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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미임파 이단브란 / 잠복


잠복




나는 나무 위에 앉아있다. 해가 진 직후에 올라왔으니 근 세시간쯤 되었다. 이따금 나무를 타던 청솔모들이 기웃거리긴 했지만, 고맙게도 그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다. 문득 입이 바짝 마른 느낌이 든다. 물을 마시지 않은지도 세시간쯤 된 것이다. 이제 거리는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었고 어둠에 저항해보고자 하는 소심한 가로등들이 눈에 불을 키고 늘어섰다. 나는 나무의 어두운 이파리 사이로 고정해놓은 망원경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창문이 닫힌 집은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그가 언제쯤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의 스케쥴에 대해서, 문의를 하면 당연히 답을 얻겠지만 나는 묻지 않았고 대신에 그의 집 앞 공원에서 잠복하는 것을 택했다.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다리던 날들은 꽤 지나버렸다. 일이 끝나면 알아서 퇴근해서 알아서 만났다. 그런 시절에도 '오늘 뭐해?'같은 것은 묻지 않았었던 것 같다. 보고싶으면 찾아가면 되고 문이 닫혀 있으면 열면 됐다. 물론 브란트는 질색했었지. 유치하지만 그가 질색하는 표정을 하면 나는 그것이 괜히 반가웠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현장을 벗어났고 상황실에서 모니터와 인이어를 통해 나와 만났다. 내가 벨라루스의 여관방에서 무기를 점검할 때 그는 청문회에 나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혹은 부인했다. 그가 아침에 몇시쯤 출근을 하는지 또 퇴근을 몇시쯤 하는지 파티엔 얼마나 자주 나가는지, 어느 틈엔가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여기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다. 핸드폰을 꺼내서 브란트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가 받으면 '안녕, 오랜만이네.'라고 말하고 그가 뭐라고 투덜거리면 '요즘 어때? 많이 바빠?'라고 묻고, 그쯤 되면 왜 안하던 짓을 하냐고 의아해할테니 '그냥 보고싶어서.'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브란트는 묘하게 마음이 약하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다 대답해줄 것이다. 문도 열어 줄 것이고. 문제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결박당한 채 앞에 나타난 체첸반군에게도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볼 수 있고 파티에 잠입해서 세계 제일의 암살자에게 보고싶었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건 IMF 요원 이단헌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미션이 다 끝나고 내가 '아무 것도 아닐 때'가 되면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나'를 드러내는 것은 130층에 매달리는 것보다 어렵다. 유능한 -내가 봐도 나는 유능하니까- 요원이 하고 싶은 말을 못할 때에는 여러가지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보고 싶다는 말을 못해서 보고 싶은 사람 집 앞에 잠복하는 일이 발생한다. 여러가지로 너무나 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집 앞에서 잠복한 지 이틀째에 그가 집에 돌아왔었는데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블라인드를 반만 올려서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거실을 좀 돌아다니다가 티비를 틀어놓고 아마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가서 문을 노크해볼까 했지만 이미 잠든 것 같아서 괜히 어려워졌다. 어제는 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다. 앞으로 두어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내려와."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음, 실수했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브란트가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모른 척 할까 하다가 이미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망원경을 접어 아래로 내려갔다. 브란트에게는 약간 술냄새가 났다. 목까지 꽉 끼는 정장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파티라도 참석을 했든지 아니면 데이트라도 하고 온 모양새였다. 이건 예상을 못했는데.

"안녕, 브란트."

내가 망원경을 정리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자 브란트가 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거렸다. 젠장, 이단,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볼 일이 뭔데."
"비밀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웃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내 얼굴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어우, 하고 진저리를 치며 내 멱살을 잡을듯 다가왔다. 

"진짜 이렇게 등신같이 굴거야?"
"내가 뭘."

나는 훈련받은 요원이다. 이정도로 모르쇠를 놓는 건 아무 일도 아니지. 브란트는 내 옷깃을 쥔 채 한참 노려보다가 눈이 조금 감긴다 싶을 때 나를 밀쳤다. 그가 나의 쇄골을 눌러서 나는 힘없이 나무에 등을 기댔다. 입술이 가까웠다. 술냄새가 났다. 브란트는 웅얼거렸다.

"여긴 왜 왔어, 이단."
"취하고 싶어서."

나는 그의 뒷목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이빨끼리 부딪히고 숨이 틀어지는 키스였다. 문득 나 입술이 너무 건조할텐데 하는 지극히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브란트의 혀가 몹시 뜨거웠는데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더욱 그의 몸에 붙고 싶은 열기였다. 키스는 진득하고도 짧았다. 브란트가 다시 나를 팔로 내리누르며 고갤 들었다. 눈에는 비난이 가득하다.

"등신아."
"알아."
"나 좀 부축해봐."
"여기까진 어떻게 온거야?"
"택시."

나는 그를 부축해서 그의 집에 데려다 줬다.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집이었다. 문지방을 넘을까 고민할 때 브란트가 소파 앞에 주저앉아 넥타이를 풀며 나를 올려다봤다. 뭘 더 고민한담.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물어보니 옆집에 사는 꼬마가 나를 제보했다고 한다. 8살 꼬마에게 잠복을 들키다니 나도 현장일은 끊어야 하는거 아닐까 하고 말했더니 브란트가 킬킬거리며 꺼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