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2차

미임파 이단브란 / 정오의 산책

힝개 2015. 8. 16. 00:12
정오의 산책
(도록님 그림보고 붙인 단문)


"자네 요즘 살 좀 붙지 않았나?"

국장이 결제한 보고서를 돌려주며 함께 던진 말에 브란트는 하하하, 하고 세번 웃었다. 

"신체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은 성희롱인데요, 국장님. 성교육 세미나 다시 받으셔야 겠네요, 72시간짜리. 제가 등록해 놓겠습니다."
"관리직으로서 살이 붙는다는 건 좋은 징조야, 브란트."

브란트는 국장이 자부심있게 손을 얹어 놓은 배로 시선이 갔다. 아뇨, 절대 아닌데요. 그러나 그는 또 한번 무표정으로 하, 하, 하 라고 끊어 웃고는 보고를 마치고 나온 것이다. 헌리국장을 IMF에 매어다가 놓은 것도 석달쯤 지났다. 머리 없는 조직이라는 이유로 이리 불려다니고 저리 불려다녔던 국장 직급 대리 시절에는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못자면서 자다가도 잠꼬대로 아무거나 변명하는 힘든 시절이 있었지만 제법 일을 할 줄 아는 국장 덕분에 지난 삼개월 간 일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점심시간이었다. 브란트는 유리 너머 상활실의 모니터들을 훑어보면서 -이 사무실은 아무리 봐도 효용이 떨어진다- 점심은 역시 치즈버거로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책상에 먼저 닿은 배를 내려다 보았다. 과연 지난 3개월간 마음은 몰라도 몸은 확실히 편해졌다. 퇴근은 못해도 식사는 거르지 않는다는 국장의 소견으로 저녁 식대를 끊고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호사를 IMF에서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헬스장에 간지도 너무 오래됐다. 브란트는 막 주문하려고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절대 살이 쪄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좀 걸어야 겠다.

점심시간을 맞아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남 모르게 편을 먹으려는 모종의 음모를 짤 천재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브란트는 셔츠 차림으로 나와 걸으면서 한낮의 점심시간에도 런닝복으로 갈아입고 뛰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래 다들 거저먹는 일이 없는거다. 현장에서 일할 때야 하루에 한끼 제대로 먹으면 고마운 일이고 하루에 눈이라도 몇 시간 붙이면 감동받을 일이지만, 책상 앞에서의 인생은 너무도 정적이다. 늙지 않는 거로 유명한 이단 헌트의 에너지와 젊음을 IMF 요원들은 모두 부러워했는데, 브란트가 보기에 그는 목숨을 담보삼은 아드레날린으로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일 안하면 갑자기 재가 되서 무너질지도 몰라. 전혀 이상하지 않은 엔딩이다. 햇빛도 좀 받고 바람이나 쐴 목적으로 나왔으니 느긋하게 한 바퀴 돌고 들어갈까 하는데 왜 갑자기 이단 생각이 났는지, 브란트는 곰곰히 생각했다. 

"좀 걷지."

왜냐하면 그 얼굴이 바로 옆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왔어. 이단은 브란트의 팔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브란트는 이단을 보면서 황망히 입을 열었다. 

"보고서 내놔."
"나중에 줄게."
"지금 내놔."
"진짜 나중에 줄게. 보고서 이야기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브란트?"
"아니 지금이 딱 보고서 이야기하기 좋은 날씨야. 영수증도 내놔. 따로 내지말고, 붙여내라고."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오, 당연하지. 꿈에도 그리웠는걸."

앞만 보고 걷던 이단이 그 말에는 브란트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단, 문맥을 읽으라고, 비꼬는 거잖아, 좋아하지마. 이단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근데 우리 어디가는데 지금."
"산책."
"나는 납치당하는 기분인데."
"으음, 아닐거야."
"맞는 것 같은데."
"아냐, 그냥 돌아보지만 마."

브란트는 애초에 헬스장이나 가야했다고 생각했다. 햇빛은 무슨. 사치다. 내가 무슨 식물도 아니고 햇빛이 왜 필요하냐.

"이단 헌트."
"난 네가 나를 풀네임으로 부를 때 되게 섹시하다고 생각해."
"야!!!"
"소리는 지르지 말고. 혹시 총 가진 것 있어?"
"미쳤어? 여긴 DC 한복판 점심시간이라고. 내가 지금 맨몸으로 나온거 안 보여?"
"총 가진 것 있어, 없어?"
"발목에 하나 밖에 없다. 아, 왜 그러는데."

브란트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물결 와중에 아는 얼굴이 점점이 떠오른다. 상황실 제일 큰 모니터에 적색경보를 달고 떠 있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물론 그 얼굴이라는 것은 세계 제패를 꿈꾸는 또라이 테러리스트고 당연히 그런 또라이 옆에는 광신도가 몰려다니기 마련이다. 

브란트는 다시 앞을 봤다.

"이단."
"아까 총알을 다 써서 말이야. 최근에 사격훈련 다시 받은 적 있어?"
"너 지금 DC 한복판에 1급 범죄자를 데려다 놓은거야?"
"자유국가잖아."
"반역죄에는 해당안돼."
"저 앞이 IMF니까 저기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할게."

난 네 '어떻게든 할게'를 믿을 수 없다고. 전혀. 전혀!!! 화가 많이 난 덩치친구들과는 거리가 약간 있었다. 브란트는 멈춰서서 이단을 쳐다봤다. 

"쟤네가 퍽도 IMF로 신나게 걸어들어오겠다."
"아, CIA 요원이라고 했으니까 여기가 본부인지 모를거야."
"내 구두끈이나 묶어줘."

이단이 무릎을 꿇고 구두끈을 묶어주었다. 브란트는 팔짱을 낀 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제가 허리가 안 굽혀져서. 

"작전이 뭔데."
"총을 주면 총을 쏘면서 내가 본부로 달려가는거지."
"사람은 너랑 나 둘이고 총은 한 자루잖아. 누구 하나 잡히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넌 여기서 자연스럽게 저쪽으로 걸어가고-"
"내 총이야. 니가 빠져."
"그럼 날 따라올 거 아냐. 난 비무장인데."

브란트는 흘긋 돌아보았다. 이제 한 5m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이단은 브란트의 발목에서 총을 빼냈다.

"이리 내놔, 이단."

내가 발포해서 시간을 벌 테니까 넌 그대로 IMF로 달려가. 알았지. 브란트는 중얼중얼 말하면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브란트가 총을 꺼내듬과 동시에 눈치를 보고 있던 악독한 현상수배범 무리 역시 총을 꺼내들었다. 브란트가 공중에 한 발을 쏘자 평화롭던 거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시말서 넘어가는 환청이 들린다. 그리고 나서 수배범들에게 총을 겨누는데 평소보다 겨누는 점이 훨씬 높고 몹시 흔들렸다. 브란트는 악당 조무래기 1의 어깨를 맞추고 잠깐 아래를 쳐다봤다. 이단이 앉았다가 일어나는 자세 그대로 브란트를 '들쳐앉고' 달리고 있었다. 너 뭐해. 황망하게 물을 시간이라도 있음 좋을 텐데 그럴 시간도 없었고 물어봤자 '다른 길이 안 보였어.' 소리나 할 게 뻔하므로 브란트는 그냥 한여름에도 새까맣게 맞춰입어 좋은 표적이 되는 광신도들에게 조준사격을 가했다. 한 발에 한 음절. 엿 먹 어 라 이 단 헌 트.



한참 시말서를 쓰는데 문자가 왔다. [살 안쪘으니까 걱정 하지마.] 브란트는 헌리국장의 72시간 성교육 세미나를 신청하면서 이단 헌트의 이름도 같이 올렸다. 참으로 로맨틱한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