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의 무서운 이야기
(마르님 리퀘)
옐로우 썬 로드. 그게 우리가 누워있는 이 모텔의 이름이었다. 우리가 감시중인 자산이 국도를 탈 때부터 기울어가는 배처럼 좋지 않던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 맞았다. 남부로 향하는 넓은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그나마 가장 건물다운 형태를 띄고 있는 이 모텔로 들어가는 차를 보며 오늘밤도 어김없이 노숙이로군, 생각했지만 이단은 자연스럽게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산이 카운터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짓이야?라고 따져 물었지만 이단은 그저 '자연스럽게, 브란트, 그게 핵심이지.'라고 말하며 차에서 내려 버렸다. 우린 201호 키를 받았다. 자산은 203호. 나는 각각 202호와 201호를 잡고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단은 차키를 흔들며 '차가 한대인데 방을 두개 잡아? 남자끼리?'라고 말해서 결국 방을 하나만 잡았다. 모텔은 외관에서만큼이나 내부도 엉망이어서 32도를 넘나드는 날씨에도 에어컨이 없었다. 방의 한 가운데에 놓인 더블 침대를 쳐다보며 나는 이단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들어보였는데 이단이 그걸 받아서 먹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김이 샜다.
욕조는 묘한 초록색을 띄고 있었고 잘못 잡으면 병에 걸릴 것 같아서 나는 욕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처음엔 녹물이 나오던 세면대는 그나마 물을 틀어놓으니 정상적인 물이 나오긴 했다. 이단은 그런 환경에서도 아랑곳않고 -그러나 그도 욕조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방안도 둘러보고 의자에 앉아 티비도 틀었다. 창문에 내린 블라인드 사이를 벌려 밖을 구경하면서 이단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우린 그런 풍경에 익숙하다. 스파이라는 직업은 화려한 면도 분명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기다리는 일이었다. 모래에 몸을 반쯤 묻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아는 얼굴이 시야에 나타나는지 기다려야 하고 구급헬기가 뜨는지 기다려야 하고 약속된 폭죽이 터지는지 기다려야 한다. 우린 그런 일을 많이 했다. 익숙하다고 해서 좋아질리는 없다. 나는 황무지라면 혀를 찬다. 내가 초원이나 숲을 좋아하는 것은 그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원 위의 집이 한 채 있고 호수가 가까운 풍경이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데크에는 흔들의자를 놓고 옆에는 늘 맥주가 가득찬 아이스박스가 있는 풍경이다. 문 앞에는 물방울 모양의 풍경이 달려서 계속 영롱한 소리를 내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나아지는 기분이다.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은 내 비밀쉼터다. 이단 헌트나 줄리아나 테러리스트, 기타 등등의 문제들을 하나도 들여놓지 않은 쉼터였다. IMF를 그만두면 그곳으로 갈 것이다. 이미 짐을 반쯤 옮겨 놨으니 사표만 내면 된다.
옆방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티비소리 외에는 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 또 기다리는 일이다. 아침이든 밤이든 자산이 일어나서 이 모텔을 나갈때까지, 그리고 목적지에 갈때까지 우리는 그를 따라가야 한다. 자산이 멈추면 우리도 멈춘다. 이단이 1층에서 음식을 좀 사왔다. 기름에 쩐 감자튀김은 양념도 잔뜩 뿌려져 있어서 콜라를 엄청나게 많이 마셔야했다. 게다가 좀 매웠다. 이단은 늘 그렇듯이 인간같지 않은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매운 양념이 묻은 감자튀김을 먹었다. 안 매워?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물었으나 그가 웃는 꼴을 보아하니 또 나를 놀리려는 것 같아 즉시 입을 다물었다.
교대로 벽에 붙어서서 옆 방의 소리를 체크하는 것 외엔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너무 더웠다. 해가 지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열대야는 피부에 달라붙어서 나를 괴롭혔다. 이단이 먼저 옷을 훌렁 벗어서 나도 옷을 벗었다. 땀에 젖은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서로 맨몸을 보는 일이 낯설지는 않았다. 일때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끔 '동하면' 같이 자기도 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다. 우린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진드기랑 남의 정액이 있을지 알아?"
"그걸 모르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 브란트?"
"절대로, 절대로 행복하지 않거든?"
"더워서 그래."
"그래, 망할놈의 날씨."
등을 꺼버려서 방은 어두웠다. 서로 끈끈할게 분명한 몸은 닿지 않도록 무언의 약속을 했는데 이단이 옆으로 돌아누워서 나를 쳐다봤다.
"쳐다보지마. 더워."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지. 네가 흥분하는게 내 탓이야?"
"흥분안했거든? 꺼져, 이단. 안그래도 더워서 옆방으로 치받고 싶으니까."
"더울 때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진심이야? 라는 뜻을 담아 최고로 역겹고 유치하다는 얼굴을 지어보였는데 이단은 어둠때문에 못 본건지 못본 척을 하는 건지 싱겁게 웃었다.
"진짜야. 더운 곳에서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 체온이 내려간다고."
"우리가 사하라에 파묻혀 있을 때는 그런 얘기 안 했잖아."
"그땐 말하면 안됐잖아."
"지금도 안되거든?"
나는 침대 머리맡을 가리켰다. 옆방과 닿아있는 벽은 음침하게 서 있었다. 이단이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자, 너부터 해봐."
"뭐, 무서운 얘기? 그런거 몰라."
"시시하게 이럴거야?"
이단은 집요하기 때문에 이정도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서 이단 쪽으로 틀었다.
"내가 현장에 나간지 1년차 됐을 때 이야기인데, 그때 나는 프라하에 가 있었어. 요인경호여서 불침번을 서는데 같이 섰던 놈, 잭슨인가 하는 놈이 자꾸 다리를 떠는 거야. 거슬리잖아. 그래서 내가 '이봐, 다리 좀 그만 떨어.' 하니까 잭슨이 날 쳐다보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묻더군. '다리는 떠는 건 너잖아?' 우리 둘다 가만히 있었던 거지. 방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고 옆 방에서는 요인이 자고 있었어. 근데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거야. 초조하게. 잭슨이랑 나는 밤새 그 소리를 들어야 했고. 이게 끝이야."
"오, 서늘한데. 공사를 하거나 한 것도 아니고?"
"아니고. 그런 오래된 건물은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 아무튼 이제 됐지?"
나는 다시 등을 데고 누웠다. 이단이 내 옆에 좀더 붙으며 말했다. 아직 내 차례 안 끝났는데. 나는 할 테면 하라는 식으로 눈을 감았다. 이단은 혼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얘기는 아니고. 화가 난 사람의 이야기야. 어떤 사람이 화가 났어.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매우 화가 난 사람이야.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는 운전을 했어. 갈 곳은 정해져 있었고 밤을 달렸지. 그는 초원을 가로지르고 호수를 건너면서 밤새 운전을 했어. 새벽즈음 됐을 때, 아마 4시정도,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어. 호숫가의 조용한 집이었지. 정원은 이제 막 다듬어서 푸른 기운이 돋고 새벽이라 조금 더 물기가 젖은 느낌으로. 그는 데크에 올라갔어. 삐그덕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데크를 한 바퀴 돌아보니 거실 창이 열려 있기에 그 안으로 들어갔지. 집안은 적막하고, 아늑했어. 초록색 러그가 깔린 거실, 서툰 솜씨로 깎은 나무병정들이 창틀에 늘어져 있고 가족사진도 테이블에 놓여 있는 평범한 집안이었어. 남자는 이제 굳이 화를 참지 않기로 결심했어. 아까 말했다싶이 너무 화가 났으니까. 그는 장갑을 낀 채 거실을 구경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어. 방 2개는 비어 있었어. 마지막 방에서 그는 자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지. 머리가 베개 위로 흐트러진 여자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어. 그곳은 너무 조용한 곳이고 외진 곳이어서 다른 사람이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그는 침대 옆에 또 하나의 사람을 발견했어. 아기 요람에는 아기가 자고 있었지. 정말 귀여운 아기였어. 울지도 않고 잘 자고 있었지. 남자는 총을 꺼냈다가 다시 품 속에 넣었어. 생각이 바뀌었거든. 1층으로 내려와 전자레인지 안에 호일을 넣고 가스관을 빵 자르는 칼을 찾아내서 비스듬하게 갉아놨어. 전자레인지에 예약 버튼을 눌러놓고 남자는 다시 데크로 나왔어. 그리고 테이블 옆에 있는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지."
이단은 어느새 내 어깨를 누른 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제 하나, 이 이야기는 진짜일까, 거짓말일까."
나는 그를 밀어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전심에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혔다. 상대는 이단 헌트였다. 원하는 것은 모두 해내고 마는. 불가능이 없는 남자.
"문제 둘, 그 남자는 화가 풀렸을까 안 풀렸을까."
어때, 무섭지. 이단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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