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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2차

미생 석율그래 / 경성지담 1


경성지담 1



일인상회가 즐비한 황금정 2정목에는 드물게도 조선사람이 하는 고급 포목점이 하나 있는데 그 상점은 일어도 잘 하고 태도도 본토 사람처럼 싹싹한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어서 장사가 제법 잘되었다. 총독부 안주인들까지 종종 옷감을 사러 오는 가게이니 걱정 할 것도 없지만, 딱 하나 비단결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농사때문이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이들이 들으면 의아해 할만 한 것이, 한씨 부부의 아들, 이름은 석율이요 나이는 올해 22살난 아들은 조선 사람은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2학년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동경에 유학까지 다녀와 신문물에도 훤하고 사고도 본토사람들마냥 트인 기재 중의 기재였다. 이렇게만 읊으면, 낯선 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아니 무슨 걱정도 사서 하오.'하고 되려 핀잔이나 주고 마는데 한씨 부부의 속은 또 그렇지 않다.


한석율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계산이 빨라 진즉 한씨가 일본에 유학까지 보냈으나, 조선과 본토가 바다 건너 떨어져 있는 탓에 자주 보지 못하고 한번 가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 4년을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니 한씨는 영 미덥지 않았다. 내내 웃는 낯에 신수야 훤했지만 만날 중문도 닫고 방에 누워 자리옷차림으로 잠만 자거나 아니면 창문을 열고 넋을 빼고 하늘을 보는 것이 복날 받아놓은 개보담도 더 기력이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안방에 꿇어앉혀 놓고 '얘 너 배운 머리로 금수같이 굴어서 쓰니?'하고 따끔히 말을 하자 찔끔 효과를 보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입고 대문 밖 출입을 시작했다. 여기서 한씨부부는 일차로 안심을 했으나, 이번에는 내내 다방이며 살롱이며 연예단만 뒤꽁무늬만 쫓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총독부가 아니라 어디 회사라도 들어가려면 대학을 가야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닥달과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라도 갚을래면 월급쟁이라도 하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쫓기듯 한석율은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제복을 입거나 말거나 내내 팔자 좋은 세상만 보내고 있는 아들을 보며 한씨부부는 속이 짚마냥 푹 썩었다.


근자에 한석율은 북촌에 자주 나타났다. 죽 어깨를 붙이고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병약한 얼굴의 젊은이들 틈바구니를 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단성사로 쏙 들어간 석율은 이미 얼굴을 익힌 여급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줄도 서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삐걱거리는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복도며 계단에서도 변사의 목소리는 기가 막히게 울려퍼졌다. 요란한 북소리도 둥둥울린다. 2층까지 올라온 석율이 뒷짐을 지고 복도를 걸어가다가 불쑥 나타난 문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영사실 문은 굳게 잠겨서 열릴 생각이 없는데 석율은 복도를 한번 휘 둘러보고는 다시 문을 두드린다. 잠시 그렇게 혼자 씨름을 하면, 어느새 '영사실' 팻말 아래 손바닥만한 창이 얄팍한 소리를 내며 열려있다. 창 너머에는 말간 눈이 어딘지 노기를 띄운 채 있다가 금방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석율은 얼굴로 창을 들이밀고 영사실 안을 넘어다 봤다.


"바쁩니다."


따로 말 한 것도 아직 없는데 벌써 거절은. 석율은 혀를 찼다. 영사실 안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끼쳐 나오는데 영사기 옆에 서 있는 마른 맵시의 남자는 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장 기사는 어찌 맨날 바쁘기만 하오? 여름철 개미도 장 기사보다는 덜 바쁠것이외다. 참말."


장 기사의 이름은 그래다. 장그래라는 퍽이나 괴상한 이름의 남자는 벌써 그런 일도 익숙한 듯 석율이 무어라 말하든 말든 제 할일이나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석율은 단성사를 제 집 드나들듯이 들었는데 특히나 만날 영사실 문을 두드리며 영사기 돌리는 그래에게 농을 한다. 타고나기를 한석율과는 다른 성격으로 빚어져 나온 장그래는 엄연히 출입금지인 영사실에 석율을 들여놓지 않고 고작 손바닥만한 창문만 열어주는게 다 인데 그 틈으로도 석율은 계속 떠드는 것이다. 


"우리 장 기사는 어찌 그래 얼굴이 하얀할까? 내내 영사실에만 있어 낯이 진주빛인가? 본정통 소녀들이 질투하여 눈이라도 흘기면 어쩌누."


그러자 장그래는 쳐다도 보지 않고 이리 말하는 것이다. 


"한 형은 어찌 그리 말이 많으실까? 내내 땡땡이만 치고 있어 입이 가벼울까? 참새들이 질투하여 그 입이라도 쪼면 어쩔까."


석율은 무슨 세상 천지 가장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양 껄껄 넘어갔다. 그래는 그마저도 하루 이틀이 아닌지 변사의 말에 맞춰서 필름을 감았다. 상영이 다 끝날때까지 한번 돌아도 보지 않았는데 석율은 이리도 기댔다가 저리도 기댔다가 하며 그 시간을 다 서서 기다렸다. 


그래와 석율이 만나게 된 것은 석율이 이 극장 저 극장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던 작년 여름이었다. 거 참 덥다. 여름에도 멋이랍시고 -명색이 황금정 포목점 아들이 추잡하게 입을 수는 없지.- 모자에 양장셔츠까지 반듯하게 입은 석율이 단성사 문 앞 한줌되는 그늘에 억지로나마 더위를 찾아 들어왔다. 양산을 쓴 어느 귀부인의 태를 쭈욱 지켜보며 입술을 쭉 빼물고 있는데 문득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가오는 인영이 눈에 들었다. 그저 검은 색 웃옷이었을 뿐이었지만 그 뜨거운 여름에 검은 옷은 시선을 빨아들였다. 흰 얼굴에 팔이 얇은 남자는 제 마른 몸집만큼 큰 물건을 안다시피 들고 길을 건넌 뒤 석율의 옆을 스치고 들어갔다. 석율은 그 이목구비며 땀냄새며 고대로 외울듯이 쳐다보다가 표를 파는 여급을 붙잡고 물었다. 저이는 누구? 여급은 들어간 남자의 뒷태를 확인하더니 아아 하고 수줍게 웃었다. 우리 영사기사 아저씨 조카인데 일배우러 왔데요. 이름은 무어고? 석율이 씩 웃으며 묻자 여급은 김연희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가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벌게져 이름을 고쳐 뱉었다. 장그래래요. 이상도 하지. 석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이상도 하지. 그리고는 이렇게 된 것이다. 줄기차게 그래를 따라다니는 석율을 두고 다들 우스갯소리나 했지만 당사자 그래는 오히려 과묵하게 굴었다. 일이나 배우러 왔지, 놀러 온 것도 아닙니다. 대놓고 이리 말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석율은 만날 단성사에 출근도장을 찍어가며 장그래를 보러 왔다.


묵직한 필름통을 그래가 들어올리자 어,어, 저, 저! 하며 마치 장옷도 입지 않고 뛰어 나온 조선시대 규수라도 본 양반마냥 혀를 차며 금방이라도 뛰어들어와 들어줄 것처럼 군다. 그래는 또 눈을 흘기고 필름을 영사기에서 조심조심 빼내어 필름 통에 넣었다. 한석율은 무슨 구경이라도 난듯 장그래가 좁은 영사실 안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리하는 것을 다 보았다. 고것 참 신기도 하지. 힘이라고는 숨쉬는 것 외에는 쓸 것이 남지 않아 보이는 이가 무거운 필름통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걸 보면 당차기 그지 없다. 어느날은 손목이 하도 얇아 한번 쥐었다가 그대로 정강이를 차여 종로바닥에 뒹굴기도 했더랬다. 참 여간 사내는 아냐. 석율은 말그대로 그래에게 감탄하며 시간을 보냈다. 참 대장부지. 암.


그래는 정리를 다 하고 땀이 범벅되고 나서야 영사실을 나왔다. 석율에게는 별 인사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그래를 보고 석율은 입을 쩝 다시며 따라간다. 여급마저 석율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주는데 그래는 내내 모르쇠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시릴 것이다. 아직 날이 이리도 찬데. 입춘이 지척이지만 아직은 아직이다.


한석율은 어깨를 늘어뜨린 장그래의 뒤를 가만히 따라간다. 피곤해 보이는 어깨는 곧은 허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또 하필 옷을 홑겹만 걸친 그래는 유독 추워보이고 말라보였다. 


"장 기사, 장 기사." 


장그래는 듣고도 구태여 돌아보지 않는다. 


"그만 오세요." 

"나는 내 길 가는데?" 


한석율이 살살 눈웃음을 친다. 장그래가 몸을 휙 돌려 눈을 흘기는데도 지지않고 실실 웃는다.


"그보담 걸어갈 거야? 추워, 그러면."

"걸어가든 말든."

"전차를 타야지. 이 날씨에 여기서 남산까지 보통 거리는 아니지. 자전거도 못 타면서."

"못 타는 것이 아니라 안 타는 겁니다!"

"그거나 그거나."

"전차가 타고싶으면 혼자나 타세요. 몇 푼 번다고 두 다리 두고 사치를 해요."


그래는 가락엿마냥 말을 툭 자르고 몸을 돌렸다. 왜 그렇게 맨날 오는지 모를 처사다. 내내 실실 웃기나 하고 농이나 걸고 하는게 부잣집 도령 눈에는 학교도 다 못마치고 일 배우는 것이 바보천치같아 보이는가 싶어 때때로 그래는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이제 스무 해 겨울을 보내는 그래는 석율이 맛있는 것을 사오고 좋은 곳에 가자고 바람을 넣을 때마다 내심 궁금이야 하지만, 집에 누워계신 아버지에 삯바느질로 손이 부르튼 어머니를 생각하면 궁금한 마음도 죄다 도망쳐버리고 마음이 찼다. 


"아무튼, 오지 마세요. 그리고 아직 기사도 아닌데 자꾸 기사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몸을 앞으로 내미는데 갑자기 몸이 탁 걸린다. 그래가 놀라 제자리 걸음을 하며 제 목부터 만졌다. 따뜻한 것이 목에 둘러져 있었다. 보기만해도 고급스럽던 석율의 목도리는 만지면 비단같이 부드러웠다. 


"한증 조심하고. 잘못하면은 열병나."


석율은 뒤에서 그래의 목에 그럴듯하게 목도리를 매주었다. 이제 목덜미가 바람에 시리지 않으니 그도 마음이 흡족했다. 그래는 암말도 안 하고 서서 제 신끝만 쳐다보다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몸을 훽 돌렸다. 


"나, 내일은 별 일 없소."


그러니 내일 보든가. 쥐꼬리만하게 작게 우물거린, 그 말을 남기고 그래는 휙 가버렸다. 쫓기는 사람마냥 걸어갔지만 석율은 쫓아가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장그래! 벌써 열병이 난 것처럼 얼굴이 익은 그래는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인파 속에 묻혔다.





++ 저는 병이있어요 좋아하는 커플은 경성AU로 써내는 병이.. 뒤에도 쓰고싶어서 1을 붙였지만 2가 언제나올지는 아무도 몰라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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