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2차

미생 석율그래 / 울분을 가진 남자

힝개 2015. 2. 6. 01:28



울분을 가진 남자

조폭AU

(성냥을 가진 남자와 연작)




장그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보통 말은 내가 하고 장그래가 면박을 주면, 나에게는 선택권이 두 가지가 주어지는데 하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전에 했던 말을 계속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가 말을 계속해도, 혹은 말을 바꿔도 장그래는 계속 면박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거릴 뿐 절대로 먼저 등을 돌릴 줄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 동그란 어깨를 보면서 '좀 바보 아냐?'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돌아갈 줄 모르는 그 어깨가 고마워서 또 자꾸만 말을 걸었다. 


장그래는 나보다 일주일 늦게 '포에버'에 들어왔다. 아가씨들이랑 팔짱끼고 지나가면서 새로 왔다는 실장은 대충 뒤통수만 봤었다. 동그란 뒤통수. 척 봐도 이 곳에 잘못 흘러들어온 모래알이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그냥 그 뒤통수만 봐도 술집에서 심부름 다닐 게 아니라 도서관에서 토익 공부하면서 친구랑 캔커피 나눠마시고 있어야 할 뒤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뒷골목에서 처음 제대로 인사를 나눴는데 장그래는 어지간히도 뚱했다. 얼굴을 보니 더욱 미련맞게 생겼다. 미련맞게 생겼다는 것은 생김새가 못났다는 소리는 아닌데 -장그래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다- 생각이 지나치게 깊고 정을 잘 주고 사람 잘 믿게 생긴 얼굴이었다. 뭣보다 눈이 그랬다. 맑아가지고. 그 어둠 속에서도. 담배를 끊었다는 말에 독하다고 혀를 찼지만 애초에 '그런 얼굴로 담배를 피웠었다고?' 물을 뻔 했다. 정말 웃기게도 술 냄새 담배냄새 풀풀 풍기며 심부름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러 들어갈 때도 장그래는 가끔 신분증을 요구 받는다. 내가 옆에서 정신없이 웃고 있으면 '웃지마.'라고 잘라 말하면서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나같으면 '내가 이정도로 동안이야'하고 주민등록증을 이마에 붙인 채 자랑이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하나 없이 '웃지마' 한 마디가 끝이다. 여러모로 장그래는 재미없는 놈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래서 장그래가 좋았다. 이 바닥에서는 이런 놈이 좀 필요해. 난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튀어보이고 싶고 모두가 성공하고 싶고 모두가 모두의 위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진창이 바로 여긴데, 어느 놈 하나 정도는 가만히 제 할일만 하고 살아도 좋잖아. 내 눈에는 그게 장그래였다. 나? 나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밟고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 중에 하나다. 먼저 올라가는 놈 발목을 쥐어 잡아 끄는 것도 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놈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장그래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물론 나에게 여러번 면박을 주기야 했지만 나는 그것을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면박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손님에게는 성실하게 허리를 굽혔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어를 사용했다. 나만빼고. 내가 첫 만남에 반말을 한 것이 기분이 상했는지 어쨌는지, 그는 쭉 말 뒤를 잘라 먹었다. 1살 많은데다가 일주일 선배인 나한테 유독 박하게 구는 것이 이상하게 나는 싫지 않았다. 


장그래는 참 예의가 바르다. 손님이 침을 뱉어도 눈썹하나 찡그리지 않고 닦아내는 인간이다. 침이 뭐야, 나는 언젠가 복도에서 장그래가 두 손에 뭔가를 받쳐들고 걸어가는 걸 마주쳤다. 뭔가가 무엇이었는지는 상세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 사람이 절대 만지고 싶지 않을, 과거에 저녁식사였던 무엇인가라고만 해두자. 그걸 장그래는 찡그리지도 않고 손에 받아들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다음 아침에 장그래는 해장국을 먹지 못했다. 평온한 얼굴로 배가 안고프다고 했지만 나는 그 역시 속이 뒤집어 졌고, 또 아무리 그 얼굴이 멀쩡해 보여도 그 안까지 멀쩡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풀면 모두 인간극장 주인공감이다. 게다가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시키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말 한두마디 붙이면 구구절절 사연들이 쏟아진다. 나는 내가 관리하는 아가씨들의 집 숟가락 갯수까지 모두 알았다. 그러나 장그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수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가끔 본다는 드라마나 연예인 이야기, 축구, 야구 따위에는 조금씩 말을 했지만 자신의 고향과 부모님과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않았다. 나는 여러날에 걸쳐 캐묻다가 포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대체 담배는 왜 끊었는데?' 장그래는 나를 한심스레 쳐다봤다. 겨우 그런 걸 묻냐? 하는 얼굴이었다. '숨이 차서.' 그게 끝이었다. 나는 장그래의 과거를 모른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몰랐다. 구태여 말 안하는데 캐물을만큼 다정한 인간도 없었으니 큰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보는 것들로만 장그래를 구성했다. 내가 보고 들은 장그래는 예의가 바르고 입이 짧고 참을성이 많다는 것이다. 말할 때도 날티가 나지 않았고 쉽게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넌 어느별에서 왔냐? 그렇게 물어도 장그래는 '몰라' 라고만 대답했다. '엄마는 있을 것 아냐.' 장그래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있겠지.' 그리고 다음 순간 조금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말했다. '물어보지마.' 무서운 얼굴이라고 생각한건 얼굴에 음영이 없어져서다. 가뜩이나 엷었던 얼굴이 더욱 더 엷어진 순간. 나는 그에게 더이상 부모님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습게도 사건은 그날 터졌다. 손님 심부름으로 룸에 들어갔던 장그래의 손목을 잡고 아가씨들한테나 벌이는 농짓거리는 한 손님에게 장그래가 정중히 거절하며 손목을 빼자 바로 솥뚜껑같은 손으로 뺨을 맞았다고 했다. 장그래는 눈만 껌뻑이고 아픈티도 내지 않았다. 시뻘겋게 부어오른 얼굴만 아니면 맞은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야 이런데서 웃음파는 년들이나 너같이 손님들 후빨하는 새끼들이나 뭐가 다른데? 니네 애미는 너 이러고 다니는 건 아냐??' 한쪽 뺨이 완전히 부어오른 장그래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손님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고 친절하게 문까지 닫고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 룸에 있던 아가씨에게 모든 걸 듣고 뒷문부터 찾았다. 장그래는 거기 있었다. 길을 잃은 애처럼 문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둠 속이라 그의 부어오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주섬주섬 성냥을 켰다. 어디 좀 보자. 성냥불을 들어올리자 갑자기 장그래가 훅 하고 숨을 불었다. 나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를 들고 있다가 던져 버리고 하나 더 켰다. 또 훅. 나는 오기가 생겨서 하나를 더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장그래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켜지마."


나는 성냥을 도로 집어 넣었다. 장그래의 손은 밤공기만큼 차가웠고 목소리는 습했다. 그는 어쩌면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자격이 있다. 나는 그저 어둠속에서 장그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가 꾸역꾸역 울음을 다 삼킬 때까지. 엷은 얼굴 뒤로 서러움과 울분을 끌어당길때까지.