내 나와 있던 귀와 꼬리마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제 이는 위협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저절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브란트는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몸을 웅크렸다. 살갗마다 한기가 저미는 것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거의 바닥에 가서 붙은 브란트의 머리 위로 그가 손을 얹었다.
"하지만 화를 내야 하는 상대도 가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브란트는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어. 죽는다. 지원요청. 죽는다. 그러나 부숴진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었다. 철컹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브란트의 입마개가 앞으로 쏟아졌다. 생전 처음 브란트는 자신의 입마개를 거울이 아닌 눈으로 직접 보았다. 크고 무식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팔이 잘린 것처럼.
"자 이제 고개를 들어봐라, 인사를 하자."
브란트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없어진 직후 브란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에 남자는 웃고 있었다. 야수. 야수. 브란트 안의 적색경보는 여전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너희 종은 말을 못하는가?"
"......."
"너를 부리는 사람과는 어떻게 소통했지?"
"......."
"너무 많이 다쳤나."
그가 브란트 머리의 핏자국을 향해 손을 뻗자 브란트는 기겁해서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정도는 예상한듯 우습게 따라붙어 머리의 상처를 확인했다.
"이름은 없나?"
"........."
"내 이름은 이단인데."
"........"
이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문득 브란트 목에 걸린 목걸이 끝을 찾아냈다. 인식표였다. 군견 BE11 윌리엄 브란트. 이단은 인식표를 보고 다시 브란트를 쳐다보았다.
"윌리엄 브란트. 윌리엄 브란트. 이게 네 이름이구나."
"......."
"견신인을 처음 본건 아니지만, 궁에 있는 자들은 너와 좀 다르던데."
"......"
"군인이라면 너 역시 전사겠지?"
브란트는 그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단은 브란트가 눈을 굴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웃었다.
"내 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국의 전사야."
그리고 저 멀리 회랑끝에서 '지금 그 더러운 것을 만지신 겁니까'하고 격노하는 노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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