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뒤
1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것이 특정하여 '나'일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를 돕기로 했다.
2
폭탄은 그가 막 차에 올라 시동을 켜자마자 터졌고 그는 20m 떨어진 콘크리트 바닥에 엔진으로 추정되는 쇳
조각들과 함께 처박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다들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외상을 치료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이단은 공식적으론 휴가중이었다. 식당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이단 헌
트가 휴가를 가다니 진짜야?'라고 물을 때 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죽상을 했다. 말도 마. 갑자
기 사춘기 소녀처럼 자아찾기라도 하러 갔나봐, 덕분에 죽어난다고. 그리고 모두 낄낄 웃고 헤어지곤 했다.
팀원 누구도 3개월간 이단을 보지 못했다. 마침내, 면회가 가능한 날이자 퇴원하는 날이 왔다. 카터는 꽃이
라도 사야하냐고 물었지만 그 말에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빈손으로 그의 병실을 찾았다.
그는 침대 위에 있었다. 아직 군데군데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이단 헌트가 맞았다. 벤지가 들
뜬 강아지같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는데 나는 그 농담을 놓쳤다. 나는 줄곧 그의 눈 위에 감
긴 붕대를 보고 있었다. 곧 카터가, 그리고 벤지가 그 붕대의 존재감을 알아채기까지의 텀동안 나는 계속
그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3
그의 눈이 멀었다고 했다.
다행히 의료진은 희망적인 계산을 덧붙였다. 시신경이 손상되진 않은 것 같으니 회복을 기다려 봅시다. 누
구도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의 생존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이단 헌트라는 그의 이름에서 그 기적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가 눈을 다쳐서 앞이 안 보인다는 소리는 어쩐지 억울하게 들렸다.
이단 헌트의 눈이 멀었다는 소식은 IMF 내에서도 기밀에 붙여졌다. 이단은 긴 휴가를 보내는 것으로 처리
되었다. 그의 사고 소식이 기밀에 붙여진 것과 같은 이유로 눈이 안 보인단 소식도 기밀에 붙여졌다. 그는
그런 일을 겪여서는 안 될 사내였다. 이 모든 것이 지난 뒤에 그가 다시 현장에 복귀한 뒤에야 꺼낼 수 있
는 이야기였다. 일단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했다. 덕분에 이단 헌트라는 이름은 당분간 봉인되었다.
그의 거주가 문제되었다. 지내던 곳으로 가야할지 IMF내에서 운영하는 시설을 가야할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
다. 시설로 가는 것이 가장 덜 신경쓰이는 절차였다. 24시간 돌아가는 감시카메라, 늘 붙어있는 간호인, 완
벽하게 제공되는 의료시설. 푹신한 침대와 오고가는 사람들만 아니라면 일종의 감옥과도 같았다.
나는 손을 들었다. 발언권은 없었지만 누군가 봐줄때까지, 손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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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뒤의 물러앉은 간부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그를 맡게 되었다. 그들은 이단 헌트라는 불완
전한 영웅을 저들 손에서 잠시 떨어뜨려 놓는 것을 마뜩찮아 했지만 그 사실 자체를 외부에 공표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이단은 내 플랫 메이트가 되었다. 그가 내 부축을 받아 엘레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계단을 4층가량 올라와
현관문 앞에 서기까지 그의 의견은 1g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입이 무거운 남자인 것은 맞았지만
그 전에, 누구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그를 부축해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치운다고 치웠으나 남자 혼자 사는 집은 번잡했다
. 나는 구태여 쇼파 위에 널부러진 빨랫감에 대해 변명하려다,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를 쇼파위에 앉히며 널부러진 셔츠를 한데 구겨 세탁실 쪽으로 던졌다.
'누추한 꼴을 못봐서 다행이네, 이단.'
별로 좋은 농담은 아니었다. 이단은 그냥 있었다. 웃었던 것도 같고, 무시 한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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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맡겠다고 나선 것은 나였지만 정작 그를 집안에 앉혀 놓고 당황한 것도 나였다. 뭐부터 해야하지. 주
방과 거실을 서성거리는 동안 이단은 내가 앉혀 놓은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고 눈이 안 보이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도 이해할 수 있었지
만 이단 헌트는 그보다 더 강한 자아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그런 그의 침묵은 다가서기 어려웠
다.
앉아, 브란트.
그가 긴 침묵을 깨고 말했을 때 나는 찬장의 시리얼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집에 이렇게 먹을 것이
없다니! 나는 먼지투성이의 두 손을 바지에 아무렇게나 닦으며 그가 앉은 쇼파 앞 테이블에 앉았다. 얼추
비슷한 높이에 나의 눈과 그의 붕대가 마주쳤다. 이단은 또 말이 없었다.
곧 나을거야. 그 폭탄속에서도 살아 남았잖아. 이단 헌트니까, 나을거야.
그의 손이 쇼파위에 올려져 있었다. 흉터가 많고 거친, 큼직한 손. 나는 그 손을 쥐어 잡고 싶은 충동이 들
었다. 거칠어 보이지만 따뜻할 것이다. 손목에선 맥이 뛰고 손바닥 가장 안 쪽은 그래도 부드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를 일으켜 집안의 동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문부터 시작해서 벽을 짚고 몇 걸음에 화장실이 있는지, 어디가 침실인지, 어디가 부엌인지. 이단은 금방
외웠다. 나는 그의 보행에 방해가 되는 가구나 장식은 모두 치웠다.
원래 장식이 없는 집이었지만 더욱 황량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그 황량한 모양새는 내가 볼 뿐이었고
이단이 동선을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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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위해 내 침실을 내줬다. 원하면 침대 커버도 새것으로 바꿔줄게. 그는 괜찮다고 했다. 농담이야,
주는 대로 그냥 자. 그가 짧게 웃었다. 나는 거실에서 지냈다. 쇼파는 푹신했고 혼자 맥주 마시다 뻗어 잠
드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에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주말 동안 이단은 금새 집안의 동선을 외웠다.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조용히 나타나 그 자
리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그는 말이 적었다. 처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떠들었다. 내가 신경쓰고 있
다는 걸 그에게 보여줘야 할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나도 말수가 줄었다. 지금
의 그는 입구가 좁은 병과도 같아서 최소한의 키워드만 그에게 접속되었다. 가만히 앉은 그의 등이, 그 순
간마저 곧게 펴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등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가 빠져
있는 거대한 혼란을 내비치기는 했다.
그가 침대에 누우면 나는 방의 불을 꺼주고-사실 그에게 불은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그의 기분을 상
하게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했으나 그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문을 반쯤 닫았다. 그리고 문틀에 서서
그 틈으로 그를 지켜 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되면 꼭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뒤척임이 줄어들고 숨소리가 평온해 질쯤이면 나는 그제서야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
고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로 이동해서 쇼파위에 몸을 구기고 잠을 청했다.
7
팀은 잠정적으로 정지기간이었다. 벤지는 주로 IT팀에 백업을 갔고 나와 카터는 번갈아 가며 몇몇 작전에
임시적으로 파견되었다. 모두 이단 헌트에 대해 궁금해 했다. 우리 세사람은 고심끝에 각자 다른 이야기를
퍼뜨리기로 했다. 내기를 했다. 제일 많이 소문이 나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나는 이단이 그 긴 순애보를
깨뜨리고 바람이 나서 여행을 떠났다는 소문을 냈다. 벤지는 이단이 무허가 살인을 (또) 저질러서 도피 중
이라고 했고 카터는 그가 새로운 국장으로 임명받기 위한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러 떠났다고 했다. 누가 이
길지는 해볼만한 일이었다.
이단이 복귀하면 아마 우릴 죽이려 들걸, 벤지가 맥주를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카터도 벤지도 내가 그를
맡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정보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다. 안전을 위해서 라고 말했지만 그건 은폐를 위해서
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단을 위해, 라고 건배했고 다들 술을
한병씩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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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에 있을 때엔 괜찮았지만 외출을 할때가 신경쓰였다. 나는 잔소리많은 아줌마처럼 이것저것 말을 늘
어 놓았지만 이단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중에는 조용하게, 브란트 하고 내 말을 끊었다. 괜찮으니
어서 가. 사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단은 동선대로 움직였고 거실 테이블에 식사를 챙겨두면 알아서 먹었
다. 그러나 나는 초조했다. 나는 잠시 현장에서 물러나 분석업무를 맡겠다고 했다. 어차피 공식적으로는 나
도 휴가중이잖아요. 그 일이라면 집에서 있는 시간도 길고 집에서 일할 수도 있다. 국장은 오래도록 고심했
으나 결국은 허가가 떨어졌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다는 것은 내가 그와 있는 시간이 길어진 다는 것이었다.
이단은 서서히 회복중이었다. 그것은 천천히 눈이 녹듯이 아주 미묘한 수준이었으나 하루종일 그의 동선이
며 표정을 펴다보는 내게 있어 명확하기도 했다. 중국음식을 시키자 불평하기도 했다.
이단의 하루는 단순했다. 이제 완전히 그의 자리가 되버린 1인용 쇼파에 때로는 반듯하게 때로는 무릎을 세
워 앉아 햇빛을 쬐거나 음악을 듣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일과였다. 나는 그 근처에서 일을 하거나 책을 보거
나 티비를 보거나 했다.
사실 그러는 척 했다. 내 가장 큰 일과는 이단을 보는 일이었다. 그의 등을, 그의 옆모습을, 그의 정면을.
그가 눈이 먼 것이 기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주어진 기회에 감사했다. 그의 큰 손을 잡지는 못했으나 가
까이 두고 살펴볼 수는 있었다.
그가 나를 보지 못한 후에야 나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9
처지가 처지인 만큼 그는 내 도움을 무리없이 받아들였으나 씻는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완강했다. 결국은
욕실에 긴 손잡이를 달아 그가 욕실을 거니는데 무리가 없게 하고 혼자 샤워하는 대신 머리는 내가 감겨 주
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붕대를 풀어야 했다. 한 바퀴 두 바퀴 붕대를 풀면서 이상하게 긴
장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이단의 초록색 눈과 마주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단의 눈은 흉터가 남은채로 감겨
있었다. 빛이 들어가면 좋지 않기 때문에 불도 켜지 않은 욕실에서, 이단이 욕조 밖으로 머릴 기대고 누웠
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머리위에 미지근한 물을 붓고 더듬더듬 샴푸를 찾아 거품을 냈다. 어둠속에
서 이단의 얼굴이 보였다. 눈꺼풀 주변에 자잘한 상처들은 이제 아물고 있었다. 흉이 질까. 안 졌으면 좋겠
다. 이단이 갑자기 브란트, 하고 부르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머리를 놓칠 뻔 했다.
왜.
긴장하지마.
긴장 안 했어. 나는 부러 더 서툴게 이단의 머리를 감겼다.
결국 내 옷도 젖고 이단도 물 세례를 맞은 꼴이 되었다. 수건으로 머릴 털어주다가 이단이 바람 빠지는 소
리와 함께 웃기시작해서 내가 웃지마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결국 머릴 다 말리기 전에 박장대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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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밤 그가 잠든 침대 발치에 앉아 그를 보았다. 그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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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늘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가 IMF에 처음 들어올때도, 지금도. 이단 헌트와 같은 사람은 두 번 없을
거라고 모두 공공연히 말했다. 그런 그의 경호임무를 맡았을 때 벅찼던 감정은 그 임무에 실패해서 그의 아
내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깊었다. 모든 사실을 밝히고 그가 나에게 실패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깨달
았다. 모든 것은 이단 헌트때문이었다. 내가 절망한 것도 벅찼던 것도 다시 살아나는 감정들도. 나에게 있
어 그는 영원한 우상이며 반드시 함께하고픈 동료였으며-
욕심나는, 사람이었다.
과거형이 아니다.
그는 욕심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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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손을 보다가 정확히는 왼손 약지를 보다가 갑작스레 그의 아내 줄리아가 떠올랐다. 그녀의 이름
은 내게 불청객처럼 다가왔고 그저 생각일 뿐인 것을 마치 이단이 보기라도 했을까봐 그의 얼굴쪽으로 눈을
올려 보았다. 당연히 그는 보지 못 했다. 그러나 이단이 이미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다치기 전
에, 함께 일한 얼마의 시간동안. 그는 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의 얼굴을 보자 그 얼굴은 하나의 물음표처럼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이 곳에 있는
것이 싫은지 좋은지 불편한지 편한지
그녀가 보고 싶은지
무엇을 붙여도 모두 그럴싸해보여서 도리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얼굴이 어딘가를 향해 고갤 기울이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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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데려온 뒤로 나는 TV를 끄고 낡은 라디오를 꺼내놓았다. 그가 주의깊게 듣는 것 같진 않았지만 가끔은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날 나온 사연 중 웃긴 것을 내게 말해주기도 했으니 그정도면 잘
듣고 있는 편이었다.
미식축구 중계를 들으며 중국음식을 먹는 것은 재미있었다. 소리로만 경기를 듣는 것은 꽤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식사를 하다가 중요한 순간이 오면 젓가락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터치 다운이
끝나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질을 시작하곤 했다.
이단은 내가 놓치는 부분까지 모두 들었다. Damn, 귀까지 좋다니. 불공평하잖아. 내가 투덜거리자 이단은
웃으며 난 눈이 안 보이잖아 라고 해서 나는 잠깐 말을 못했다. Fuck, Brandt, F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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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이 두 페이지쯤 넘어간 언저리였다. 집으로 오는 의료진은 세심하게 이단의 상태를 체크했다. 호전되고
있어요. 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의 호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이단은 붕대를 둘러야 했다.
브란트, 부탁이 있는데.
그가 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나는 들여다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즉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뭔데. 그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뺨으로 쏟아지는 햇빛 등으로 그는 창문 위치를 귀신같이
잘 알았다.
좀 걷고 싶어.
기분이 좀 나아지면서 이단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봤자 간단한 덤벨운동과 푸쉬업
정도가 전부라, 운동중독이라고 봐도 좋을 그의 취향에 들어맞진 않았을 것이다.
Nope. 위험해.
난 고개까지 저었다. 습관이란 무서워서 상대가 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는 창턱을 손으로 짚고 있
었고 창 밖을 내다 보듯 몸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비스듬한 뒷모습과 턱 언저리를 봐야 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뜨끔했다. 목소리로 위치를 알고 눈이 멀쩡할때의 습관대로, 아마도 눈이 멀쩡했
다면 나를 보며 한박자 느리게 브란트, 라고 짧게 내 이름을 끊어 말했을 그 습관대로, 움직이는 것 뿐이지
만 나는 그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또 스스로 그걸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브란트. 전혀 조르지 않는 어투로 그가 분명하게 졸랐다. 자네가 함께 걸으면 되잖아.
촌스럽게도, 나는 그만 서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단은 붕대를 풀렀다. 어차피 눈 감고 있을 거니까 상관없어, 남들 보기에 괴상하잖아. 대신 나는 옷장을
뒤져 구겨진 뉴욕 양키스 캡을 꺼내 이단의 머리위에 씌웠다. 가만 있어봐, 이것도 써야해. 나는 선그라스
를 집어 들었다. 마주 선 그의 얼굴은 깎은듯이 단정했다. 이단의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지. 초록색이었던가
갈색이었던가. 그의 눈꺼풀은 단단히 닫혀서 답을 알려줄 수 없었다. 그 답지 않게 파리해보이는 얼굴 위에
불규칙하게 패인 붉은 흉터들이 눈 위에서 아른거리면서 기억을 방해했다. 결국 난 그의 눈 색을 떠올리지
못하고 그의 얼굴 위로 천천히 선그라스를 씌웠다. 그의 눈꺼풀이 점차 사라져갔다.
좋아, 제법 관광객 같네.
나는 그와 세블럭을 걸었다. 마침 비가 내린 직후여서 거리는 약간 축축한 비와 침울한 냄새가 났다. 이단
을 길 안쪽에 세우고 나는 그의 오른손으로 내 왼팔을 붙잡도록 했다. 오후 4시 반, 점심과 저녁 사이의 어
중간한 시간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적었다. 나는 일정한 속도로 걷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춥지 않아 내지
는 나오니까 어때 정도의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약간 긴장되어 보이는 이단의 뺨을 보고 그만두었다.
세 블럭을 지난 뒤 코너에 있는 가게에서 간단한 음식과 맥주를 산 뒤 돌아오는 길에도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걸음걸이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팔을 잡은 단단한 손에 온 신경이 쓰느라
산책길이 평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아파트에 도착하고 문이 닫히자 그의 손은 내 팔에서 떨어졌다. 나는 사온 것을 식탁에 올려 놓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땠어. 그는 혼자 선그라스를 벗고 모자를 벗으며 그제서야 한번쯤 씩 웃었다. 살것같더군.
나도 좋았어 라고는 말하지 않고 나는 맥주를 냉장고에 채워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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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을 깼다. 꿈에서 예전에 맡았던 미션들을 다시 보았다. 어두운 거실 천장을 멀거니 보다 일어나
조심스럽게 침실문을 열었다. 관리를 잘 해둔 문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문가에 서서 자고 있는 이단
을 보았다. 꿈에서 이단은 부르즈 칼리파에 매달리고 소리치고 뛰어다녔다. 그러나 현실의 이단은 바로 여
기에 있다. 내 침대 위에, 내 시선 위에.
어떤 것이 더 잔인한 건지 잘 모르겠다. 꿈에서 이단은 웃고 떠들고 농담도 하고 카터와 벤지 외에 다른 인
물은 나오지도 않지만 결국 그건 꿈이다. 현실에서 이단은 나와 함께 지내지만 그에게는 아내가 있고 더 대
단한 것은,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쇼파 위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꿈을 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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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어, 뭐라고? 미안 못들었어. 그는
다시한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줄리아에게 연락해야 할 것 같아.
다시 못들은 척 해볼까 했으나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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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반대했다. 팀원에게도 알리지 않은 1등급 보안이다. 이단, 그녀는 민간인이야. 자네도 줄리아도
드러나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잖아. 규칙은 규칙인거 잘 알잖아? 나는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며 성
급하게 말했다. 이단은 일인용 쇼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차분했고 나는 서둘렀다. 반대여야 하는데, 늘 이
런 상황이었다.
아주 가끔 전화를 하곤 했어. 1-2분 정도. 그러나 우리만의 패턴이 있었지. 그녀는.. 걱정하고 있을거야,
전화를 하던 시기가 지나서.
그래서 뭐, 아직도 네 결혼생활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려는 거야? 나는 간신히 그렇게 말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어쩔 수 없어, 이단. 걱정하는 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야. 아니면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고.
그게 싫어서 내가 그녀와 떨어져 지내는걸, 자네는 알고 있잖아.
이단은 머리가 좋다. 감이 좋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아직 채 다 떨쳐버리지 못한 크로아티아의 일을
둘러 상기시켰다. 규칙은 규칙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경호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때문에 줄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상황은 기분나쁠만큼 정확하게 떠올랐다.
브란트, 어쩌면 지금 내가 정신적으로 나약해진 상태일수도 있어. 이단이 말했다. 그래도, 연락해야겠어.
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일회용 선불폰을 사와 줄리아의 전화번호를 눌러주고 그의 손에 핸드폰을 넘겨
준뒤 나는 잠시 집을 나왔다. 어딘가로 가버려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내 집은 그곳이
었다. 집에는 이단이 있다. 걱정할지도 모르는 부인에게 위험을 무릎쓰고 전화를 거는.
FUCK. 나는 가로등에 등을 기대고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이단은 무슨 얘길 할까. 사랑한다고 할까. 하겠지
.
한참 밖에 서 있다 집으로 올라갔다. 이미 통화는 끝나있었고 이단은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나는 선불폰을
치우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맙게도 이단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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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이 화색을 띄고 찾아왔다. 진행 할 수 있는 수술을 고려해봤습니다. 수술 후엔 예전처럼 생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단은 딱히 활기를 띄거나 흥분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입가끝이 올라가 있는 것이 오전 내내 기분
이 좋아보였다.
그가 나를 보지 못해 다행이야.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집안의 유일한 암소가 송아지를 낳다가 암소도 죽고
송아지도 죽어버린 농부같은 얼굴이군.
이제 곧 그는 붕대를 풀고 수술을 받고 다시 눈을 뜰 것이다. 다시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위험 속으로 몸
을 던져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단 헌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공을 세우고 전설같은 무용담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제 그가 내 아파트를 나갈 시간이 카운트다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받
아들여야 했다.
정해진 일이라고 해도 원치 않는 일을, 뇌는 알아서 지워버린다. 마치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나서
그 일이 일어날때쯤이 되면 현실이 슬그머니 찾아와 뒷통수를 세게 치는 것이다. 정신 차리라고.
자고 있는 이단의 머리맡 침대 옆에 주저앉아 그를 쳐다보다 문득 이대로 이단이 영영 앞이 보이지 않는다
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다른 공격을 받건 수술이 실패하건 기타 등등의 이유로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한다
면.
그럼 그는 이 곳에 계속 머물까? 라디오를 듣고 내 수발을 적당히 거절하고 적당히 받으며. 퇴근 후에 돌아
오면 집안 어딘가에서 그 차분한 목소리로 왔어, 브란트? 라고 말해줄까.
사실 답을 알고 있다. 아니다. 그는 영영 눈이 먼다고 하면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 곳에 있는 이유
는 상부에서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고 그의 부상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영영 눈이 먼다면, 그는 그의 아내
줄리아에게로 갈 것이다. 이름을 바꾸고 새 신분을 얻어 그의 아내를 되찾아 이렇게 되서 차라리 다행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울었다. 운다는 것은 어딘지 창피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느낌을 주었으나 그까짓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는 순간마저 울지 못한다면 숨도 쉬지 않는 편이 좋다. 여러
이유를 붙여 울었다. 그의 부상이 안타까워서 울었고 그의 아내가 부러워서 울었고 우는 내 꼴이 우스워 울
었고 그가 곧 이 곳을 떠난다는 것이 아쉬워 울었고- 영영 그가 날 사랑할 일은 없다는 걸 알기에 울었다.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내 아파트에서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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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료진이 장담한대로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이단은 다시 두 눈을 뜨고 세상
을 봤다. 병실에 팀원 모두가 병문안을 갔다. 수액탓인지 좀 부어보이는 이단은 그래도 유쾌했다. 카터와
벤지가 먼저 나간 사이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침대 옆에 잠시 서 있었다.
몸은 어때, 이단.
좋아. 자네 덕분에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어. 그야말로 짐이었는데, 고마워.
듣기 싫어. 분위기 어색해지는 말은 하지마.
브란트, 고마워.
이단이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직 얼굴위에 흉터는 남았지만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를 벗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몸조리나 잘해, 팀 리더. 본부는 벌써 복귀
소식에 난리 났으니까.
브란트. 이단이 불렀다. 왜?
사람은 한 가지 감각이 망가지면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해서 예민해져. 시력이 없는 대신 다른 감각들이
최대한으로 열려서 주변을 인식하게 되지. 시각과는 다른 세계야. 그리고 그 세계- 네 아파트에서, 브란트.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들었어.
나는 그 다음말을 듣지 않기 위해 병실을 나섰다. 그러나 귓등으로나마 미안해 라는 말을 듣고 말았으니 목
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울지 않았다. 욕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복도를 걸어나가 벤지와 카터가 기
다리는 차로 향했다.
내기는 나의 승리였다. 모두 그 소문을 떠들었다. 모두가 절대 이뤄지지 않을 판타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
다.
20
이단의 눈은 갈색이 가운데에 섞인 올리브 색이다. 잊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몇년 전에 쓴 것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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