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지 못한 사람들3
(센티넬버스 AU)
이단 헌트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해가 따갑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빛줄기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또 그 바람 사이로 줄리아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붉은 색에 노란 꽃무늬가 들어간 긴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래사장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는 반짝거렸고 저 먼 바다를 옆에 두고 걸어가는 줄리아는 풍경 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녀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한 손에 샌들을 들고 있었다. 맨발로 걷는 게 건강에 좋데.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이단은 햇빛때문에 콧등을 가볍게 찡그린 채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너무 걱정이 많아! 크게 터진 줄리아의 웃음소리가 파도와 부딪혀서 산산조각난다. 이단은 따라 웃었다. 줄리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다른 손으로 모자 끝을 잡고 있었다. 모자가 날아갈 것 같아. 그녀의 손에 들린 샌들도 흔들렸다. 줄리아. 이단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줄리아는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한 손엔 샌들, 한 손엔 모자. 줄리아. 이단이 좀더 높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약간 불안해진 탓이다. 이만 돌아갈까? 줄리아가 웃었다. 아직 해가 안 졌잖아. 그렇게 말하는데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게 하고 걸음을 멈추게 할만한 바람이었다. 줄리아가 멈춰서서 돌아보나 싶었을 때 그녀의 모자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람에 먼지처럼 날아오른 모자를 향해 이단은 손을 뻗었다. 이단!
이단은 눈을 깜빡였다. 해변도, 햇빛도, 바람도 심지어 줄리아도 눈 앞에 없었다. 그는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줄리아가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자신이 잡은 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잡고 있는 것은 모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이었다. 눈으로 인지하고 나서야 손에 전해져오는 맥박이 느껴졌다. 남자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이 남자는 누구지. 왜 이곳에 있지.
"헌트 요원? 제 말이 들리십니까?"
이단은 고갤 끄덕거렸다. 남자는 좋아요, 하고 고갤 끄덕거렸다. 여전히 이단에게 목이 잡힌 상태였지만 그는 습관인지 고갤 끄덕거렸다.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IMF 특수임무지부 현장요원 윌리엄 브란트입니다."
이단은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였다. 브란트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제 저를 놔주시겠습니까?"
이단은 그가 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네, 당신이 제 목을 조르고 있으니까요."
이단은 다시 자신의 손을 쳐다본다. 남자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손에 힘을 세게 준 것은 아니지만, 힘을 주게 되면 그는 목이 부러질 것이다. 그렇군, 내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구나. 이단은 천천히 손가락부터 떼어냈다. 브란트는 이단의 손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손에 힘을 풀고 이단이 손을 늘어뜨리자 브란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이제보니 그는 불편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브란트가 옷을 탁탁 펴고서 이단의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들은 마주 앉은 상태였다.
"다시 인사드리죠. IMF-"
"특수임무지부 현장요원 윌리엄 브란트."
"맞습니다. 자기 소개도 해주시겠습니까?"
"IMF 특수임무지부 특수요원 이단 헌트."
"맞습니다."
"여긴 어디지?"
브란트는 그의 말에 눈으로 그 공간을 한바퀴 훑었다. 하얀 벽과 하얀 바닥, 그리고 한 면의 거울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 외엔 별다른 가구도 없다. 바닥에 고정되어있는 고리로부터 연결된 쇠사슬이 조금 더 방의 온도를 낮추는 착각이 든다. 몇몇 타일은 부숴지고 벽에는 금이 간 흔적이 있다. 때려부순 장본인이 전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모른 척 하는 것인지, 그 눈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유리가 깜빡거린다. 그동안 유리 너머로 봐왔던 눈을 직접 대면했어도, 그 눈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브란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IMF죠."
이단은 반복적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저릿저릿했다. 그는 손을 풀면서 자신의 왼손에 채워진 수갑을 발견했다. 브란트의 목을 잡았던 오른손을 제외하고는 왼손, 그리고 두 발목 모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팔과 다리에 매달려 무겁게 이단을 끌어내렸다. 평소같았으면 전혀 거슬리지 않았을 것들이다. 마치 온 몸이 물에 빠진 솜같이 무겁게 느껴졌다. 오른손은 어떻게 들어올렸지? 이단은 바닥에 떨어진 구속구를 쳐다보았다. 브란트는 열쇠를 들어보이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더 확인 후에 마저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날짜는 며칠입니까?"
그쯤이야 당연히 알지. 이단은 선뜻 입을 열었으나 자신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했다. 몇년도지. 2015년. 거기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오늘이 과연 며칠인지는 뿌연 기억속에 완전히 잊어버렸다. 심지어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7월 13일입니다. 오후 2시군요."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떠오르는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단편적인 기억도 좋습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브란트는 잠시 의자에 기대 앉았다. 그는 시계를 봤다. 방에 들어온 지 15분이 지났다. 가수면 상태이던 이단 헌트가 깨어나는데 5분, 인지능력을 회복하는데 10분이 걸린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나도 명확히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단 헌트는 1분이 지나면 1분만큼 더 차분해지고 조금 더 생기가 돌았다. 늘어뜨린 팔에서는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구속구를 풀자마자 목이 졸렸을 때는 이 작전은 망했다라는 생각을 했지만.
"헌트 요원, 당신은 2주전에 민간인 앞에서 허가되지 않은 진압작전을 펼쳤습니다. 삼거리에 서서 타겟에게 총을 난사했죠. 기억나십니까?"
"........"
"대답해주십시오, 헌트 요원."
이단은 눈을 굴렸다. 무차별 난사, 허가되지 않은 작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기억나지 않습니다."
브란트는 가져온 파일을 열어 신문기사 스크랩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거리에 있던 시민이 SNS에 올린 영상의 정지화면이었다. 얼굴이 조금 흐리긴했으나 누가봐도, IMF 사람이라면 알아볼만한 얼굴. 이단은 자신의 얼굴을 신문에서 확인했다.
"이후의 일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조사를 받는 겁니까?"
"조사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2주동안 기억나는 일이 있으십니까?"
이단은 브란트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손끝이 둥글었다. 딱딱하고 거칠게 보였지만 사실 가장 많이 흠이 잡힌 곳은 왼손중지 안쪽의 굳은 살이었다. 브란트라는 남자는 그 부분을 엄지손톱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멍하게 그것을 보면서도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당신은 현장요원이 아니잖아."
"맞는데요."
"그러기엔 펜을 너무 많이 잡았어. 정장을 입는데도 지나치게 익숙하고."
브란트가 자기 왼손을 쳐다봤다. 지금 제가 조사받는게 아닙니다, 헌트 요원. 그 목소리에서는 전에 없는 피로가 묻어나왔다.
"왜 사무국에서 나를 조사하지? 쇠사슬로 묶어 놓은 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현장요원-"
"똑바로 대답해. 이건 무슨 음모지?"
난 이 남자가 싫었지, 참. 브란트는 새삼 떠올렸다.
"음모에 빠졌다고 믿고 싶겠지만, 모든 것은 당신 머릿속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단 헌트, 당신은 2주전부터 정신 붕괴를 일으켰고 그때문에 격리 중입니다. 격리 중에도 세 명의 의료진과 두 명의 연구원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모든 기록은 녹화되었으니 제 말을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IMF 지침상 정신이 붕괴된 센티넬은 즉각 격리 후 파면조치가 맞지만, 당신이 이제까지 이룩한 공로를 인정받아 2주라는 시간 여유를 준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단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과 자신이 묶여있는 모습을 교차해보면, 눈 앞의 남자가 말하는 것이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더불어 먹먹한 머리와 묵직한 팔 다리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센티넬의 정신붕괴에 대해서 늘 책과 이론으로만 접해왔지만 정신이 붕괴되면 몸에 대한 컨트롤을 잃어버린다고 들었다. 그걸 다시 찾아오는 과정이라면 당연히 지금의 무기력이 설명된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내 정신이 붕괴된지 2주가 지났다면, 난 이미 자력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일텐데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지? 줄리아가 와있나?"
"그게 바로 제가 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브란트는 신중하게 물었다. 줄리아 앤 미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단은 곧장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 거렸다. 줄리아는 병원에 있겠지. 늘 그랬으니까. 그러나 브란트가 그걸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줄리아가 사라졌나? 줄리아가 왜.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단은 머리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단이 머릴 감싸쥐자 브란트는 한걸음 물러섰다. 아까와 같은 상황을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단 헌트?"
이단은 대답도 못하고 간신히 숨을 몰아 쉬었다. 줄리아의 원피스 자락이 뺨에 스칠듯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어깨까지 떠는 이단을 보고 브란트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댔다.
"제 말 들립니까, 헌트 요원?"
파도처럼 밀려든 통증이 서서히 물러갔다. 이단은 점차 안정되는 시야 속에서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브란트는 피곤해 보였고, 결코 유쾌해보이지도 않았지만 이단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가이드를 잃어서 정신이 붕괴된 겁니다.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당신에게 새로운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그런건 불가능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브란트는 여전히 그의 뺨에 손을 붙이고 있었다.
"아마도 가능한 모양입니다."
이단은 푹 젖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브란트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단 헌트, 절 똑바로 보시고 대답하세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물었다. 내가 당신의 가이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대체 뭐라고 하는거지. 이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뺨에 닿은 손은 참으로 따뜻했고 그때문인지 몰라도 이단이 다시 정신을 놓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그는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이단은 새삼 자신에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야기 하는 것이 줄리아 이후에 처음있는 일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인지능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너진 정신이 조금씩 다시 벽돌처럼 쌓여간다. 이단은 이 어이없는 남자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이 남자는 날 싫어한다. 센티넬의 뛰어난 감각은 그것부터 이단에게 알렸다. 애초에 가이드는 운명처럼 지어지는 것이다. 누가 되고싶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습게도 이단 헌트는 그의 눈을 마주치면서 진정되는 자신을 발견했고 덕분에 말문이 막혔다.
"...정말 가능하면 어쩌나 했는데."
윌리엄 브란트는 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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