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4
(센티넬버스 AU)
이단 헌트는 꼬박 하루를 누워지내다 일어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쇠사슬은 사라지고 없었다. 전보다는 팔 다리에 힘이 돌았다. 누가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는 느낌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격리실에 있었다. 전에 없던 침대가 들어와 있었지만, 여전히 흰 바닥과 흰 벽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침대 발치에 서 있는 남자는 그새 낯선 얼굴이 된 윌리엄 브란트였다. 수갑을 풀고 침대를 들인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였다. 다시 사고치면,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안 좋아질 것 같으면 미리 말을 좀 해줄래요? 그는 불안감을 숨기지 않고 이단이 깨어나자마자 그렇게 말했고 첫 만남에서 목을 졸랐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 이단은 아주 간신히 동의했다. 이단이 일어나서 앉자 브란트는 '자, 그럼.'하고 긴 이야기를 꺼낼 참으로 입을 열었다가 문득 '뭣 좀 먹을래요? 마시거나?' 라고 물었다. 이단 헌트가 지난 이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이다. 다소 맥빠지는 질문에 이단은 고갤 저었다. 센티넬은 출장비에서 식비가 안 들겠군. 저격하기도 편하겠어. 브란트는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기억이 난다면 질문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가이드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말이 안 되는거지. 브란트는 고갤 끄덕거렸다. 원래 혼자 생각할 것이 많아 생긴 버릇이 최근에는 아주 고착되어 버렸다.
"IMF에서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입니다. 당신은 IMF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요원이니까요. 윗분들께서는 아직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거짓말."
브란트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이단은 앉은 채로 고갤 살짝 숙이고 있었는데 눈만큼은 브란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취조당하는 중이 아닌데요, 헌트 요원. 나한테 거짓말탐지기라도 붙였습니까?"
"나도 취조하는 건 아니지만 거짓말이라고 느껴지는 걸 어떡합니까, 브란트, 요원."
이단이 '요원'이라는 단어를 붙였을 때 뚝 떨어뜨린 억양으로 인해서 브란트는 인정받았다기보다 놀림받았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으나 다행히 그는 그런 시비에는 일찌감치 면역이 된 사람이었다. 브란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센티넬은 날때부터 거짓말탐지기도 붙이고 나오나 보군요."
"'나'는 그런데요."
"당신 정신이 다 돌아왔다고 확신합니까? 어제까지는 내 목을 조르면서 깨어난 걸 기억하죠?"
이 대화는 이단에게 불리하다. 이단은 빠르게 사실을 인지했다. 지금 이 방에 들어와 있는 건 두 사람이지만 브란트가 대표하고 있는 것은 조직이다. 그에게서 쇠사슬을 풀어도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브란트에게 권한이 있을 것이다. 사무국이, 간부들이, 국장이 그를 보낸 것이다. 이단 헌트가 제정신인지 알아보고 어찌된 일인지 조사해서 그에 맞는 처분을 할 것. 이단은 쉽게 브란트의 위치를 추측했다. 그는 현장요원처럼 악다구니를 써가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대화는 쉽게 풀어나가되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될말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었다. 그는 전술가야. 상대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론가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감으로는 그가 거짓말, 정확히는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수 있지만, 그게 바로 상대방이 하는 일이기때문에 알아내기도 어렵다.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그는 뱅뱅 돌기만 할 것이다. 차라리 인정하고 미로를 부수는게 빠르다.
"당신이 하는 말이 꼭 '거짓말'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나에겐 충분하지 않죠. 그리고 그런 것을 느낄만큼은 충분히 머리가 맑고.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완전히 기본부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겁니다."
어차피 당신 말대로라면 난 정신 붕괴에서 갓 깨어난 또라이 아닙니까? 이단이 두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또라이가 스스로 또라이라고 인정해버리면 더 이상 약점이 아니게 된다. 뭐 나더러 설리반 선생님이라도 되라고? 브란트는 그의 달라진 태도가 미덥잖았다. 그냥 바보같이 계속 고집만 부리다가 다시 쇠사슬이나 채워서 멀리 보내면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브란트 자신이 일주일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던 말들을 그에게 한 번에 이해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지라도. 심지어 브란트 본인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작전'에 대해서는 이단이 택한대로 정공법이 나을 것이다. 브란트는 미리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단이 침대에 앉으라고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센티넬, 그러니까 당신같은 능력자들이 발견되고 연구가 시작되면서 센티넬과 가이드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대체 무엇이 개인과 개인을 하나로 묶어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연구였죠. 어떤 이들은 유전자를, 어떤 이들은 뇌파를, 어떤 이들은 후천적 사회학습능력 등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의 연구는 전부 사례추적연구였죠.
미국의 가정환경이 아이의 장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반적인 사회인식 수준에서 중상층 이상의 삶을 사는 부부의 아이를 조사해서 결과치를 얻었습니다. 그걸로 연구가 완성됩니까? 아니죠. 그것만으론 기준이 될 수 없어요. 그걸 기준 삼아서 다른 가정들을 연구해야 가치가 있죠. 편모나 편부가정, 조부모가 키우는 가정 같이 수도 없이 많은 대조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센티넬-가이드 연구에서는 이 대조군이 없었죠."
"... 가이드를 잃어버린 센티넬은 폭주해버리니까."
"그리고 폭주한 센티넬은 사살됩니다. 시체를 해부할 수는 있겠지만 별 도움은 안 되는 시료였을 겁니다. 정신이 붕괴되고 죽은 다음의 센티넬의 육체는 보통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결국 센티넬의 능력이나 가이드와의 관계는 정신적인 면하고 연결되어 있고 정신을 연구하려면-"
"살아있는 센티넬이 필요한거군."
"가이드가 없는 상태면 더욱 좋겠죠."
"바로 나처럼."
브란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단은 별다른 충격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 당연하지. 저 남자는 이단 헌트라고. 맨몸으로 체첸반군기지에 떨어뜨려놔도 나올때 수류탄 5개에 AK소총 두개를 둘러메고 뒷춤에 권총도 하나 꽂아 나오면서 건물을 날려버릴 남자라고. 그가 충격에 빠질 일이라고 해봤자- 브란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든다는 것은 피로의 증표였다. 그러나 맞는 추론이다. 그가 충격에 빠질 일이라고 하면, 전부 줄리아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
"물론 당신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된 것도 맞지만 처음에 했던 말도 거짓말은 아닙니다. 당신은 IMF를 세우다시피한 사람이니까요. 당신을 보고 특수요원이 된 센티넬들도 허다할 겁니다."
"아부 말고 당신 언어로 말해봐요."
"-IMF 최고 요원이 정신을 잃고 폭주했다. 곧장 IMF의 요원 관리 체제 특히 센티넬 관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국정감사가 들어올 겁니다. 그리고 대개 감사원에서 하는 일이란 지능적 안티가 되는 일이고, 어쩌면 IMF가 누리고 있는 권한이나 혜택같은 것들을 다른 정보기관에 넘겨야 하거나 운이 나쁘면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겠죠. 나나 당신이나 백수가 될 거고요. 이력서나 충분히 써놨기를 바랍니다."
"난 이력서가 필요없을텐데."
이단이 중얼거려서 브란트는 '와 정말 재수없다.'라고 감탄했으나 그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폭주한 센티넬은 사살이니까. 시체에겐 이력서보다 인식표가 더 필요하겠군."
"맞는 말이네요."
이단 헌트는 현실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브란트는 실시간으로 -버릇처럼- 그를 프로파일링하고 있었다. 브란트에게 프로파일링이란 얇게 정보의 포를 뜨는 일이다. 아주 얇게 그 사람의 정보와 특징을 모으고 모아서 궁극적으로 그가 어떤 인간인지 접근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 줄리아가 어디 있는지 묻는 건가?"
"센티넬은 가이드가 있어야 안정된다는 것은 유치원 교재에도 나오는 말이니까요."
이단은 브란트의 말을 들으며 머릴 넘겼다. 전보다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몸은 조금씩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단이 느끼기에 몸 상태가 100프로는 안 되었지만 적어도 7-80프로는 깨어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 기억이 안 날정도로 정신이 붕괴되어 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태이다. 게다가 이단은 손을 기억했다. 뺨에 와서 붙었던 손이 있었다.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누군가 손을 잡았다.
"모릅니다."
"실종입니까? 하지만 실종신고 기록은 없어요. 당신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신이 폭주하기 전 주까지만 해도 줄리아와 당신은 만나고 있었는데요."
이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브란트는 거짓말탐지기도 없고 누구처럼 센티넬도 아니었으므로 그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지만, 잘라 말하는 이단의 목소리는 못을 삼키는 것처럼 괴롭게 들려서 진짜처럼 들렸다. 어차피 상대는 완전하지 않다. 조사를 해보면 결과가 나오겠지.
"줄리아 없이 내가 진정된 것이 실험 결과라는 겁니까?"
"정확히는 실험은 진행 중입니다. 내가 실험체죠."
이단이 브란트를 쳐다봤다. 브란트는 고갤 저었다. 미리 말하지만, 자원한 것은 아닙니다. 빚을 진 것도 아니고요.
"이 실험이 성공하리란 보장이 있었습니까?"
"아뇨, 난 잘못되면 가족에게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통지가 갈거라는 동의서에 싸인을 했는걸요."
"근데 왜 참여했지."
브란트가 손목으로 눈을 문질렀다. 이단은 그제서야 브란트가 짧은 기억속에서 마주했던 것과 같은 옷, 같은 타이를 메고 있으며 눈가가 검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창 같은 말이 한발자국 물러나니 그제야 그의 상태가 보였다.
"그게 제 임무니까요."
"가이드가 되는게?"
"자, 미리 알아둬야할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건데 세상에서 제가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직장을 잃는 거에요. 요즘같은 시대에 의료보험도 없이 어떻게 삽니까. 두번째는 누군가 나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거구요, 마지막은 뱀인데 이건 넘어갑시다."
브란트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면서 설명을 했다.
"내 임무는 간단합니다. 당신을 쓸만한 상태로 안정시켜서 IMF가 무너지지 않게 막는 것. 그래야 내가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 같아요?"
"거짓말이 아니군."
"네, 거짓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가이드가 만들어지지."
"방식을 설명하긴 길어요. 연구원들이 말해줄겁니다, 그들이 말해주고 싶다면요. 저기 당신은 이주간 물한모금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고 잠을 전혀 안 자도 버틸 수 있겠지만, 나는 일주일간 굉장히 할 것이 많았던 데다가 어제부터 한숨도 못 잤거든요. 이제 당신이 나가서 인지능력 테스트만 제대로 해주면 난 나가서 세시간만 자고 싶은데요."
이단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맨발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브란트는 그의 발까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나보다 건강할텐데 뭘. 브란트가 천장에 달린 카메라 쪽에 수신호를 보내자 벽에서 찰칵 소리가 나면서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단은 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브란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날 싫어하잖아."
브란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천만다행이죠, 센티넬이랑 가이드는 서로의 감정상태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럴까. 이단은 처음 줄리아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약간 긴장해서 뺨에 열이 오른 여자였다. 눈이 깊고 진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진창을 살아도 저 여잔 저대로일거야. 확신과 함께 온 마음이 붕 떴다. 그녀가 가이드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게, 다행이네."
브란트는 문을 열고 기다렸다. 나갑시다, 헌트 요원. 이단은 천천히 걸어서 격리실을 나섰다. 그를 쳐다보는 수많은 눈동자는 저마다 존경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차라리 격리실 안이 더 편하겠지. 차라리 대놓고 싫은 건 싫다 말하는 남자가 더 편할 것이다.
"이단이라고 불러."
그러든가. 브란트는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단을 연구원들에게 인계한 뒤 복도 소파에 누워 세시간을 잤다. 꿈은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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