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2차

미임파 이단브란 /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6

힝개 2015. 8. 16. 18:58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6

(센티넬버스 AU)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2시간 반동안 차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이단이 한번쯤 '교대할까?'라고 물었지만 브란트는 '아뇨.'라는 말로 잘랐다. 딱히 기분 나빠하지는 말아요 라고 덧붙이기도 했으나 별로 기분 나쁠 일이라는 것도 없었다. 필라델피아에 진입하면서 브란트는 오랜 침묵을 깨고 조수석 앞을 열어보라고 했다. 이단은 순순히 조수석 앞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자동차 등록증과 함께 선그라스와 야구모자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양키즈 팬이라고 해줘요. 사실 선택권은 없지만, 그래도 그게 기분상 나을 것 같은데?"


이단은 선그라스와 야구모자를 꺼내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시간만 됐어도 풀 마스크로 준비했을 텐데요." 


차가 삼거리에 멈춰섰다. 브란트는 운전석에 앉은 채 앞에 서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저 건물입니다. 저기 보이는 3층부터 5층까지 난사했어요. 저 교차로 한복판에서요. 창문은 갈아끼웠지만 잘 보면 벽장식이 부서진 흔적들이 남아있는게 보일 겁니다."


이단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선그라스를 낀 채 차에서 내렸다. 거리는 평온했다. 샌드위치 가게는 문을 활짝 열어놨고 신문가판대 앞에는 노인이 헤드라인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인도에 서서 올려다 본 건물은 2주 전의 일이야 다 잊은 것처럼, 혹은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보였다. 선그라스를 살짝 들어올리고 유심히 살펴보니 좋은 시력 끝에 빗맞은 탄환들이 만들어낸 검은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단은 교차로까지 걸어가 신호등 아래에 서서 다시 사격지점을 확인했다. 유리창에서 반사된 햇빛이 날카로웠다. 선그라스가 없었다면 창문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몇시였죠?"

"3시 15분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20분 뒤네."

"그럼 여전히 해가 이 각도로 걸려 있었겠군."


브란트는 눈썹 위에 차양을 치고 올려다봤다. 햇빛은 4층 유리에 걸려 반사되고 있었다. 햇빛은 강하게 반사되어서 그 주변을 제대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안에서 뭘 하는지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작전은 이 뒤에 있는 호텔 옥상에서 저 쪽으로 건너가서 침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백업팀은 호텔 옥상에 있었어야 했죠. 그런데 당신이 여기 나타난 겁니다. 지금 보는 각도로 3층 제일 끝 창문을 향해 발포한 뒤 옆 두층으로까지 기관총으로 난사했죠. 워낙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제대로 된 대응사격도 없었어요. 백업팀은 총성이 터지자마자 바로 팀을 나눠서 A팀은 저쪽 건물로, B팀은 당신이 서 있는 교차로로 내려와 당신을 붙잡았죠. 올라가 볼까요?"


둘은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옥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길을 건너 총알받이가 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와 문들이 굴처럼 등을 맞댄 전형적인 사무실 건물이었다. 수상한 몇 개의 사무실을 지나 3층에 올라가니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먼저 조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3층부터 5층까지는 제거 대상인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고 있었어요. 여기가 일차적으로 접견장소고 4층과 5층으로도 생활공간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A팀이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창가에서 쏟아진 눈먼 총알에 다들 겁을 집어먹었고 몇몇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그게 끝이에요. 진압작전치고는 너무 화려하죠."


이단은 3층에서 밖을 내다 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각도상 공격하기가 훨씬 편했다. 교차로는 너무 열려 있었고 사방이 민간인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선공격을 하기에도 부적합한 장소였다. 그런데 내가 왜 그곳에 있었을까. 이단은 신호등 아래에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총을 들고 발포하고, 탄피가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지고, 출동한 백업팀이 팔을 꺾어 세울 때까지. 


"도움 될만한 건?"

"불행하게도 없네."


브란트는 굳이 '거봐'라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5층과 옥상까지 같이 이단과 움직였고 가능한 CCTV화면을 모두 확보했음을 설명했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을 보고 싶으면 다시 구성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번 더 교차로로 내려갔다. 갑자기 작전을 변경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작전이 변경되었던 거라면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단 외의 다른 누군가가. 그러나 그런 기억조차 없이, 이단은 그저 정신이 붕괴했다는 쓸쓸한 결과만 떠안고 있었다. 브란트는 차에 돌아와 앉으면서 세뇌에 대해 말했다. 이단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넘기며 웃었다.


"불가능해."

"통신보안을 아무리 높여도 주파수만 잘 맞추면 누군가가 끼어드는건-"

"센티넬은 세뇌 당하지 않아."


맞아, 이 남자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등급 이상의. 하지만 그렇다면 문제가 정말 심각하지 않습니까?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이단은 혼자 갑자기 정신이 무너진 셈이다. 그 직전까지 줄리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입을 다물고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단은 스스로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억나지 않는 거대한 구멍에 대해서 전혀 불안함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해 내야 할 걸 잊어버린 게 아니라 당연히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편안했다. 몸이 좀 더 회복된 뒤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평소보다 시력도 떨어지고 감도 떨어진 상태로는 무엇도 잘못된 점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단은 머리를 털어내고 조금 음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여기까지 운전해 왔는데 기억나는게 없군."

"하나도요?"

"하나도."

"좀더 조사하다보면 생각이 날 겁니다."

"기억은 아니고 느낌은 있어."

"느낌은 증거가 안 됩니다."

"줄리아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뇨, 우린 이 구역 전체 CCTV를 확인했어요. 유투브, 페이스북, 트위터 올라온 영상까지 모두요. 그 안에 줄리아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느낌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느낌은-"


증거가 안 되지. 이단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그만 말하지. 브란트는 안전벨트를 채우고 시동을 걸었다. 


"돌아가는 길도 길텐데, 미안하군."

"일인걸요, 뭐. 운전하는 거 좋아합니다."

"정말?"

"아뇨."


이단은 직전의 침울함을 잠시 잊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브란트는 어깨를 으쓱한 뒤 차를 뒤로 뺐다. 다시 DC까지는 세시간이 걸렸고 갈때와 마찬가지로 차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갈 때만큼이나 똑같이 적막한 차 안에서 이단이 황망히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오늘은 갈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딘데."


브란트는 차선을 변경하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제 집이요. 집 이라고 발음할때 억양이 한번 뚝 떨어지는 것이 왜냐고 묻지 말라는 뜻이 강하게 느껴져서 이단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쉬지않고 밟은 길 끝에 브란트는 익숙한 거리의 익숙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이단은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브란트는 시동을 끄고 핸들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그냥 손짓을 했다. 따라 오세요. 그는 이단을 데리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평범한 아파트였다. 벽과 계단을 보면 다소 오래되기는 했지만 관리는 잘 되어 있었다. 2층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세번째 문 앞에 브란트가 섰다. 문은 번호식이 아니라 구식 열쇠를 사용해야 했다. 브란트가 열쇠로 문을 여는 사이 이단은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복도를 구경했다. 


"들어가시죠."


브란트가 문을 열어주고 그를 불렀다. 이단은 천천히 '브란트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평범했다. 왼편에는 주방이 오른편에는 거실이 이어져 있었고 거실 끝에 연결된 좁은 복도는 욕실과 침실로 이어졌다. 남자 혼자 살만한 아파트였다. 이단은 소파 뒤에 서서 브란트가 열쇠를 식탁에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모습을 구경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왜 왔냐면 이제부터 여기 사셔야 하거든요."

"듣고 있어."


브란트가 손등으로 턱을 닦으면서 이야기를 짧게 풀었다. 모든 것은 실험때문이었다. 실험때문에 이단이 안정되었고 실험 덕분에 '가이드'를 만들어 낸 만큼 계속해서 지속적인 관찰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아를 찾기 전까지 이단과 브란트는 IMF의 격리시설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이 초반에 나왔던 연구원들의 주장이었다. 


"왜 있잖아요, 그 사람 미쳐버리기 딱 좋은 네모반듯한 공간들이요. 언제부터 IMF가 숙박업까지 사업을 넓혔다고."


브란트는 거부했다. 그로서는 임무가 시작되고 처음 내비친 거부의사였다. 아무리 이 임무가 24시간 다른 대상과 붙어있어야 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서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심지어 이거 감옥이잖아요. 변기랑 샤워기 옆에 가림막도 없는 곳에 카메라만 20대쯤 있지 않습니까? 


"내 말 믿어요. 거기에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건 가이드가 있는 센티넬이어도 곧바로 미쳐버릴 테니까."


비꼬는 건 아니에요. 브란트는 얼른 덧붙였고 이단은 고갤 끄덕거렸다. 


"난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데."

"이건 내가 처음 실험에 참가할 때 들은 거니까요, 당신이 내내 격리실에 묶여있는 동안 이런 논의가 오갔어요."

"그래서 결론은?"


어차피 한 공간 안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이것때문에 하루아침에 보직도 바뀐 채 모든 걸 맡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쉴 공간만큼은 내가 골라야 합니다. 브란트는 강하게 말했다. 샤를로 박사와 연구원들은 몇 번 회의를 하고 국장에게도 전달을 하더니 결국은 브란트 편으로 기울었다.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지면 뇌파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이 더 훌륭한 이유가 되었다. 


"왜 내 집은 고려되지 않고?"

"장난해요? 그 당시에 당신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요. 게다가 당신 집은 지금 좀- 그래요. 조사단이 방문했었거든요."

"다 뒤집었나?"

"인형 솜털 하나까지도 다 뒤집어 놨을 겁니다. 청소팀이 바로 나갔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엔 그랬어요."


이단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브란트는 '거기 앉지 마요.'소리가 목 끝까지 찼으나 참았다. 이단은 브란트의 집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줄리아를 찾을 때까지요."

"난 어디서 자고."

"침대가 하난데 어, 가위바위보해서 지는 사람이 소파 쓸까요?"

"내가 쓸께, 소파."


이따 내 집에 들릴 수 있을까. 집을 좀 보고 짐도 몇 가지 챙겨야 할 것 같은데. 브란트는 예상했던 거센 반발없이 이 동거 계획이 통과된 것에 만족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우선은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피자라도 시킬까 하는데 이단이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 편하게 해."

"네?"

"네 말투는 네 정장같이 꼭 어딘가 불편해."

"그런 말 자주 들어요."

"24시간 불편하게 듣고 싶진 않은데."


브란트는 피자배달 번호를 누르며 생각했다. 어련하시겠어요.


"알겠어, 이단, 저녁메뉴는 페퍼로니 피자야. 이의는 받지 않겠어."


이단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앞다투어 일어나는 낯선 변화들에 저항할 기력도 없이 소파 팔걸이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