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
검은 물
음습하게 흐르는 강의 표면
부서지는 달 조각은 길을 잃고
빛 한 줌 없는 물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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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울린다. 어딘가에서. 못 들은 척 했지만 열린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전화소리는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점점 더 선명해진다. 마침내 그것은 귀에 고여 있다가 한데모여 폭발하고 깨질 듯 한 두통으로 나는 순식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숙취로 인한 수면의 끝이 좋을 리 없다. 어두운 시야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머릿속을 더듬는데 문득 전화소리가 들린다. 아 그래. 저것 때문에 깼지. 더듬거려 소리의 근원지 쪽을 찾는다. 팔로 엉금엉금 기어서 옷가지 아래 깔려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모르는 번호. 그보다 지금이 4시 20분이라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욕부터 해야겠다 라는 생각에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충 귀 일거라 예상되는 부위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내 목소리인가 싶은, 벽돌이 부서지는 듯 한 낮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어떤 놈, 혹은 곱게 미친 어떤 년.
“.......”
침묵. 여전히 엎드린 채로 나는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짜증이 나는데 지금 내 의식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서 짜증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마에 얹었던 손으로 눈을 문지르자 시야가 다소 나아졌다. 맨 먼저 보인 것이 굴러다니는 보드카와 맥주병들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돌아누우려니 아직 전화를 안 끊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벙어..”
“재욱아.”
나는 분명히 들었다. 이재욱, 하는 잔잔한 음성과 아주 희미하게, 숨소리처럼 짧은 웃음소리를. 그리고 순식간에 잠기운과 숙취, 그 외 나의 의식을 흐리게 할 만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시 한번.
“나야, 우주. 오랜만.”
웃음소리. 나는 앞에 굴러다니는 연갈색의 맥주병을 쳐다보았다. 꼭 거기에, 이 전화 건너편의 상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몇 년 만이지? 4년? 5년?”
목소리는 평온해서 계속 엎드려있어서 저려오는 허리의 통증과 어두컴컴한 실내만 아니라면 오후 3시쯤의 볕 잘 드는 까페 야외테라스에서 들려오는 거라고 믿을 법 했다. 침묵이 길어진다고,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8년 그리고 4개월.”
나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간단한 글자들이 입안에서 까슬거려서 몹시도 불편하게 나왔다. 8년 4개월. 상대방은 웃는다. 조용하게. 8년 4개월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
고등학교 2학년. 운동, 컴퓨터 게임, 시시껄렁한 야한 잡지와 동영상들, 옆집 누나 등에 목을 매고 무엇이든 경험한 것은 부풀려 말하며 고만고만한 머리통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계급체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말도 안 되는 나이. 나 역시 그 나이 또래의 범주라는 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오히려 난 좀 어른스럽다고 가지는 생각이 내가 그 나이 임을 반증해주는 18살의 소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체격이 좋았던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다른 녀석들보다 농구를 더 잘 할 수 있었고 더 빨리 뛸 수 있었으며 남자애들끼리 으레 붙게 되는 싸움에서도 곧잘 싸웠다. 거기에 나쁘지 않은 사교성까지 더해져서 그때까지 어딜 가던지 곧 그 무리의 중심에 서서 지내왔다. 문제가 발생하면 흠씬 두들겨 패면 해결되었으니까. 그 지역 토박이였던 아버지는 몇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처지인 K시에서 큰 공장 두 개를 운영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만 하시는 현모양처의 표본과도 같은 분이었다. 어느 것 하나, 내 편이 아닌 것이 없었다. 18살, 유달리 길었던 그해 여름까지는.
어느 날 아침조회시간에 담임이 들어오는데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땅딸막해서 별명이 쥐콩이었던 담임의 키보다 훤칠하게 커 보이는 녀석은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얗다기보다 건강한 피부색에 하얀 와이셔츠가 대조적이었다. 머리는 갈색 빛이 났고 단정하게 지은 표정에서는 적당한 장난기를 담은 채 웃고 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눈 끝으로.
“이번에 새로 우리 학교로 오게 된 .. 이름이 뭐라고 ... 어 그래, 신우주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좀 낮설어하니까 잘들 도와줘라. 혼혈친구라고 괜히 못된 짓 하지 말고 같은 반 친구로서 사이좋게 잘 지내라.”
외국과 혼혈이라는 말에 교실이 한번 술렁거렸다. 멀리 나간다고 나가봤자 인근 K시의 시내 몇 블록이 전부였던 아이들에게 외국은 곧 비행기였고 혼혈이라는 말은 비행기라는 말보다 더 상상이 안 되는 어떤 것이었다. 더불어, 그에게서 보통의 혼혈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파란 눈이나 금발머리, 까만 피부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도 소란을 부추겼다. 시끄럽단 뜻으로 담임이 출석부로 교탁을 몇 번 내리친 뒤, 뒤 쪽 빈자리를 가리키자 전학생은 성큼성큼 걸어서 제 자리에 앉았다. 창가 쪽 가장 뒷자리를 차지한 나와는 교실의 반대편으로 떨어져 있었다. 뭐지. 일본인은 아닌 것 같고, 중국 사람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한국사람 아닌가. 그다지 열중하지는 않은 질문에 금방 흥미를 잃은 나는 스치듯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전학생의 눈과 마주쳤다고 생각한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앞을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웃고 있는 듯 한 눈을 본 것 같았는데.
쉬는 시간이 되자 가만히 있어도 정보가 돌고 돌았다. 어머니 쪽이 일본과 영국 혼혈이고 한국인 아버지랑 결혼했다는 것, 태어나기는 홍콩에서 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주로 외국을 돌며 자랐고 한국에는 어릴 때에 와 봐서 낯설지 않다는 것과 집안에서 외동아들이며 얼마 전에 서울의 유명한 부자라는 집주인이 내놓은 큰 별장으로 이사왔다는 것 정도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훌륭한 한국말을 구사하던 녀석은 남고다운 짓궂은 농짓거리에도 제법 성실하고 의연하게 답했고 세상 다 산 어른처럼 굴었지만 결국은 가장 넓은 세상이라고 해봤자 K시의 변두리까지 가 본 것이 전부인 남학생들에게 녀석이 간간히 들려주는 외국 얘기는 야동과는 다른 의미의 신세계였다. 내심 아닌 척 그저 내 자리에서 잡담을 하고 있었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흥미가 동해서 다른 녀석이 옮기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곤 했으니까. 남고에서의 전학생은 전학 첫 날 보통 흠씬 두들겨 맞거나 맞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그만큼 두들겨 패야 한다는 암묵적인 관례를 깨고 녀석은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들었다. '외국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몇 번인가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한다던지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다던지 방과 후에 친구 X의 집에 모일 때 껴 있다던지 하는 식으로 얼굴을 보았다. 인사도 하고 말도 몇 번 오고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 할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주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우리 그룹에 있었고 친구 중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 안 붙어봐? 라고 다른 친구가 물었을 때 나는 아니 뭐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하고 뜸을 들였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같이 걸은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 며칠 남지 않은 무더운, 어떤 밤이었다. 하천의 뚝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향이 비슷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다 같이 모여 놀러가는 일은 있었으나 다른 친구도 없이 둘이 걷게 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자전거가 있었고 신우주는 없었다. 혼자 걷게 하고 나만 휑하니 타고 가는 것도 어딘지 좀 모양빠지는 것 같단 생각에 멀쩡한 자전거를 끌고 녀석과 걸어갔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우주 자신도 분위기를 맞추는 것에는 탁월했지만 다른 녀석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먼저 나서서 말을 나불거리는 타입은 아니었고 나는 무리로써 같이 어울리는 신우주와 개별적으로 만나는 신우주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이질감 때문에 더더욱 말이 없었다. 담임 얘기, 교생 얘기, 농구 얘기 등 몇 차례 시덥잖은 얘기가 오고 간 후에 침묵과 함께 어둠속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공백을 메꾸었다. 불현듯, 우주가 입을 열었다.
“너 해본 적 있어?”
어? 하고 내가 그 쪽으로 고갤 돌렸을 때 우주의 비스듬한 옆 얼굴이 보였다. 가로등빛인지 달빛인지 때문에 음영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원래가 잘 웃는 녀석이기도 했고 으레 남자애들끼리 뭉치면 흔히 하는 소리는 야한 농담이었으므로 얘가 이제 별 걸 다 배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흔히 부리는 허세도.
“어 당연하지. D여고 기집애 알지. 허리 가늘고 가슴 큰애. 걔랑 했잖아, 내가. 존나 죽여줬지.”
마침 우리 집으로 가는 길과 우주의 집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이 나왔다. 멈춰 서서 한손으로 가슴팍에 둥글게 쥐며 세세하게 설명하려 애쓰는데 우주가 웃었다. 바람소리처럼, 짧게.
“그래?”
그리고 웃고 있는 우주를 보았을 때 아주 잠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휘어진 눈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 그게 무엇인지도 채 생각하기 전에 녀석은 ‘자, 그럼 내일봐’ 라고 인사하며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잠시 멈춰 있었던 나는 이내 그런 복잡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이 아마,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고 아주 나중의 나는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막상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학원의 답답한 교실을 싫어하고 혼자 해도 공부를 제법 했기 때문에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K시의 몇 없는 학원에 빽빽하게 틈도 없이 앉아있는 친구들의 반열에 끼지 않아도 되었다. 컴퓨터 게임도 하다보면 시시해지고 친구 녀석들은 학교를 다닐 때 보다 방학이 더 바빠진 탓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곧 무료해졌다. 인근에서는 꽤 큰 도시였지만 그때까지도 도시 중심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논이 있고 냇가가 있는 곳이었으니 놀 수 있는 곳이라봐야 한정적이었다. 학교는 시내와 외곽지역 사이 있었고 주택들은 주로 외곽지역에 있어서 시내에 놀러 나가는 것도 혼자서는 제법 귀찮은 일이었다. 곧 나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자 곧잘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어감이 왠지 무척이나 고독한 어른 같은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매일 봐온 풍경이 18살 남자애에게 새로울 리 만무하므로 금방 질렸다. 그러던 차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하천이 급격하게 굴곡져 흐르는 부분에 놓인 다리 밑에 내려가 보았다가 우연히 생긴 건지 울퉁불퉁한 자연석 때문인지 제방에서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찾았다. 일종의 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 공간은 다리 아래이기 때문에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았고 바위 틈 사이에 있으니 행여 근처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보지 못할 것이며 바위 틈 치고는 꽤 넉넉하게 넓었다.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 마냥 나는 흐뭇해했고 그 뒤로 매일 그곳에서 시간을 때웠다. 그때 막 몰래 피우기 시작한 담배도 피우고 책도 읽고 하며 혼자 찾아낸 아지트를 즐겼다.
비가 왔다. 문득 비가 온 것은 처음이라 그 안쪽에 숨겨둔 담배나 야한 잡지 같은 것들이 무사한지가 걱정되었다. 우산을 쓰고 터벅터벅 걸어서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다행히 비가 들이치거나 하지 않았다. 우산을 접고 이왕 내려 온 김에 한 대 피고 올라가자 싶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번 흡입하니 알싸하고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도 펴?”
나는 하마터면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릴 뻔 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고 나서야, 그 목소리가 우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복과 비슷한 흰 셔츠에 청바지. 사복을 입은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늘 교복을 입고 학교나 학교가 파한 후 모여 놀 때에만 봤으니까.
“뭐야 놀랬잖아.”
한편으로는 안심이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여긴 나 혼자만이 아는 곳이 아니었던가. 우주는 우산을 탁탁 털며 마치 집구경 온 사람처럼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다리 밑과 제방의 벽을 쳐다보았다.
“좋은 곳 알고 있다, 재욱아.”
“야 이거 절대 비밀이다. 다른 놈들한테도 말하지마. 원래 이 형님 혼자 알고 지내려고 했던 건데 니가 찾아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선심 쓰듯 말을 뱉으며 담배연기를 길게 후- 뱉었다. 순전히 겉멋이었다. 진짜 담배를 피우려면 사실 연기로 나가는 것이 거의 구별이 안 간다는 걸 알지만 거의 연기를 입에만 두었다가 뱉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연기가 흰색으로 길게 뻗어 올라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우주를 보고 나는 좋아, 라고 장단을 맞추고 담배를 권했다. 녀석은 순순히 내 옆에 와 앉으며 담배를 받아들고 붙을 붙였다.
여름인데도 녀석은 전혀 타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의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건강한 피부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시라고 보기도 시골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지역이라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까무잡잡하게 자랐다. 그래서 같이 어울리는 중에도 늘 한톤 밝은 우주가 눈에 띄곤 했다. 불을 붙일 때 보니 뺨에 핏줄이 살짝 보일정도로 피부가 좋았다. 속눈썹 또한 머리 색깔처럼 은근히 다갈색이 돌았다. 새삼 갑자기 신우주가 다른 사람처럼 인식되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번져가는 것을 아는지 갑자기 우주가 말을 걸어서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너, 나쁜 짓 좋아해?”
“그런 질문이 어딨어. 나쁜 짓을 누가 좋아하냐.”
“몰래 담배 피우고 이런 책 숨겨 놓고 가끔 한명씩 패고, 그런거, 나쁜 짓 아냐?”
“그게 무슨 나쁜 짓이야. 그리고 원래 남자라면 그 정도의 탈선 정도야 뭔가 아는 남자가 되는 지름길이지.”
“그래?”
나쁜 짓은 누구 죽이고 돈 뺏고 뭐 그런거지 하며 우주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앞에 흐르는 물을 내다보고 있었다. 얘가 지금 웃는건가. 아니면 웃지 않는 것인가. 그러던 차에 눈이 마주쳤다. 눈이, 휘어져 웃고 있었다.
“그럼 진짜 나쁜 짓 한번 해보는 게 어때.”
“뭐?”
내가 채 다른 답을 구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움직였다. 내 손에 있던 담배를 느리게 뺏어 들더니 자신의 담배와 함께 바위에 지져 꺼버렸다. 야, 그거 아직 장초잖아, 라고 말하려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명백하게, 우주의 입술이었다. 알싸한 담배향이 났고 -아마 나한테서도 낫겠지만- 촉촉했으며 눈도 감지 못하고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았다. 녀석도 눈을 뜨고 있었다. 다만 나처럼 당혹감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웃고 있는 그 눈 그대로였다. 그 상태에서 유연하게 내 입술 사이를 갈라져 들어오는 뭔가 물컹한 것의 감촉을 느끼고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채 나와의 간격을 벌렸다. 우주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 눈, 눈만은 웃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확 솟아 오르는 분노도 채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 멍청하게 물었다.
“야, 너 갑자기 미쳤냐?”
“왜. 싫어?”
“이런 미친 새끼야. 너 호모냐? 더럽게, 진짜.”
“너 나쁜 짓 좋아하잖아. 그래서 해주려고.”
“아 돌았나, 이게 진짜. 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왜? 키스라서 맘에 안 들어?”
한 대 치려고 움켜쥔 주먹이 잠시 갈등하는 사이 녀석이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녀석에게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두 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한 사이 우주의 한쪽 손은 내 멱살에 다른 손은 내 아래쪽에 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헉 하고 놀라는 사이 녀석을 잡은 멱살이 풀렸고 그 틈에 우주는 오른 팔꿈치로 자신의 체중을 실어 내 가슴 위쪽을 밀며 다른 손으로 빠르게 내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허리가 고무줄로 된 트레이닝 팬츠는 통과하기에 너무 쉬웠고 속옷 안에까지 거침없이 들어간 손은 선뜩하니 차가웠다. 그리고 이내 이렇다 할 말도 머뭇거림도 없이 그 차가운 손으로 내 것을 주물렀다. 급하게 들이대는 것치고는 아주 천천히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자극에 나는 사지의 힘이 풀리면서도 간신히 녀석의 멱살을 잡고 그 말간 얼굴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시야에서 녀석의 얼굴이 치워졌다. 내 속옷 안까지 들어왔던 손도 끌려 나가 있었다. 잠시 그 상태로 정지.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옆쪽으로 나가 떨어져 다른 쪽 벽을 짚고 무릎 꿇은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나는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금 저 마냥 강아지같이 순한 얼굴에 키도 나보다 작은, 무엇보다도 남자 녀석이 내 몸에 손을 덴건가. 명확한 감정을 찾기가 어려워 먼저 찾아온 것은 혼란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우주가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벌써 한 쪽 얼굴이 발갛게 부어 오른 것만 제외하면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녀석이 킥, 하고 짧게 웃었다.
“야, 이재욱, 너 섰어.”
그 말에 나는 여전히 얼이 빠진 채 사타구니를 내려다 보았다. 트레이닝 팬츠 가운데 부분이 약간 팽팽해져 있었다. 나는 일어서려고 했고 그런 나를 또다시 녀석이 잡았다. 다시 녀석을 후려치기 전에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 막았다. 이때쯤 분노가, 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터져나갔다.
“야 이 개새끼야. 이거 놔, 시발.”
“너 어차피 이거 해결 해야 되잖아. 안 할거야?”
아지트는 한창 때의 남자애 둘이 아귀다툼을 할 만큼 틈이 넓진 않았으므로 마음대로 활개를 칠 수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간간히 얻어 맞으면서도 끝까지 내 한쪽 손목은 놓지 않았고 내 중심부를 슬쩍슬쩍 건드리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멱살을 쥐고 반쯤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서로 숨쉬는 것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은 채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녀석 역시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입술이 또 다가올 것만 같아 나는 그 몸을 밀어냈다. 우주가 그것을 버티며 전에 없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의 녀석은 웃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다소 부정확한 억양 때문에 순박하게 들렸던 이전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목소리는 같았으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내가 풀어줄게. 아파죽겠지? 가만히만 있으면 내가 풀어줄게. 아무 일도 아냐. 내가 건드렸으니 내가 책임질게. 기분 좋을거야.”
이건 혹시 그냥 장난이 아닐까. 어딘가에 다른 친구들이 숨어있고 숨어서 내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다. 나긋나긋하고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녀석을 치려고 쥐었던 주먹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급했다. 몸싸움 때문에 고의적인지 우연인지 자꾸 터치되는 부위는 점점 인내의 한계에 향해 가고 있었다. 내 손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녀석이 먼저 천천히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놓아 보였다.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차분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뒤의 바위를 짚고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다. 어딘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우주가 천천히 내 트레이닝 팬츠를 내렸다. 이내 속옷앞섶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내 것을 꺼내었다. 공기와 접촉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민감해진 온도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녀석은 그것을 한 입에 품었다. 단지 혀로 슬쩍 훑었을 뿐인데 나는 바위를 짚고서야 다리를 지탱할 수 있었다. 자위는 해 본 적이 있어도 그 외의 경험이라고는 전무했던 나에게 있어서 생애 최초의 사까시였다. 따뜻하고 동시에 미적지근하기로 한 물컹한 것이 내 것을 스칠 때마다 난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처음이었지만, 녀석이 무척 능숙하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알 수 있었다. 점점 녀석의 머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도 모르게 그 작은 다갈색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금새 한계가 오고 말았다. 한 가닥 이성으로 빨리 빼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녀석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녀석의 입안에서 내 것을 빼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정을 하고 말았다. 녀석의 얼굴 위에 정액이 퍼졌다. 비릿한 냄새는 비 냄새와 섞여 순식간에 퍼졌고 사정 후에 기운이 쭉 빠진 나와 달리 녀석은 벌떡 일어나 개울에서 느릿느릿 세수를 했다. 간신히 속옷과 바지를 바로 챙겨 입고 세수를 하는 녀석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대로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치밀어 올랐던 분노를 다시 일깨워보려고 했으나 잘 안되었다. 마법처럼 그 용솟음치던 분노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다시 감정을 일깨워보려는 동안, 세수를 마친 우주는 저벅저벅 이쪽으로 돌아왔다. 반쯤 바위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고 차가워진 머리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녀석은 다시 웃고 있었다. 그때 같이 하교했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 내가 녀석을 보고 느꼈던 순간적인 이질감. 그것은 웃고 있으나 웃고 있지 않은 눈이었다. 지금처럼, 환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눈.
“우리 이제 비밀이 또 하나 생겼네.”
녀석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이 환하게 웃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무서웠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것은 아마 타고난 본능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동물적인 감각.
처음으로 누군가가, 녀석이, 무서웠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서의 일 이후, 나는 며칠 동안이나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때마침 장마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가, 어디 아프냐며 걱정하시고 친구 놈들이 몇 명 찾아올 정도로 내 방에만 들어앉아 있었다. 몸은 멀쩡했다. 정신도 맑았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평소에는 느끼지도 못했을 아주 작은 소리, 사소한 감촉, 미세한 바람 같은 것들이 너무나 과장되게 느껴졌다. 못할 짓이었다. 서있는 것도 버거웠다. 평소 덩치 좋고 힘 잘 쓰는 아들이 비척거리자 어머니의 걱정도 태산같이 늘어났다. 낮이고 밤이고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이면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빗소리를 듣고 창문 너머로 비치는 나무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창문이 잠겨 있는지 밤새 확인했다.
일주일 쯤 칩거를 끝내고 집 밖으로 나갔다. 모든 것이 과장되어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은 사라져 있었다. 장마가 지나가자 한층 더 더웠다. 어쩔까 하다가 다리 밑으로 가보았다. 그날 내가 자리를 뜨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눅눅해진 담배, 흩어진 야한 잡지 등이 각도 하나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고 나와서 다시 저녁을 먹으러 집에 갈 때까지 그 곳에 앉아 있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평화로웠다. 어쩌면 그냥 내가 낮잠이라도 자면서 엄청 생생하면서도 그야말로 ‘엄청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들리는 것은 가끔 다리위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뿐으로, 무척 고요했다. 다음날도, 점심을 먹고 나가 해가 질 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담배도, 책도, 시시껄렁한 잡지들도.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장마 때문에 불어난 냇가의 물을 쳐다보며 스스로 물어보았다. 아니, 확실히는 뭘 하고 있는가. 그 일이 꿈 속의 일이 아닌 이상은, 당장 녀석을 찾아내서 후려 패야 하는 것 아닌가. 더럽다고 침 뱉으며 밟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그냥 사내자식들 사이에 한번쯤 있을 수 있는 일이던가. 어차피 남자란 동물은 허리 밑이 머리보다 빠르기도 하고 그냥 즐겼으면 된 건가. 그냥 내가 혼자 자위했다고 생각해버리면 별 다를 것도 없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질문도, 답도.
지는 해를 등으로 받으며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늘 다니는 그 코스로, 나는 문득 갈림길에 멈춰 섰다. 노을을 정면으로 받으며, 녀석이 서 있었다. 다갈색이던 머리가 붉게 보였다.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까지, 붉어 보였다. 대략 10m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채로 말문이 막혔다. 눈에 띄면 흠씬 두들겨 패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왠지 그게 잘 안되었다. 타이밍을 놓쳤다.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어쩌고 저쩌고 머릿속으론 이미 모두 시뮬레이션 되어 있는데 몸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찰나였을텐데 잠깐 멈춰 선 시간이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저벅저벅 녀석에게 걸어갔다. 우주는 단정하고 온화한 표정 그대로였다. 바뀐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나는 녀석의 앞에 섰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손바닥으로 녀석의 뺨을 내리쳤다. 짝, 하는 파열음이 아찔하게 공기중에 퍼졌다. 무섭게 돌아간 고개가 다시 천천히 정면으로 돌아온다. 또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다시 뺨을 때렸다, 이번엔 반대쪽으로. 약간 몸이 밀리면서도 녀석은 온전히 서서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손을 들어 벌써 벌겋게 손자국이 남기 시작하는 뺨을 만질 법도 하건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로 서 있었다. 아까와 같은, 단정한 표정으로.
“미친놈.”
씹어삼키듯, 그 말을 뱉었다. 마주친 눈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장난끼, 미안함, 기타의 어떤 감정도. 그냥 응시할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미안한 기색이나 장난이었다는 반응, 혹은 손찌검에 대해서 버럭하기라고 했다면 나는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고 그 다음부턴 똑같이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녀석은 전에 맞은 입술이 또 터졌는지 피가 비치는 입술로 웃으며 말했다. 웃었다, 분명히.
“우리 집에 갈래?”
그 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대하여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녀석을 따라 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녀석의 방에서 우린 뒹굴었다. 그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2층에 있는 녀석의 방에 올라가기 까지 그 집의 인테리어가 어땠는지 그 땐 몰랐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목을 핥고 귀를 깨무느라 다른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 녀석의 방에 넘어지다시피 들어가서 입고 있던 셔츠를 말아 올렸다. 의외로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피부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갈비뼈 부근을 깨물었고 녀석의 몸이 튀어 올랐다는 것, 그때 창문으로 노을이 가득 들어와 방이 온통 붉어 보였다는 것, 뺨을 때린 자국을 핥아 올리자 녀석이 내던 목울음, 녀석을 바닥에 짓누르며 이루어진 나의 서투른 첫 삽입, 나를 올라탔던 녀석의 얼굴, 급한 속도 속에서 의외로 부드러웠던 그 손길, 녀석이 올라탄 후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비명부터 내질렀던 엉덩이골 사이의 지독한 통증, 바닥에 번졌던 피, 한번으로 끝나진 않았다는 것 등이 몇 가지 기억나는 단상들이었다. 말하자면 나의 첫 경험은 난폭하고 배려라고는 1g도 없는 짐승같은 섹스였다. 실제로, 그때의 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적 언어라고는 쾌감을 정확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로만 오갔으며 그 외에 모든 것은 몸짓과 체온과 울부짖음으로 통했으니까. 내가 위에 혹은 녀석이 위에 올라가며 이루어진 섹스는 몇 번의 사정 후 기절하듯 바닥에 드러눕고 나서야 끝이 났다. 바닥은 정액과 땀과 약간의 피로 더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해가 진지 오래라 밖은 어두웠고 가로등 빛조차 들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힘이 없었다. 팔에 옆에 누운 우주의 팔이 느껴졌다. 우리는 잠시 동안 숨 쉬는 것에만 집중했다. 누운 채 눈으로 어두운 가운데서 얼핏 보이는 시계를 보니 거진 9시가 다되어 있었다. 죽을 것 같은 허리의 통증을 누르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벗어던진 내 바지를 찾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집에 전화를 넣었다. 친구집에서 자고가요. 평소같았으면 작작 좀 놀으라는 잔소리를 했을 어머니는 한참 우울증에 빠져 있던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 아들의 외출이 다행이신 모양으로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자라고만 하시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 놓인 침대에 상체를 기댄 채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는 녀석을 보았다. 아무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녀석이 손짓하여 다가가자 내 어깨를 붙잡고 일어났다. 내 어깨에 매달려 일어나는 데도 휘청거렸다. 갑자기 우주가 웃었다, 바람소리처럼. 욕실은 어디야, 저기. 나도 기운이라고는 손톱 끝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끌다시피 녀석을 욕실로 데려갔다. 불을 켜고 들어가 욕조에 녀석을 내려놓고 미지근한 물을 틀었다. 어두운 곳에서 볼 때에는 몰랐는데 형광등 아래에서 보니 가관이었다. 녀석의 얼굴은 얼굴대로 맞아서 부어오르고 몸은 몸대로 여기저기 붉은 키스마크와 적나라한 이빨자국과 들러붙은 정액이 붙어 있었다. 내 몸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나보다는 피부가 밝은 편인 녀석 쪽이 더 자극적으로 보였다. 위에 달린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도록 한 채 나도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새삼, 나체라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씻어야 하는데 기운이 너무 없었다. 18년간 쌓아온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뜨린 기분이었다. 우주는 꼼짝도 못했지만 그저, 좀 나른해 보일 뿐이었다. 우리 둘은 물을 맞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여전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못하는 우주를 씻기고 나도 씻고 물기를 닦아주고 이번엔 그 녀석을 안아서 그 방의 침대로 옮겨 놓았다. 녀석의 옷을 대충 입혀주고 나도 내 옷을 입고서 걸레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방바닥을 닦았다. 몇 번이나, 욕실과 방을 왔다갔다하며 걸레를 새로 빨아 와야 했다.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앞 뒤 재지 않고 달려든, 사실상 첫경험이었던 나는 그저 무턱대고 덤볐던 반면 우주는 -이미 경험이 있었을- 어느 쪽으로든 처음인 내 사정을 좀 봐주었던 것 같다. 부추기면 부추겼지 절대 거부하진 않았으니까.
정리가 끝났을 때는 11시가 약간 안 된 시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방을 좀 둘러 볼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싱글사이즈 침대 하나, 책상, 책장, 옷장. 기본적인 가구 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꽤 살풍경한 방이었다. 흔히 있을 법한 연예인 포스터 같은 것도 한 장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탄 자질구레한 상장과 트로피가 한 켠에 모셔져 있고 정리 안 된 채 사용하는 책상 위, 방 구석구석에 흩어진 옷가지들로 대표되는 내 방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잠든 줄 알았는데 녀석은 자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현실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무도 없어?”
“아줌마는 아침에만 오고, 아빠는 일 때문에 며칠에 한번 씩 오니까.”
참 일찍도 물어본다 싶어 머쓱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집은 고요했다. 피곤했으므로, 녀석에게 물어 옷장에 있는 얇은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누웠다. 침묵.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생각만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그 뒤로 나는 매일같이 녀석을 만났다. 그리고 매일같이 몸을 섞었다. 주로 녀석의 집에서. 혹은 가끔 그 다리 밑이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곡물창고 안 같은 곳에서. 횟수가 늘어날수록 날이 지나갈수록 점점 그 행위에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막무가내로 덤비지는 않았으나 역시 섹스 자체는 난폭했다. 몸상태가 안 좋을 때에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사까시라도 해서 기어이 사정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즈음에는 점심을 먹고 집을 나와서 녀석의 집에 가 녀석을 안고 다시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 것이 거의 하루 일과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날이 지나면서 대화는 거의 없었다. 간혹 파정후의 나른함 속에서 주고받는 얘기는 학교나 게임, 농구 등 초점 없는 대화뿐이었다. 18살 학생에게는 딱 맞는 주제이지만 다 벗은 채 정액 범벅이로 누운 두 학우 사이에서 오갈 대화는 아닌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이상하고 난폭하며 동물적인 관계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생각하곤 했다. 사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냥 잔다. 마음대로 욕정을 푼다. 그냥 그런 사이다. 늘 그 길의 끝에서 결론은 내가 대체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었으나 여름방학이 끝나가면서 그런 생각도 희미해져 갔다.
녀석의 집은 동네의 한적한 곳에 지어진 별장이었는데 원래 그 집을 지었던 서울의 부자의 취향이었던 듯 꼭 미국드라마에 나오는 여름별장 같은 분위기를 냈다. 벽은 하얀 판넬로 되어 있었고 경사지게 만든 지붕은 어두운 남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제법 동화책에 나올 법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가끔 우린 거길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언덕 위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저 하얀 집의 이미지만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어릴 적에는 그 근처까지 가서 놀아던 기억도 있다. 사실 멀리서 볼 때가 더 좋았다. 별장 치고 전주인은 잘 관리를 안했어서 가까이 가보면 하얀 목재 판넬이 듬성듬성 망가진 부분도 보이곤 했다. 우주네가 이사오면서 수리를 한 것인지 다시 찾은 언덕위의 하얀 집은 말끔해져 있었다. 1층은 부엌과 거실과 아버지가 쓴다는 방이 있었고 2층은 녀석의 방과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매일같이 가기는 했어도 그 집을 찬찬히 구경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저 오고가며 들은 설명이 전부일 뿐, 그 집에서 제대로 들어가 본 곳이라고는 2층에 딸린 욕실과 우주의 방뿐이었다. 집은 전체적으로 장식이 없었다. 그래서 집 자체의 유쾌한 형태에 비해 실제로는 꽤 살풍경한 분위기였다. 거실에 놓인 tv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듯한 우주와 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 그리고 얼굴이 어딘지 우주와 닮은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우주는 가운데에서 웃고 있었고 우주의 엄마는 우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놓은 채 그 쪽으로 머릴 기울이고 있었으며 사진 속의 낯선 남자는 그들과 약간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다. 아직 개학을 하기 전이었다. 우주의 집으로 오는 길에 집 마당 앞에 세운 차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았는데 보자마자 아마도 그가 녀석의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사진에서보다는 좀 더 나이가 든, 우주와는 약간 다르게 생긴 남자였는데 다소 무서운 인상이었다. 꾸벅 인사할 때에도 그는 나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해질 즈음 2층 우주 방 창문에서 우주가 고갤 내밀었다. 아 재욱이 왔구나. 들어와. 우리 아빠랑은 인사 했지? 그 날은 하릴없이 그 방에서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왔다. 꺼림칙했으니까. 녀석은 어머니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사진을 보기 전까진 녀석에게도 어머니가 있을 거란 생각을 망각할 정도였으니까. 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으므로 나는 애초에 묻지 않기로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친구 녀석들은 학원도 안 다닌 녀석이 방학동안 뭐가 그리 바쁜거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것이 방학 중에 한동네 사는 녀석들 얼굴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방학만 되면 집을 바꿔가며 함께 빈둥거리고 놀던 것이 동네의 습관이라면 습관인데 이번에 나는 완전히 무리 밖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자연스레 무리에 속한 우주도 녀석들과 같이 섞여 농담을 던졌다. 누구 만나느라 돌아다닌거 아냐? 그 모습이 너무 태연해서 나는 하마터면, “아, 나 얘랑 물고 뜯고 뒹구느라..” 라고 대답할 뻔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젠 그것이 일상이었다. 방학처럼 매일 뒹굴수는 없었으나 등하교 중간의 짧은 자극, 방과후 체육창고 안에서의 사까시 등 기회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그때쯤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나는 마치 기계처럼 녀석과 몸을 섞었다. 몸을 섞을 때의 녀석과 학교에서 친구로서 만나는 녀석은 완전히 분리된 듯 했다. 진지한 감정이나 애정이라는 따뜻한 말 같은 것도 미신처럼 여겨졌다. 별다른 대화 없는 섹스, 그리고 간단한 농담.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몸은 점점 더 잘 맞아 떨어졌다. 굳이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우주의 몸은 절로 움직여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그리고 확실히, 나는 그것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게 타인의 눈에 보일정도로.
내 아래에서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며 나는 숨을 씩씩 뱉었다. 복근이 바짝 당겨서 죽을 것 같았다. 맛있게도 핥는 소리가 적막한 체육창고에 그나마 활기를 띄워주었다. 결국 난 녀석의 입에 사정을 했고 한번 켁켁 거린 우주는 그걸 다 삼키고 이로 살짝 내 페니스를 물면서 장난을 쳤다.
체육창고에서의 유희 후에 문을 열고 나와 먼지가 잔뜩 붙은 옷을 털며 자전거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을 때,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코너에서 나온 것은 친구인 G였다. 순간적으로 쟤가 왜 저기 있지 라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학교니까, 어디서든 나오는게 당연하잖아라고 깨닫는 사이, 나보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우주였다.
“이제 집에 가?”
“응, 니넨 뭐하다 이제 가냐.”
“농구 한판 하고 이제 집에 가려고.”
내 교복셔츠의 등짝은 아직 젖어있었다. 나는 아직 이마에도 남아있는 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우주의 머리나 교복 카라도 흐트러져 있었다. 농구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G는 옆으로 째진 작은 눈을 껌뻑이며 별 말없이 우리와 함께 움직였다. 혹시 창고에서 나오는 것을 본 건 아닐까. 에이 말도 안돼. 그렇게 치부하면서도 내심 속이 울렁거려서 입 열기가 어려웠다. G랑 장난치며 신나게 이야기 한 것은 우주였다. 그 뒤로 체육창고에서는 하지 않았고 만나는 장소는 한정되었다. 간혹 G로부터 ‘너 요즘 너무 우주랑만 붙어 다니는 거 아니냐, 사내새끼들끼리 사귀냐’라는 핀잔조의 말을 듣기도 했으나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좀 더 잘 살폈어야 했다. G의 톤이 어땠는지, 눈빛은 어땠는지, 얼마나 자주 그랬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그 일’은 여름의 끝에 일어났다. 추분을 며칠 앞둔 토요일로 기억한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중에 갑자기 비가 왔다. 쉽게 그칠 기세는 아니었는데 둘 다 우산이 없던 터라 다리 아래의 아지트로 내려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멍하게 앉아서 내리는 비와 냇가를 번갈아 보았다. 안 그래도 끈적한 공기가 좀더 농도짙게 고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그냥 처음 생각.”
“너 내 얼굴에 쌌어.”
“그런거 말로 좀 하지마.”
우주는 웃었다. 눈이 웃고 있어서 왠지 안심되었다. 몸을 섞을 때 환희와 탄식에 젖은 그 엉망이 된 얼굴과는 달리 녀석의 절정의 순간에 눈은 늘 차가웠다. 행위 중에 눈을 보면 몸에서 나는 열기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과는 다르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처음 내가 느꼈던 기시감이 찾아들 정도로. 그래서 난 으레 녀석의 눈을 피했다. 눈을 보면 잊고 있던 죄책감, 섬뜩함 같은 것이 동시에 찾아왔으니까.
“할래?”
“공기도 끈적거리는데 무슨,”
“해.”
녀석이 말을 툭 내뱉으며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밀려서 등이 바위에 부딪혔다. 어느 쪽이든 시작만 하면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였다. 그 수많은 행위에서 이미 서로의 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달아오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셔츠를 벗기며 드러나기 시작한 목선을 덥썩 물었고 녀석의 손은 내 바지춤을 넘나들었다. 손을 올려 드러난 녀석의 작은 유두를 살짝 비틀어 괴롭히고 그 때문에 뒤로 젖힌 고개로 움푹파여 들어간 쇄골을 핥는다. 작은 공간은 온통 빗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아 씨발, 죽겠네.”
녀석의 손이 빨라짐에 따라 욕지거리와 함께 신음소리를 흘렸을 때였다.
‘찰칵’
나는 녀석의 제법 잘 잡힌 복부를 핥아내려 가던 것을 중단했다. 모든 것을 멈췄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갤 들었다.
G였다. 한손에 든 것은 녀석이 얼마 전에 새로 샀다고 자랑하던 그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그때의 G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충격을 넘어서 그것은 명백하게-
“역겨워, 개새끼들아.”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것도 장난인가. 내가 급하게 옷을 추스르며 일어나자 G가 뒷걸음질 쳤다. 우주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평소처럼 약간은 멍한 표정이었다. 야, 하고 내가 한걸음 다가가자 G는 더욱 물러섰다.
“저리꺼져, 이 호모새끼야!! 씨발 존나 역겹네. 너같은 새끼랑 내가 같이 목욕탕 간 걸 생각하면 존나 더럽다.”
녀석이 말을 할 때마다 손에 쥔 핸드폰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내 눈에는 오로지, 핸드폰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 그런 거 아니야. 그거나 이리 내놔.”
“미친 새끼야, 내가 호구냐. 같은 거 달린 새끼들끼리 붙어먹으면 좋냐. 어쩐지 요즘 이상하다 했다, 더러운 새끼들. 이우주, 저 새끼도 존나 미친놈 아냐!!”
G는 되는대로 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자갈을 밟은 G가 한순간 비틀거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덤벼 들었다. 다리 아래에서 벗어나자 여전히 따갑게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핸드폰을 쥔 손을 발로 찬 뒤 당황한 G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원래 체구도 작고 싸움에도 소질이 없던 G는 딱히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 위에 올라앉아 무참하게 녀석을 두들겨 팼다. 내가 멈춘 것은 등 뒤에서 들린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만해. 걔 안 움직여.”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G를 내려다보았다. G는 눈을 뜬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녀석에게서 일어나 땅바닥을 더듬어 다녔다. 손에 잡히는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 사진을 지웠다. 그리고 나서 핸드폰을 내던져 마구 짓밟았다. 콰직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일을 끝마치고 나서야 나는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G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의 돌처럼,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널부러진 그대로 G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벅저벅 소리가 나더니 우주가 나를 지나 G에게 다가갔다. 귀를 가슴에 데보기도 하고 손을 코 끝에 가져다데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G는 죽었어.”
나는 픽 하니 웃었다. 말도 안 된다. 죽었다는 말이 어찌 그리 쉽게 나오냐. 몇 대 때리지도 않았다구. 죽었다는 말을 전하기에는 그 말을 하는 녀석의 얼굴이 너무 평상시와 같았다. 단정하고 온화한 어딘지 웃고 있는 듯한 그 표정.
“죽었어.”
나는 기다시피 G에게로 다가갔다. 눈이 허옇게 뒤집어진 G는 비를 맞아서인지 몸이 아주 차가웠다. 나는 실실 웃으며 그 뺨을 몇 번인가 때렸다. 내가 흔드는 방향대로 고개가 흔들렸다.
“야, 눈 떠, 새끼야.”
“..........”
“눈뜨라고, 미친놈아.”
“..........”
“재미없으니까 눈 뜨라고 병신아!!”
반응은 없었다. 숨소리도, 가슴의 움직임도. 그 교복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도 G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흔들리며 G의 머리가 닿아있던 돌에는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붉은 색은 금새 물에 씻겨 내려갔다. 비냄새 때문인지 피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말도 안된다.
우주는 잠자코 피가 묻은 돌을 냇가에 던졌다. 돌은 가라앉았다. 멱살을 쥔 채로 굳어있는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별다른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뜨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인건가? 이렇게 쉬운 것인가 살인은? 손을 떠는 나에게 우주가 나긋하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달콤하고 나긋하게 들렸다. 어딘지 유쾌하기도 했다.
“처리하자. 이렇게 놓으면 안 돼.”
처리? 무슨 처리? 어떻게? 나는 녀석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반응하지 못했다. 우주는 천천히 G의 시체를 어깨동무하듯 부축해 일으켜 세웠고 나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말했다. 마치 인사불성의 사람을 부축해가는 것처럼 나와 녀석은 양쪽에서 G의 축 처진 몸을 부축했고 비를 맞으며 냇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도로로 올라갔다가는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끝장이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피도 흘러가 흔적이 남지 않을 거라는 것이 우주의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냇가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녀석의 집이 보였다. 녀석의 집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전혀 없는, 몸이라기 보다는 그냥 살점 덩어리에 가까운 G를 부축해 걷는 것은 힘들었다. 쏟아지는 비와 떨리는 손 때문에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우주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녀석은 턱으로 집 뒤편을 가리켰다. 나는 기계적으로 앞을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널찍한 뒷마당이 생겼을 집 뒤 공터는 인근 산의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와 숲에 걸쳐서 늪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메우던가 하겠지만 그곳은 녀석의 집에 딸린 사유지 영역이어서 어차피 마을 사람 누구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을 사들여 집을 짓기 전에는 사고도 꽤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이므로 모르는 사람도 꽤 많았다. 바로 그 늪이었다.
늪 앞에 이르러서야 G를 내려놓았다.
“버리자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기계적이고 무감각했다. 이상했다. 우주는 어깨를 휘휘 저으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서는 나를 보았다.
“응. 그럼 니가 이 시체 지고 가서 그 집 엄마한테 말 할래? 댁의 아드님 내가 죽였습니다. 경찰에 가서는 남자랑 자는 것을 들켜서 죽였습니다, 할 꺼야?”
우주의 말투는 평이했으며 눈으로는 뭔가를 계속 찾았다. 아 찾았다 하고 굴려 오는 것은 묵직한 돌이었다. 비가 오지 않고 날씨가 화장했으면 콧노래라도 불렀을 가벼운 몸짓과 표정이었다. 아 그래. 시체를 처리해야지. 이렇게 내 인생을 망칠 수는 없어.
우주가 자신의 교복 -피가 묻어 있었다-을 찢어 돌과 G의 목을 한데 묶었다. 다른 돌도 굴려와 발목에도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래 처리해야지. 처리해야지.
“이제 버리자.”
우주의 말에 느릿느릿 돌을 달아서 한층 더 무거워진 G의 몸을 늪 쪽으로 밀어 넣었다. 비 때문인지 한층 더 어두워 보이는 유사들은 무섭도록 빠르게 G의 몸을 삼켰다. G의 머리가, 어깨가, 몸이, 다리가 차례로 삼켜졌다. 소리도 없었다. 조용히, G가 사라졌다.
“이제 다 했네. 아 이것도.”
언제 챙겨왔는지 부서진 핸드폰을 우주는 힘껏 늪지에 집어 던졌다. 나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녀석은 웃고 있었다. 그런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눈도, 입가도 매력적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녀석의 곧게 뻗은 목덜미로 가져갔다. 손으로 녀석의 목을 움켜쥐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우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몹시 행복하게 웃었다. 손에 힘을 주려고 했는데 잘 안되었다. 어떤 울음이, 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짐승 같은, 사람의 언어가 아닌 그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난 그 목을 조르지 못했다. 그제서야 왜 내가 이 얼굴을 보고 위험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난 그때 그것이 단순히 금지된 일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눈 때문이었다. 그 눈. 웃고 있어도 웃지 않던 눈. 흡사, 파충류의 그것처럼 차가운 그 눈.
그 후 마을은 G의 실종으로 한동안 난리가 났었다. 그러나 평소에 그렇게 착실한 타입은 아니었던 탓에 가출했을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린 채 흐지부지 되었다. 나는 겨울방학이 채 끝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집에서는 반대했으나 G의 일도 있고 해서인지 극심한 반대는 아니었다. 학교에선 늘 우주를 봐야했다. 더 이상의 관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주쳐야 했던 것은 이미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인 한 집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웠다. 단순히 밀고의 두려움이 아니라 녀석의 존재, 그 자체가. 이상하게도 G가 나오는 악몽은 꾸지 않았다. 내가 꾸는 악몽에서는 늘 우주가 나왔다. 별다른 일 없이 웃고 있는 모습으로. 그런 꿈을 꾸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위에 눌리곤 했다.
이듬해 봄에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했다. 내 건강과 진로를 걱정한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이사하던 날, 나는 차에 탄 채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멀리 서있는 우주의 모습을 본 것도 같다고 생각했으나 눈을 깜빡이니 그런 잔상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18살을 지배했던 광기로부터 떠났다.
“잘 지냈어?”
“아니.”
이후의 내 삶은 평탄치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 될 만큼.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뭔가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책을 보려고 하면 글씨가 흔들리고 시야가 어지러워서 볼 수 없었다. 검정고시 공부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우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술이라도 배우게 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잘 되지 않았다. 꼬박 4년을, 집에서 멍하게 보냈다. 눈을 감으면 악몽을 꿨다. G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가끔은 나오기도 했다. 주로 우주가 나오는 악몽이었다. 자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더욱 피로해졌다. K시를 떠난 지 5년쯤 되던 해에는 비교적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신문도 읽을 수 있고 간단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부모님은 공부를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그때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려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나와 따로 살았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때에는 집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뭔가 즐거운 일, 웃을 수 있는 일은 나에게 금지되었다. 스스로 내건 금지다.
“나는 잘 지내. 졸업 전이라 정신없지만.”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옆에 나뒹구는 보드카의 남은 한 모금과 함께 삼켰다. 내 대답 여하에 관계없이 노래 가락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우주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의대를 다니고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 등. 나는 잠자코 그 소리를 들었다. 환청처럼 웃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 너 이사 가고 나도 얼마 안가서 이사 갔어. 아버지 일 때문에.”
“......무슨 용건이야.”
우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간극이 나를 더 조여왔다. 녀석은 이내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잊은 건 아니지? 오늘은 그날이잖아.”
여기서 한번 더, 녀석이 말을 쉬었다.
“우리가 G를 죽인 날.”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매해 이 날이 올때 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술을 끌어 모아 마시고 억지로라도 의식을 차단시키곤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다. 내 왼팔의 엇나간 칼자국들을 내려다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너지.”
“뭐가?”
“G를 다리 밑으로 부른 것.”
웃는다. 분명히 웃고 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해, 재욱아.”
“G는 집이 반대 방향이야. 학교 뒤쪽에 사는 놈이 토요일 오후에 비까지 맞아가며 그 곳으로 올 일은 전혀 없어.”
나는 G를 맞닥뜨린 그 장면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지. 그때 G는 나에 대해 배신감과 분노를 터뜨린 반면, 우주에 대해서는 딱 한 마디 했다.
‘이우주, 저 새끼도 존나 미친놈 아냐!!’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나 혼자 유폐하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뉘앙스가 다르다고. 혐오감이 아니라 어이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G는 그저 왔다갔다하며 우연히 많이 부딪혔을 뿐 나나 우주이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그 날 학교에서 우주가 다리 밑 비밀공간이야기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뭔가 좋은 것, 비밀 스러운 것으로 꼬드겼을 것이다. 학교를 파한 것은 같은 시간이나 우주가 비밀장소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G는 혼자 가기위해, 그 방향으로 가는 우리와 동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르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과 중간에 비가 온 것이 앞서 간 우리와의 시간차이를 냈을 것이다.
“왜 그랬어.”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모르겠다. 혼자 지내기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너.”
“왜 그랬냐고!! 왜!!!”
상대방은 조용했다. 침묵이 버거웠다.
“그건 재미있는 의견인 것 같아. 이건 어때, 나도 흥미로운 가설이 하나 있어.”
“..........”
“너와 G가 싸우고 G가 쓰러질 때 머릴 부딪혔지. 머리가 깨지고 피가 많이 났어. 거기에 너한테 무참하게 두들겨 맞았고. G는 움직이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어. 그래서, 늪에 버렸지, 우리가. 근데 말이지.”
“..........”
“만약 G가 죽었던 것이 아니라면?”
“...........”
“그냥 뇌진탕과 너의 주먹질에 의한 일시적 가사상태였다면?”
“..........”
“늪으로 던져지기 전에 파르르 움직이는 눈꺼풀과 손을, 내가 봤다면?”
하하하, 하고 우주가 웃었다.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그래서 우리가 죽인거야, 재욱아. 너랑 나, 우리 둘이. 내 생각 어때 그럴싸하지. 이걸로 우린 평생 하나로 묶일 테니까.”
난 핸드폰을 내던졌다. 파열음과 함께 방안 어딘가에 부딪혀 핸드폰이 떨어졌다. 문득 내 손이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왼쪽 손목을 매만졌다. 무수히 그어진 엇나간 칼자국들이 새삼 통증이 일어났다. 환통이다. 이미 오래된 상처들이라 다 아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창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 들었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신문을 더듬어 끌어와 그 희미한 빛에 의존해 헤드라인을 읽었다.
[K시 외곽에서 조성중이던 리조트 부지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 2 구 발견]
부지는 내가 살던 마을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마 녀석도 신문기사를 읽은 것이 아닐까. 어떤 생각일까.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즐기고 있을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 느낌 없었다. 이제 와서 자수를 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고 이 이야기를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심판을 받게 된다면 받는 것이고 법정에 선다면 내 죄에, 그때 그 늪지에서 우주를 죽이지 못한 것도 아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저 나는 기다리고 있다. 단죄를.
한 가지 의문은, 발견된 시체가 2구 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야 나는 이사 온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주가 꽤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의 늪지를 알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2011년도에 썼던 글 리네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