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
장그래는 문득 자신이 한번도 소속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고 그들은 가족이었지만 가족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때부터 붙어 나온 탯줄과 같은 것이니 장그래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장그래의 어머니+ 장그래의 아버지 = 장그래.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은 완전한 타자와 내가 한 가지 이름 아래 묶인다는 것인데 장그래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타자를 만났으나 그 중 누구와도 무리짓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나이 26살에. 기원에서도 연수원에서도 장그래는 장그래와 비슷하거나 그가 목표로 하는 자리의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생활해 왔으나 결국 모두가 지극히 개인적인 대결만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의 무리가 된 적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장그래도 장그래만의 집에 앉아서 바둑을 두었다. 바둑 밖에 없는 집이었다. 그 안에서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지는 동안, 장그래는 한번도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초조할까봐. 옆 집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서, 혹은 옆집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결국 '열심히 하지 않아서' 바둑돌을 던지고 나올 때, 장그래는 집을 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날 것이나 다름없는 마음으로.
새삼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장그래는 스스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린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툴다는 것은 아무튼 기쁜 일이 될수도 있다. 고칠 수 있고 나아 질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거의 모든 '서툰' 일들은 성장하고 진화하여 그 상태를 벗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흐르는 진화의 시간동안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고통과 흉터는 또 별개의 문제다. 장그래는 자신을 잘 알았다. 나무에서 막 싹을 틔운 노란색과 연두색 중간의 이파리, 곁꽃잎의 가장 여린 안쪽 잎처럼, 그는 사회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갓 세상에 태어난 아기와 같아서 면역체계가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전까지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바둑의 집을 짓고 앉아서 바둑을 둘 때에는 세상이 다 바둑판이었으니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때인 것이다. 바둑을 그만 두고 이미 한번 크게 겁을 먹고 군대로 도망쳤다가 돌아왔으니 장그래는 이제는 '스스로 책임질 때'라고 생각했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마음에 굳은 살이 박혀야 해. 그러나 그게 안 되면, 가시덩쿨이라도 둘러야지. 장그래는 낙하산으로 따낸 인턴 자리에 출근하기 전날,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장그래는 여러 의미에서 보기드문 청년이었다. 칭찬도 되고 아니기도 한. 스펙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덤벼드는 낙하산 인턴사원. 사람들의 눈과 입이 그의 등뒤로 바쁘게 쌓여도 장그래는 귀를 닫았고 마음에는 튼실한 울타리를 쳐서 온전히 자기 눈 앞의 일에만 매달렸다. 괴롭다 싶으면 무역사전을 외우고 버겁다 싶으면 보고서들을 문제집처럼 복습했다. 덕분에 장그래는 가장 논란이 큰 자리에 앉아서도 흔들리지 않고 취하지도 않았다. 문득 이곳에서도 이렇게 혼자만의 집을 짓게 되는 것을 깨달았으나 장그래는 '아무렴 어때. 난 사는 게 더 급해'라고 생각해버렸다.
한석율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한석율은 이상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남자다. 이상하고, 또 이상하다. 말이 많고 호들갑스러우며 손은 뜨거웠다. 5대 5로 가른 그의 머리모양만큼이나 모든 것이 튀는 남자였다. 장그래씨 인생의 가장 중요한 5분이 바로 이 옥상에서의 5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한석율이 그렇게 말했을 때 장그래는 무시했지만, 어딘가에서 불길하게 울리는 경적을 들은 것도 같다. 적신호. 기차가 다가오고. 적신호. 건널목에서 잠시 정지하십시오.
한석율은 마치 그러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사사건건 장그래와 전혀 다른 언행을 보여줬는데, 장그래는 일일이 경악하기에 지쳐 그것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인가를 무시한다는 것은 가끔 무엇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한다. 장그래는 한석율을 한석율답게 내버려두었고 한석율은 한석율다운 일들을 했다. '장그래씨, 밥 먹었어?' 파티션 너머로 불쑥 나타나 웃는 얼굴은 사무실에 있는 화분처럼 자연스러워서 장그래는 '네 먹었어요.'라고 대답하는 일을 또 자연스럽게 했다.'아 동기사랑 나라사랑이지. 우리 오늘 회식?!'하고 외칠 때에는 '맥주라면 갈게요.'라고 대답했다. 한석율이 장그래의 손목을 잡고 웃을 때는, 장그래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 손을 쳐다봤다. 크고 뜨거운 손. '장그래- 나만 믿어, 원인터 한석율.' 술에 취해서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미련을 떨고 있는 한석율에게는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한석율은 턱을 괴고 '그것 좀 섭섭하다!' 외치더니 안주로 나온 땅콩을 집어먹고 비척비척 일어나 계산서를 들었다. 장그래는 비틀거리는 등을 보고 부축을 해줄까 어쩔까하다가 그래도 멀쩡히 걸어가는 사람을 그냥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에 왜 그 손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손이 생각났다. 한석율의 뜨거운 손. 이따금 어깨에 얹거나 와락 끌어안거나 손목을 잡는 손.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장그래는 잠들기 직전 가물가물한 눈 안쪽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게으른 생각이긴 했다.
한석율은 계속 한석율처럼 굴고 장그래는 내버려두는 날이 소소히 이어지다가, 새해가 오기 전에 점심을 먹다말고 한석율이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놨다. 예쁘지? 화면 속 여자를 보여주며 한석율은 시시덕거렸다. 장그래는 한번 보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결혼생각하고 만나보려고. 새해에는 장가가야지.' 한석율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마가 반짝거리고 눈썹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도 아주 난리시네. 일찌감치 손주보여달라고.' 장그래는 화면을 다시 한번 더 봤다.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였다. 한석율이랑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게요. 예쁘네요.' 한석율은 만족한듯 히죽 웃어보이고 장그래가 기특했는지 물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장그래는 그 물을 다 받아 마셨다. 그렇구나. 한석율은 곧 결혼할 모양이구나.
그리고 오후 내내 장그래는 체기때문에 고생을 했다. 몇번이나 토했고 창백한 얼굴로 복사를 하다가 오과장의 성화에 겨우 의무실에 가서 누웠다. 점심에 먹은 밥이 얹혔나보다. 장그래는 괴롭게 들끓는 속을 끌어안고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새해에는 장가가야지. 어딘가에서 한석율이 말한다. 장그래 나만 믿어. 동기사랑 나라사랑. 뱅뱅 도는 천장에 한석율 목소리만 직선으로 꽂혔다. 장그래씨, 밥 먹었어?
장그래는 그제야 손목을 쥐고 들끓는 속을 터뜨렸다. 울음이 파도처럼 밀려나왔다. 먹은 것은 다 토해서 빈 속인데 울음은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일이다. 손목이 화끈거렸다. 한석율의 손이 스쳤던 곳이 다 아프다. 그 뜨거운 손에 데이고 말 것이라는 것을, 장그래는 사실 처음부터 알았었는데. 꾸밈없는 호의와 대가없는 친절에 상처입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너무도 쉽게 가시덤불을 헤치고 뛰어 넘어 마음의 여린 살에 화상을 남긴 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일이라 장그래는 얌전히 누워서 울음을 토했다. 수요일 오후 4시. 장그래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는 작은 집에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지만,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집이었다. 그곳에서 장그래는 평온했고 그래서 바둑을 뒀다.
#미생_전력_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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